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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설주의보 - 1982 제6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민음 오늘의 시인 총서 18
최승호 지음 / 민음사 / 199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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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눈이 많이 내리는 강원도. 강원도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있다.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강원도 춘천에서 살아오고 있는 최승호의 시세계는 그러한 지리적인 특성도 어느 정도 반영된 것이 아닌가 한다. 특히나 '대설주의보'라는 시집은 말이다. “누가 우리를 위해 울어줄 것인가?”라는 소리없는 아우성에 대한 최승호의 그로테스크한 울음소리가 '대설주의보'이다.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던 시절. 그 아픔을 놓치지 않고 있는 최승호의 눈은 차가우면서도 따뜻하다. ‘왜 그래야만 하는가’에 대한 시대적 궁금증을, 그리고 그 궁금증에 대한 나름의 해석을 해내고 있는 '대설주의보'. 그 차가움의 공포를 우리는 이제 시를 통해서도 느낄 수 있게 된 것이다. 한없이 눈이 내리던 그 시절에도 희망은 피어오르고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다. 절망속에 피어올린 그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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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여우 창비시선 163
안도현 지음 / 창비 / 199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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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여우■. 제목이 심상치 않은 시집이다. 제목으로 여우를 선택한 시집이 있을까. 안도현은 이 여우라는 시집으로 그리움을 형상화해낸다. 여우라는 짐승이 가진 그 뉘앙스를 그리움과 함께 섞어 내고 있는 것이다. ■겨울 강가에서■에서 보여주듯이 안도현의 그리움은 오직 인간만을 향한 그리움은 아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향한 그리움. 그것이 바로 시인이 그리워 해야할 대상인 것이다.

겨울, 흩날리다가 강에 떨어져 녹아져 버리는 그 눈을 생각하는 마음. 그리고 그 눈이 안쓰러워 결국 자신이 얼어붙어 지켜준다는 상상은 탄성을 자아낸다. 역시, 안도현이 수십 년을 초등학생들과 더불어 호흡해왔음을 여실히 드러낸 것이리라. 안도현은 상투적이고, 진부한 것들을 받아들이지 말고 창의적인 시를 쓰자고 외치는 시인 중에 한 사람이다. 그의 시 속에 묻어 나는 직설적이고, 내뱉으면서도 곰삭은 시어들은 그런 그의 외침과 다름 아니다.

‘시란 무엇인가?’라는 이 케케묵은 질문을 안도현은 “그리움”으로 답하고 있다. ■그리운 여우■는 ‘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답가인 셈이다. 그리움으로 가득한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는 무엇을 더 그리워해야 하는 것일까를 생각하게 한다.음은 오늘도 창공을 비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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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이 멀지 않다 민음의 시 80
나희덕 지음 / 민음사 / 199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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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시인을 만났던 적이 있다. 물론 사적인 자리가 아니라 공적이 자리에서 말이다. “시의 속도”에 대한 강의를 통해서 나희덕 시인을 만났다. 예상보다 인상이 너무나도 좋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달변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설은 거두절미하고, 시인은 시집으로 말하는 것이다. 나희덕 시인은 항상 그녀의 시집을 통해서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을 준다. 얼핏 스치고 지나갈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세밀한 관찰력. 그리고 그 관찰력은 그저 관찰력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관찰을 통해 세상을 새롭게 받아들이게끔 해준다.

시간의 속도에 지쳐버린 인생들에게 느긋함을 알려주고, 여유로운 생활을 되찾기 바라는 시인의 마음은 시의 전반적인 분위기에 녹아 있었다. 그것이 언제이든지 우리가 가야할 곳은 정해진 운명. 허무주의적인 인식이 아니라, 실존적 인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할 수 있었다.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 서글퍼 하는 인생이 아닌, 그 가벼움을 되려 홀가분하게 여길 수 있는 시인의 마음은 오늘도 창공을 비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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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금이 있던 자리
신경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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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금이 있던 자리”는 풍금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세대만이 느낄 수 있는 소설이 아닌가 한다. 아주 가끔은 이렇게 오래되고, 남루한 기억이 아름답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것에 새삼 놀란다. 그리고 더러는 그 기억들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지금의 것보다 좋지 않은 것이라 할지라도 오래된 것은 그리움이 된다. 오래된 기억은 그리움이 되는 것이다.

여성스런 말투를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편지 형식의 글로 시종일관하고 있는 “풍금이 있던 자리”는 풍금소리와도 같이 들린다. 먼지가 자욱하게 앉은 십 수년 전의 장편의 편지를 읽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풍금이 있던 자리”에는 풍금 소리가 들린다. 발로 폐달을 눌러야만 소리가 나는 풍금처럼. 그리움의 기억을 향하려고 하는 몸짓이 있어야만 다다를 수 있는 깊은 언저리에 있는 그리움의 소리가 들린다. 아픔마저도 그리움이 된 시간의 흐름이 보이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에 대한 진지한 물음. 그리고 여자로 산다는 이유로 짊어지고 가야하는 그 짐에 대한 무거움을 우리는 “풍금이 있던 자리”라는 편지를 통해서 느낄 수 있다. 운명처럼 짐 지워진 여성이라는 굴레는 여성에게 무엇을 남기는가에 대한 물음 속에서 우리는 잠시나마 여성성에 대하여, 사랑이라는 모호하기 그지없는 것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다.

그 생각의 끝은 언제나 비극이다. 여자는 여자이기에 피해를 받는 양상.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세태는 많이 달라진 듯 하다. 그래서 이제는 고통이라는 기억조차도 되씹어볼 만한 그리움의 풍금이 되어 아련히 들리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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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에게 말걸기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199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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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개개인이 타인과 소통을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을 통해서일까? 은희경의 “타인에게 말걸기”를 읽으면서 마지막에 남는 의문이었다. 우리들의 삶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물론 대화를 통한 소통일 것이다.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이야말로 우리 인간이 가진 가장 큰 소통의 수단임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이라는 장치가 있음에도 이 시대는 소통이 단절된 시대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여기 저기서 “소통의 단절”을 외친다.

물론 대화가 사라진 시대이기 때문이라는 말을 늘어놓으려는 것은 아니다. 은희경 또한 소통이 사라진 시대의 한 중심에서 “타인에게 말걸기”라는 소설을 썼다는 것이다. 은희경에게 있어서 말걸기의 행위는 일차적 의미에서의 언어를 통한 말걸기가 아니다. 소설 곳곳에 드러나는 응시하는 검은 눈. 은희경은 눈을 통한 말걸기를 통한 소통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말”이라는 것은 믿을 수 없다. 말이라는 것은 거짓이라는 옷으로 언제든지 장식할 수 있을만큼 영악하다. 그러나 우리들의 검은 눈은 거짓이라는 옷을 입기에는 너무나도 검다. 거짓과는 다소 거리가 먼 우리들의 검은 눈을 통한 대화의 통로를 은희경은 찾아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관계를 이끌어 가는 “말”에 지쳤을 때는 서로의 눈을 지긋이 바라다 볼 일이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그 진실에 충실해지는 것이 우리들에게 필요한 대화의 통로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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