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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대화
정지아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 근 일년간 읽은 소설집 중 최고다. 아주 농밀한 문학의 맛이 느껴지는. 이런 사람이 문학가구나 하고 무릎을 치게 되는. 그런 경험이었다. 정지아 작가를 이제서야 알게 되다니! 좋은 작가를 알게된 주는 내내 행복하다.
- 단편들은 크게 세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작가가 말하는 바와 같이 우리사회의 하위 99%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서평에서는 "그 99%의 사람들은 신분이나 계급에 상관없이 견딜 수 없는 아픔을 천형인 양, 운명인 양, 차라리 습관인 양 견디고 살아간다. 그 평범한 비범함이야 말로 이 참혹한 세상을 끝내 포기하지 않고 건너가게 만드는, 우리가 매일매일 마주치면서도 무심히 스쳐 지나가는 일상의 기적이 아닐까." 라고 말한다. 내가 특히 좋았던 부분은 노숙자, 가난한시골의 늙은 부부 등 이런 사람들을 프로토타입화 하지 않고 1인칭 시점에서 서술하면서 이들에게도 페이스트리 같은 생각과 감정의 겹겹이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직접 경험하지 못한 인물의 시점인데 어쩜 이렇게 생생하게 다가오는지. 무겁지만 슬프지 않은 '천형'처럼 담담하게 주인공의 결핍과 세계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있는 독자인 '나'를 자각할 수 있는 모처럼의 경험 이었다.
- 다른 하나는 지나간 빨치산에 대한 이야기. 이념을 기치로 인생을 걸었으나 지금에 와서는 이념을 좇는 것이 촌스러운 일이 되거나, 아니면 오랜 세월에 함몰되어 버린 이들의 일상을 살아가는 이야기다. '숲의 대화'는 다소 감상적으로 그려졌으나 그 외에는 자조적인 이야기 기법이 모더니즘 소설을 읽은 듯 하다.
- 또 다른 하나는 여성의 시점에서 그려진 이야기. 늙은 세 친구의 소소한 시기 질투에 관한 이야기, 늙은 노부인의 세상에 대한, 가정부에 대한 정신승리 이야기는 그 삐죽삐죽한 감정들이 놀랍도록 섬세하다!
- 전반적인 흐름에서 주인공들은 자기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하지만 일상과 세월의 무게에 이를 접는, 한을 풀어내기보다는 응어리를 부둥켜 안고 인생의 동반자처럼 공존하고자 하는 시각이 소설집 전체의 이야기들을 관통하고 있다.
괜스레 버럭 소리를 지르고 그는 정거장의 불빛에 의지하여 쌩하니 앞서 걷는다. 언젠가부터 아내를 보는 일이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는 제 비밀스러운 속내를 만 세상에 까발린 듯 불편하다. 이기지도 못하는 주제에 하루가 멀다고 아들 녀석 목욕물 데워 나르고는 밤마다 끙끙 앓는 청승이며, 쉰 밥 한 덩이조차 버리지 못하고 끓여먹는 비루며, 자식 뒤치다꺼리에 점점 볼품없이 말라가는 꼬락서니며, 아무리 참으려 해도 아내를 보면 뭐랄 것 없이 열불이 불쑥 치솟아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만다. 자식 저리 된 게 다 제 업보인 줄 아는 아내는 그가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말대꾸 한 번 하는 법 없이 무연히 돌아서서는 혼자 소맷 자락으로 눈물을 닦을 뿐이다. 소리 지른 뒷맛은 소태처럼 쓰디쓰다. 정류장 쪽으로 꺾어지며 흘깃 뒤돌아보니 아내의 걸음이 어딘지 더 어설프다. 넘어지면서 발목이라도 접질린 것이리라. 또 열불이 치솟아 그는 담배를 뽑아 문다. 태성이 재빨리 라이더 불을 들이민다.
500미터 남짓한 길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박과 최는 슬로우 비디오로 걷는다. 좁은 인도에서 걸음 더딘 그들을 바라보는 누구도, 그들이 한때 빨치산으로 혹은 켈로로 전장을 누비던 역전의 용사임을 상상하지 못한다. 그들은 그저 거치적거리는 노인네들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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