그녀 이름은
조남주 지음 / 다산책방 / 2018년 5월
평점 :
절판


"아홉 살 어린이부터 예순아홉 할머니까지 육십여 명의 여성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그 목소리에서 이 소설들이 시작되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상기된 얼굴, 자꾸만 끊기던 목소리, 가득 고였지만 끝내 흘러내리지 않던 눈물을 잊지 않겠습니다." _6쪽 (작가의 말)

 

약자 혹은 소수로 너무 오래 지내다보면 상황에 무뎌진다,고  했다.
나는 엄마를 보면서 자랐고 엄마는 엄마의 엄마를 보면서 자랐다.
세상의 그 어떤 말보다 클리셰 가득한 '난 엄마처럼은 살지 않을거야.'가 그 어느 때보다 큰 목소리를 내고 있는 지금, '왜 이리 유난이냐'가 그 어떤 대답보다 짜증나는 지금, 또 한 권의 책을 읽는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여자라서 차별 당한다'라는 느낌의 환경 속에서 자란 편은 아니다.
남동생이 있기만 밥상을 딱히 차려 줘야 하는 집안 분위기도 아니었고 (차라리 남동생이 나를 먹여살림),
남동생에게 나의 대학진학(에 필요한 돈)을 양보해야 하는 어려운 형편도 아니었고 (남동생은 대학을 안갔다),
'기집애가', '여자애가 되서는'으로 시작하는 문장은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별로 들어본 적 없고 (아마 모범생 쪽이라 비난/비평 받아 본 기억이 애초에 많이 없다),
취직을 해서도 커피나 복사나 개인적인 심부름을 하는 포지션에 있어 본 적도 없다.
결정적으로 최근까지도 내 주변의 누구(여자)로부터도 딱히 성차별을 당했다는 증언(?)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김지영> 씨의 이야기가 사기성이라든가 과장이 심하다고 (웃으며) 비하하는 사람은 아니다. 아니, 될 수 없다.
<김지영>씨의 증언 이후, 새로 들은 이야기와 새로 본 세상이 있기 때문이다.
남동생에게 밥상을 차려주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는 나보다 고작 열살 쯤 밖에 안 많은 제주도 출신의 언니, 그 언니는 공부를 더 하고 싶었지만 계집애가 많이 배우면 시집 못간다고 그 집에선 남동생만 대학을 보냈다고 한다 (어차피 결혼은 안했다).
다른 언니는 결혼식 때 결혼서약으로 '맞벌이지만 아침식사만은 꼭꼭 차려주겠다'는 실언을 했다가 일 년여만에 이혼한 케이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식의 증언이었다, 아침식사 차려주기에서 끝나지 않았다던 내조에의 요구).
어린 여자애들로 채워진 회사의 계약직 팀비서 직급의 친구들을 새롭게 보게 되었다, 고용상의 그리고  급여상의 차별을 갖고 가던 그 친구들.

랜덤하고 빈번하게 일어하는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폭력/폭행, 몰카, 리벤지 폰porn 등등의 '사회적 문제'까지 끌어들이는 것은 차치하고 우리는 지금 어려운 세상을 산다.
여자인(데도) 내 머릿속에 자리잡은 고정된 성역할을 경계해야하고, 나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학습된 가부장적 모습과 싸워야 한다.
(고백하건데, 부끄럽게도, 나는 '아이가 아파서 빨리 퇴근해야 한다'던 직장동료(여)를 굉장한 가부장적 태도로 탓한 적 있으며, 가정주부라던 친구의 아내를 아래로 본 적 있다.)

소설이라기 보다 증언록.
더 많은 <김지영> 씨가 세상에 목소리를 낼 수 있기를.
더 많은 언니/ 엄마/ 할머니/ 이모/ 고모/ 여동생들이 세상에서 눈에 띄길, 눈에 걸리길.

 

"언젠가 딸이 회식했다고 술을 잔뜩 마시고 들어와서는 엄마 미안해, 하면서 펑펑 우는데 마음이 참 안 좋았어. 그게 왜 걔가 미안할 일이야. 걔는 내가 가르친 대로 열심히 살 것밖에 없는데. 근데 진명 아빠, 나 사실 좀 억울하고 답답하고 힘들고 그래. 울 아버지 딸, 당신 아내, 애들 엄마, 그리고 다시 수빈이 할머니가 됐어. 내 인생은 어디에 있을까. 아이고 벌써 일곱시 반이네. 난 이제 밥해야겠다." _201쪽

 

"누구에게나 열린 광장, 스스로 모인 사람들, 같은 생각과 목적, 같은 목소리. 광장에 서니 약간 벅찬 기분이 들었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 감정을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굳이 가장 비슷한 단어를 찾는다면 죄책감일 것이다. 살면서 잠시라도 치열했던 적이 있었나. 고민하고 의심하고 질문했던 적이 있었나. 그나마 평화로운 시절이었다고, 경기가 어려워 먹고살기도 바빴다고 스스로에게 핑계를 대보았지만 J씨는 마음 한구석이 계속 묵직했다." _2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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