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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로운 삶
헬렌 니어링 외 지음, 류시화 옮김 / 보리 / 200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무엇보다도 전 이들이 신념을 갖고 살았다는 것이 참 아름답게 느껴졌어요.
사실 생각해 보면 그래요. 개인의 의견과 행동방식이 가장 잘 보장되고 존중받는다고 하는 21기 자유민주주의, 포스트모던 사회라고들 하죠. 그렇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획일성의 쳇바퀴 안에 갇혀 사는 것 같아요. 자유민주주의는 누구나 생각과 의사 결정과 행동의 자유를 개인의 의지에 따라 구가할 수 있는 사회이고, 더군다나 20세기 중반 이후 떠오른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이 갖고 있던 발전모델의 획일성을 뛰어넘은 새로운 형태의 조류라고들 말하잖아요. 그렇지만 한번 잘 살펴보세요. 이름은 정말 거창해요. 그렇지만 이 거창한 사회학적 용어 뒤에서 여전히 기고만장한 활력을 자랑하며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획일성을 늘 확인하며 살고 있지요. 어느 세대보다도 자유로운 생각의 소유자라고 하는 청소년들, 젊은 사람들을 한번 보세요. 안 그런 사람도 많이 있다는 걸 부인할 수 없겠죠. 그렇지만 정말 많은 다수의 사람들... 완전히 노예잖아요. 상업주들한테, 광고주들한테, TV제작자들한테 길들여진 노예. 광고가 만들어내는 이미지와 전력에 따라 모두가 겉멋에 길들여진 노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들 노예가 돼 있는 거죠. 그 잔혹한 '왕따'현상이 왜 생기나요? 왕따는 완전히 사형선고잖아요. 왕따를 지배하는 사상은 '잰 우리와 달라!'라는 획일주의의 산물일 뿐이거든요. 그 외에도 많죠. 그렇지 않은 예를 드는 게 더 힘들죠.
어른들이라고 다를 게 있나요. 과거로부터 아름다운 긍지를 가지고 지켜왔던, 일반적인 선(善)한 공동체 윤리는 좋은 것들이죠. 비록 좀 획일적인 요소가 있기는 하지만요. 그렇지만 이런 것들은 점점 거의 보기 힘들 정도로 사라져 가죠. 오히려 안락(安樂)이니 화려함, 이기(利器)니 하는 명분에 길들여져서 둔감해져버린 사치와 자만, 쾌락의 정신이 획일적으로 이 시대를 지배한다는 거예요. 결국 이러한 '오직 몸을 위한' 가치들이 환경도, 정신도, 판단도, 진실도, 인간성도, 왜곡시키고 파괴한다는 겁니다.
너무나도 길들여져 있기에 점차적으로 갈아 먹힘을 당하는 고통의 감각마저 상실당한 현대인의 전형 말이죠....상실의 시대.....부끄럽지만 저 역시 다를 것이 없어요..
다행스러운 것은 이곳 저곳에서 자그맣지만 잦은 외침들이 울려난다는 겁니다. 이미 서구에서는 대전(大戰) 이래로 계속되는 목소리들이지만, 우리는 이제야 그 목소리를 조금씩 듣고 있어요. 그나마 너무 작아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어렴풋함이 들리다가는 곧 물러가고야 마는 작은 소리일 뿐이예요. 미국에서 1954년에 나온 책이 한국에서 2001년이 돼서 나왔잖아요. 세기 수로는 벌써 한 세기가 지났지요.
물론 우리 기성 세대들에게 이 문제를 탓할 순 없다고 생각해요. 먹고 사는 문제도 이제 겨우 해결한 우리에게, - 사실은 이마저도 아닐 수 있고요 - 끝을 모르고 달려온 우리의 개발 시대의 기성 세대분들에게 ''당신들의 수고는 왜곡된 현실만을 남겨주었을 뿐이오''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기도 하고 사실은 정당하지도 않아요. 늘 그렇듯이 반성과 후회는 지나간 이후에야 오는 법이니까요. 오히려 우리는 특권을 누린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누릴 것을 다 누린 서구 사람들이 그 문명의 끝간데서 잘못을 반성하며 돌아서는 것을 보니까요. 브레이크 밝는 모습을 보여 주잖아요.
물론 제가 스코트와 헬렌의 시도가 가장 합리적인 것이라고도, 올바르고, 확실한 방법이라고는 생각하는 것은 아니예요. 좁은 땅 대한민국에서 행하기에는 무리한 부분이 있지요. 또 그 사람들이 했던 그 선택은 어쩌면 그 자신들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함 부분도 있으니까요. 헬렌도 그렇게 인정하잖아요. '나' 자신만이 아닌 '나를 포함한' 인류의 유익을 위해 실질적으로 공헌하는 효과적이고 온전한 것이었다고 결론 내리기에는 아쉬운 점이 많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