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 우리의 민주주의가 한계에 도달한 이유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 박세연 옮김 / 어크로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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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 헌법재판소의 이 주문은 누군가에겐 몇 달을 기다렸던 말이기도 할 테고, 또 누군가에겐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던 말이었을 것이다. 주문에 대한 평가는 다를지라도, 이는 헌법 65조에 근거한 판단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이 사건과 관련된 항목들에 대해 조목조목 위법 여부를 판단했을 때에도, 이들 모두는 헌법에 기초한 판단이었다. 


최근 또 하나의 판결이 있었다. 이번엔 대법원에서 나온 판결이었다. 대법원은 한 달 후에 대통령 선거를 앞 둔 상태에서, 여론조사의 지지율이 가장 높은 후보에 대해 유죄 취지의 파기환송 판결을 내렸다. 이는 해당 후보의 유죄를 암시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만약 6월 3일 선거일 전에 최종심이 열려, 해당 후보에 대해 벌금 100만원 이상의 유죄가 확정하면, 해당 후보는 피선거권을 박탈당한다. 


두 판결은 모두 정치와 관련되어 있지만, 한편으로는 정치적 좌, 우 대립의 한 쪽 입장에서 살펴보면 양립 불가능한 판결로 보일 것이다. 즉 좌, 우 어느 쪽이든, 위 두 판결 중 하나의 판결에 대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면, 다른 판결에 대해서는 분노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정치와 관련된 판결이라는 점 외에, ‘정치와 관련된 사안이지만, 최종 결정은 법이 한다’라는 공통점 있다. 정치적 사안이라 단지 의견 대립으로 결론날 수 있는 사건들에 대해서도, 최종 판단은 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치적 사안에 대해서도 법으로 최종 판단해야만 사람들이 그나마 수긍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것에 대한 법적용’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니 이미 시작된 지 오래였다. 검찰은 지난 대통령 선거의 후보이자 최근까지 당대표였고, 현재 두 번째 대통령 후보가 되어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는 후보에게 약 8개의 형사소송을 걸었다. 이 후보는 지난 대선 후보 선거운동 기간에도 마찬가지고, 이번 선거운동 기간에도 계속 법정에 출두해야 한다. 탄핵 이후 급히 치러지는 선거라 선거운동 기간도 짧은데, 한 달 남짓 선거기간 동안 법정에 최소 5-6번의 출석을 해야 한다. 


이것에 대해, 범법자 라는 오명을 덧씌우려 한다, 엄청난 변호사 비용을 부담하게 해 경제적으로 고통을 가중시키려 한다 등의 의견도 많지만, 중요한 건 유력한 정치인을 괴롭히는 일에 법이 앞장서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행동은 법을 자신의 생각을 관철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법을 칼로서 휘두르는 것이다. 법의 내용과 취지는 온데간데 없고, 단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만 이용하는 것이다. 


실제로 책에서도 독재자가 가장 잘 활용하는 것이 바로 법이다. 페루의 독재자 오르카르는 말한다. “친구에게는 모든 것을, 적에게는 법을”


이밖에도 책에는 민주주의를 무너트리기 위해 법을 활용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나열한다. 헌법을 명시적으로 따르는 척 하지만 실제로는 헌법의 정신을 훼손시키는 것, 법을 과도하거나 부당하게 사용하는 것,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법을 선택적으로 집행하는 것, 자신에게만 유리한 새로운 법을 만드는 것 등. 이미 법은 권력자가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맞춤형 무기가 되었다. 


하지만 12.3계엄 이후에 이 책을 읽으며 느꼈던, 법과 관련해 끊임없이 들던 생각은 이러한 생각이 아니었다. 이보다 내가 더 문제의식을 느꼈던 것은, ‘여기도, 저기도 곳곳이 전부 법이구나’ 라는 생각이었다.


12.3 계엄 이후 대통령이 파면당하기까지 몇 달이 지속됐는데, 이 과정에서의 쟁점은 항상 법이었다. 이러이러한 법적 근거로 파면이 가능하다, 혹은 저러저러한 법적 근거로 파면은 불가능하다, 헌재 재판관들이 8:0이 가능한 법적 근거는 이러이러하다, 그리고 5:3이 불가능한 법적 근거 또한 저러저러하다, 그리고 9명이 판결해야만 하는 법적 근거와 그것이 불가능한 법적 근거 등 모든 것은 다음 아닌, 법과 관련돼 있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어려운 법 용어에 조금은 익숙해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몇몇 단어들은 어렵게 느껴졌다. 법조문에 대해 이렇게 자세히 알아야 되나 싶기도 했고, 그래서인지 법조문이 일반 사람들도 조금 이해하기 쉽게 쓰여져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법을 활용해서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모습을 볼 때 마찬가지로 느꼈던 감정은, 법만으로는 해당 문제를 100% 해결할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이 과정에서 알게 된 법 문구들이 충분히 자의적으로 해석 가능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즉시 임명한다’라는 표현도, 사안을 어떤 방향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이 ‘즉시’를 어느 정도의 기간으로 볼지가 매우 달라졌다. 어떤 이는 이를 1시간 이내로 볼 수도 있고, 또 어떤 이는 이를 1개월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해석에서는 ‘통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의미’라는 것도 무색했다. 이 ‘통상적으로’를 또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는 언어의 단절성과 관련이 있다. 이는 우리의 모든 행동을 언어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우리의 행동은 연속적인 반면 언어는 단절적이기 때문에, 우리의 행동을 언어로 제약하려고 하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실제로 책에서도 인종을 기준으로 투표권을 차별하는 것은 불법이지만, 흑인이 투표를 못하게 막고 싶을 때에는 인종이 아니라, ‘글을 읽는 정도’ 혹은 ‘할아버지가 투표를 한 기록 여부’에 따라 투표권 차별이 충분히 가능했다. 


즉 인간의 행동을 막는 것은 법의 문구로는 절대 불가능하다. 그러기에 법 문구는 너무나도 자의적으로 해석이 가능하고, 또 조금만 표현을 바꾸기만 하면 충분히 같은 내용을 적용하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이 모든 법의 문제들보다 우선하는, 모든 사안에 대한 최종 판단을 법에만 의존하는 것의 가장 큰 문제는 이것이다. 바로, 해당 사안에 대한 시민의 판단이 소외된다는 것이다. 해당 법의 판결이 내 상식을 벗어난다는 느낌을 받는 것도 문제지만, 내가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도 전에, 모든 문제의 해결이 법으로 수렴됨으로서, 시민들이 사건에 대한 자신의 판단이 무용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이는 민주주의 제도 내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자신들과 관련된 문제에 대한 판단의 주체가 자신이 아니라, 법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는 느낌이다. 사안에 대한 내 의견과 내 판단은 소용이 없고, 법을 아느냐 모르느냐, 법 적용이 가능하냐, 가능하다면 어떤 법의 적용이 가능하냐, 이것만이 문제였다. 그곳에 시민의 판단이 설 곳은 없었다. 


그런데 왜 이럴 수밖에 없었을까를 생각해보면, 우리 사회에는 의견 대립이 있을 때 법 외에 활용할 만한 다른 뾰족한 수단이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토론이 자유롭게 이루어지지도 않으니, 토론 방법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토론을 할 만한 컨텐츠 자체가 없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인 것 같았다. 때문에 법 이외에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나 도구가 없었다. 이는 사회 전체의 문제 해결 역량이 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를 해결 할 수단이 빈곤한 것, 다양한 수단을 확보 할 철학도 부족한 것이 문제였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결국 시민 각자의 역량을 키우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법 이외에도 시민들의 목소리가 전달될 수 있도록 힘을 키우는 수밖에 없다. 앞으로도 있을, 법이 모든 사안을 다 끌고 들어가는 법의 블랙홀 속에서도, 이에 무너지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분명히 표출하기 위해서는, 시민 스스로가 힘을 키우는 수밖에 없다. 


진부한 해결책이지만, 해결책이 그만큼 진부하다는 건, 오랫동안 꽤 괜찮은 해결책이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시민들 개개인의 역량을 키우는 것, 그것이 우리가 나아갈 방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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