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빌라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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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빌라』는 내용을 잘 모르고 표지에 반해버렸다. 주변에 나 같은 독자가 제법 있었던 거로 기억한다. 아름다운 표지는 인상주의 화가 알프레드 시슬레의 <Windy Afternoon in May> 다. 표지가 말을 건다. 여름이 무르익은 나무 아래 한 여인과 소녀를 따라 이야기의 한 가운데로 들어가 보라고.

소설집 『여름의 빌라』는 동명의 단편을 포함해 모두 7편의 단편을 묶었다. 읽다 보면 인생의 어느 때쯤 겪었음 직한 상처와 불화를 떠올리게 된다. 갈등 지점으로부터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야 이해나 공감, 비슷한 것이라도 가능하다는 걸 소설 속 인물들은 보여준다. 분명 내가 피해자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가해자였던 경험, 아니면 그 반대였던 상황, 살다가 겪게 되는 이런 관계의 모순을 『시간의 궤적』은 이야기한다. 프랑스라는 낯선 땅에서 만난 유학생인 나와 주재원인 언니, 둘도 없는 단짝이었지만 헤어지며 나는 언니에게 독설을 뱉고 만다. 당시에는 알 수 없었던 죄책감이 뒤늦게 밀려든다. 결혼 생활이 녹록지 않은 데다 언니의 귀국으로 홀로 남게 될 두려움에 나는 언니에게 가장 아픈 말을 하고, 결국 소중한 인연을 놓치게 된다. 이렇게 멀어진 후 되돌아가지 못하는 인연이 소설집 곳곳에 수두룩하다. 『폭설』에서는 아빠의 회사 동료인 미국인과 사랑에 빠져 이혼 후 미국으로 떠난 엄마와 엄마를 이해할 수 없어 괴로운 딸이 그려진다. 어릴 때는 미국에 가서 엄마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하지만 사춘기를 겪으며 자식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는 엄마에 대한 원망으로 더는 미국에 가지 않는다. 서른 무렵 연인과 헤어지고 직장에서 계약 해지를 당하는 등 불행이 겹쳤을 때 마지막으로 엄마를 찾아간 딸, 모녀는 옐로스톤공원으로 여행을 갔다가 갑자기 내린 폭설에 갇히고 만다. 『폭설』의 마지막 대목은 이렇다.

“그래서 이제는 엄마를 이해할 수 있게 됐어?”....“그녀는 그것에 대한 답을 말하는 대신 그저, 우리는 침묵 속에서 어둠의 도로를 달릴 뿐이었어, 라고 말했다. 그리고 드문드문 불빛이 켜진 인가가 있는 곳으로 마침내 접어들었을 때, 두껍게 내려앉은 침묵을 깨고 엄마가 이렇게 말했다고도.” “짐승을 한 마리도 치지 않고 빠져나올 수 있었으니 우린 참 운이 좋구나.” 『여름의 빌라』138쪽

때론 이해한다는 말보다 침묵이 더 큰 공감을 주기도 한다. 상대를 영영 이해할 수 없다 해도 괜찮다고 다독인다.

​ 소설이 불가해한 관계만 얘기하는 건 아니다. 한 차원 다른 이해와 소통을 그린 작품 『흑설탕 캔디』는 백수린 작가가 가장 아낀다고 알려지기도 했다. 아내와 사별한 후 프랑스 주재원이 된 아들과 함께 손자 손녀를 돌보기 위해 낯선 땅으로 온 할머니가 말은 통하지 않지만, 피아노를 연주하고 음악을 함께 들으며, 이웃인 프랑스인 할아버지와 사랑하고 소통하는 이야기다. 외국에서 말이 통하지 않는 상태는 『시간의 궤적』과 『폭설』에서도 그려지고 있는데, 이는 단절과 고립을 증폭하는 장치다. 『흑설탕 캔디』가 다른 점은 말을 대신할 훌륭한 소통 방식을 제안한다는 점인데, 그것은 바로 ‘음악’이다. 할머니 난실이 리스트와 슈만의 곡을 연주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브뤼니에 씨가 정성껏 쌓아 올린 각설탕은 할머니의 연주에 대한 선물. 이보다 우아한 노년의 사랑을 본 적이 없다. 대명사 두 개와 동사 한 개로 남은 브뤼니에 씨 이별의 말이 손녀가 상상한 것처럼 ‘사랑해요. Je vous aime’ 이길 독자로 바라게 된다. 손주들을 돌보면서도 자신을 잃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 할머니, 손에 꼭 쥔 흑설탕 캔디가 욕심으로 비치지 않고 아름다운 것은 그녀가 보여준 삶에 임하는 품격 때문이 아닐까 싶다.

『고요한 사건』에서 뜨거운 여름 해지네 옥상에서 주인공이 느낀 우정, 연대감은 안타깝게도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눈 내리는 밤 고양이 사체를 묻어주지도 못하고, 문고리 안에서 보잘것없는 삶을 살게 되리라는 암시를 받으며 비겁하게 구는 것이 주인공의 마지막 모습이다. 그런 날 하필 아름다운 눈이 내린다. 다툼과 살상 대신 해지네 옥상을 기억하라는 듯이. 『여름의 빌라』에서 독일 베를린 크리스마스 시장에서 일어난 테러로 딸을 잃고 이후 알츠하이머 진단까지 받은 베레나의 말도 인상 깊다.

“지난 2016년 12월 (테러가 발생한) 이후 당신은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쉽게 폭력 앞에서 소멸하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했다고요”....“긴 세월의 폭력 탓에 무너져 내린 사원의 잔해 위로 거대한 뿌리를 내린 채 수백 년 동안 자라고 있다는 나무. 그 나무를 보면서 나는 결국 세계를 지속하게 하는 것은 폭력과 증오가 아니라 삶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단다.”『여름의 빌라』 68쪽

대체 삶에 가까운 것이란 뭘까? 골똘히 생각해보니, 해지네 옥상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캄보디아 소년 앞에 섰던 베레나의 손녀 레오니가 소년 사이에 그어진 선을 지우며 새 친구가 생겼다며 망설임 없이 반기는 것. 이런 것들이 주인공을 파멸의 나락에서 구한다. 『폭설』에서 모녀가 함께 듣던 ‘레너드 코헨’의 ‘Bird on the wire’ 중에는 “난 나에게 손 내밀어 주는 모든 이들에게 상처를 줬어”란 가사가 있다. 부드러운 멜로디를 타고 흐르는 아픈 말, 이렇게 아파야 또 인생은 한 걸음 나아가는 거라고 소설은 말한다. ‘완전한 이해와 용서는 불가능하단 걸 받아들여라. 하지만 사랑의 순간을 기억하려 애쓰라.’『여름의 빌라』가 나에게 들려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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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안단테
엘리자베스 토바 베일리 지음, 김병순 옮김 / 돌베개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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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한 위로, 담담한 마음: 일상을 회복하고 싶은 당신에게

 

달팽이 안단테』∣엘리자베스 토바 베일리 지음창비

 

달팽이 안단테’, 책 제목만 봤을 때 걷기또는 마음을 편안하게 녹이는 음악이야기일까 했다. 원제가 ‘THE SOUND OF A WILD SNAIL EATING’이란 걸 알고는 더 헛갈렸다. ‘달팽이가 먹는 소리라니, 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소리다. 아니 사실 달팽이가 먹는 소리를 사람이 들을 수 있는 걸까? 궁금증을 안고 책장을 넘겼다.

 

나는 병이 난 뒤로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돌아서 그야말로 시간 속에 파묻혀 있다고 느꼈다.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한 일은 산처럼 쌓여서 달에 가 닿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 무엇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시간은 그냥 하염없이 나를 질질 끌고 갔다. 너무 시간이 없어서 쩔쩔매는 친구들을 보면 내가 쓸 수 없어서 넘쳐나는 시간을 그들에게 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아무리 바라는 것을 얻었다 한들 건강이 이 모양이 되었으니 그 얼마나 부질없는 짓이었나 하는 생각에 착잡해졌다.” -54

 

건강이 이 모양이라 시간이 차고 넘치게 됐다는 작가 엘리자베스 토바 베일리, 그녀의 사정은 담담하게 들리지만 절망이란 단어를 되뇌지 않을 수 없다. 그녀는 하루아침에 몸을 가누지 못하는 병에 걸렸다. 후천성 미토콘드리아병, 이름부터 생소한 희소병이다. 근육이 약해져 전신 마비와 자율신경계 기능 장애를 동반하는 질환이라고 한다. 작가는 아프기 전엔 하이킹, 요트 타기, 원예 등을 즐겼다. 더없이 활동적인 그녀에게 몸을 쓸 수 없다는 것은 형벌과도 같은데 여기서 반전, 병문안을 온 한 친구가 우연히 숲에서 달팽이한 마리를 데려온다. 그리고 제비꽃 화분에 달팽이를 올려놓는다. 마치 귤 한 봉지나 식빵 한 덩이인 양 무심히 그녀를 찾아온 달팽이, 그런데 그녀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진다. 마법의 달팽이일까? 그건 아니다. 숲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육상 달팽이일 뿐, 다만 작가가 달팽이를 섬세하게 관찰하고 공부하며 새롭게 알아간다. 사랑하면 보이는 것이랄까? 달팽이 관찰기는 자신의 투병기와 함께 때로는 당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유머, 때로는 이보다 쓸쓸할 수 없는 고독을 섞어 이야기를 엮어간다.

 

사람들이 문병을 왔다 가고 나면 심신이 힘들었지만 달팽이는 내게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녀석의 호기심과 우아함은 나를 평화와 은자의 세계로 점점 더 가까이 이끌었다. 녀석이 유리 용기 속 작은 생태계에서 생활하는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57

 

 

달팽이가 속한 복족류 관련 책과 논문 그밖에 참고한 과학 문헌 등 작가가 출처를 밝힌 저작만 60여 종 가까이 된다. 찰스 다윈부터 일본 하이쿠 작가 고바야시 이사, 동화작가 안데르센과 페미니스트 시인 엘리자베스 비숍 등이 남긴 달팽이에 대한 글과 통찰을 읽으면 작가보다 먼저 달팽이의 매력에 빠진 이들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책에 인용하지 않았지만, 글을 쓰며 심장에 꼭꼭 새긴 자료들이 이 밖에도 얼마나 많을지……. 달팽이가 가는 길에 뿌리는 점액과 같이 맑고 담담한 표현을 뱉기까지 작가가 했을 숱한 상념이 책장 사이사이 느껴진다. 이토록 정성 어린 관찰과 기록이 가능했던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녀의 몸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책의 끝 나희덕 시인의 추천하는 말 가운데 세상과 불화하거나 고립된 채 삶의 막다른 지점에서 정신의 놀라운 집중력을 보여준 저작으로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 시몬 베유의 중력과 은총등과 함께 달팽이 안단테를 꼽는다. 이 말에 고개를 여러 번 끄덕이게 된다.

 

달팽이는 먹이가 부족하거나 날씨가 나쁘면 잠자는 미녀처럼 깊은 잠에 빠져든다. 보통의 점액 방식으로 물리치기 어려운 적을 만났을 때 고약한 유독성 화학물질이 함유된 특수 점액을 뿜기도 한다. 놀라운 생존력이다. 한없이 정적으로 보이지만 충분히 역동적인 달팽이를 보며, 작가는 비록 몸을 움직일 수 없지만, 자신의 세계는 넓게 뻗어 나갈 수 있음을 알았던 것 같다. 그런데 이토록 사랑하는 달팽이가 어느 날 갑자기 자취를 감춘 날, 작가는 절망한다.

 

질병은 사람을 고립시킨다. 고립된 사람은 남의 눈에 띄지 않는다. 보이지 않게 되면 자연스럽게 잊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달팽이......우리 달팽이는 내 영혼이 증발하는 것을 막아주었다. 우리 둘은 온전히 하나의 사회를 이루었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 고립감에 빠지지 않게 도와주었다. 달팽이가 사라지자 날이 저무는 것처럼 내게는 더 이상 기댈 희망이 없었다.”-152

 

다행히 사라진 줄 알았던 달팽이는 유리 용기 속 흙에서 발견된다. 그 후 작가의 몸도 아주 조금 나아진다. 계절이 바뀌고 시골집으로 돌아가게 된 작가는 함께하던 달팽이를 그가 본래 살았던 숲으로 돌려보낸다. 20년 투병 생활 가운데 달팽이와 함께한 시간은 1년이었다. 20년 가운데 1년이라니 짧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암수한몸인 달팽이는 무수한 알을 낳고 그 알이 부화해 새끼가 다시 부모만큼 자라는, 세대가 교체되는 놀라운 시간이었다. 매우 특별한 달팽이를 만나 기적처럼 건강을 되찾는 이야기도 아니고, 사랑하는 달팽이를 남기고 세상을 등지는 슬픈 이야기도 아니다. 작가의 근황까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여전히 작가는 아픈 몸으로 하루를 살아내고 있을 것이다. 극적 결론에 이르지 않는 이 이야기가 우리나라를 포함해 프랑스, 중국, 대만 등 세계 10여 개 나라에 번역돼 독자들의 사랑을 받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작은 생명이 주는 단단한 위로를 바탕으로, 일상을 회복할 가능성이 딱히 없음에도 불구하고 조급하지 않은 담담한 마음, 포기나 막연한 희망과는 결이 다른 이 마음을 느꼈기 때문 아닐까 싶다. 코로나 19 가운데 일상의 회복을 바라는 우리가 품어 봄 직한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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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멀었다는 말 - 권여선 소설집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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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희의 <손톱>이 더 곪지 말길 새 살이 돋길,유기농 청양고추 넣은 짬뽕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먹길,괜찮냐고 물어주는 사람을 더 많이 만나게 되길,그런 날이 꼭 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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씩스틴 평화징검돌 8
권윤덕 지음 / 평화를품은책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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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점이 특이하다. M16은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시민을 잔혹하게 진압했던 공수부대원의 무기다. 총의 눈으로 바라본 역사라니
우리 현대사에 대해 모르는 초등 중학년 아들도 <총>이란 소재에 혹해 이야기에 이끌린다. 광주에 대해 아이들에게 무언가 말해주어야할 때 권윤덕 작가의 씩스틴이 있어 고맙고 다행이다. 전두환과 신군부를 여전히 합당하게 처벌하지 못한 지금의 상황이 통탄스럽다. 그 날의 아픔이 길이 되려면 안이한 봉합이나 화해를 말해선 안된다. 국민을 저버린 국가 권력의 말로가 무엇인지 냉정하게 보여줘야한다. 항쟁 과정에서 시민과 민주주의를 끝내 짓밟지 못한 M16의 이야기가
학살자의 비루한 자기 합리화 보다는 적어도 힘있는 이야기가 됐으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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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사은품으로 받았는 데 안경, 스마트폰 뭐든 잘 닦입니다.
권윤덕 작가의 5.18광주 민주화운동을 다룬 그림책 씩스틴
결정적 장면을 담고있어 처음에 무얼 닦아내기 망설여졌어요.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가 과오를 인정하고 철저히 처벌 받아
탁하지 않고 개운한 사회가 되길 바라며 뭐든 쓱싹쓱싹 닦아내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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