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적 이 작가의 “김약국의 딸들”을 읽은 적이 있다. 젊고 사기 충만할 때라 페미니즘도 아닌데 억지 페미니즘 소설이랍시고 쓴 것 같아 읽고 나서 매우 불쾌했다. 그 기억 때문에 토지는 읽고 싶지 않았는지 모른다.


크레마를 사면 일주일에 천 원 쿠폰을 주던 시절, 쿠폰을 안 쓰긴 아깝고, 딱히 사고 싶은 책은 없을 때 그래도 언젠가 읽을 마음이 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토지를 한 권씩 사 모았다. 그러고도 오랫동안 읽고 싶은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북 책장을 뒤적이며 뭘 읽을까 할 때 전에는 투명책 취급했던 “토지”가 눈에 들어왔다. 공부를 위한 책은 한동안 보고 싶지 않았고, 지금 매우 취약한 정서상 권여선의 단편은 무리였고, 아주 유명해져버린 한강은 왠지 내 것을 뺏긴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보고 싶지 않았고... 뭐 그렇고 그런 이유들이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토지. 그래, 뭐라는지 들어나 보지 뭐.


다음 내용이 궁금해 빨리 읽어버리고 싶은 마음과 이 책 읽는 시간을 한없이 늘리고 싶다는 마음이 동시에 드는, 참 신기하고 이상한 책이었다. 이걸 이제야 읽다니 하는 마음과 죽기 전에 읽어서 다행이란 생각도. 어떻게 그 많은 등장인물 하나하나에 각기 다른 캐릭터를 입히고 그걸 살려냈는지, 어떻게 저런 문장들을 썼는지, 내가 소설가였다면 내가 여기서 더 할 수 있는 건 없다고 몹시 좌절했을 것만 같다. 단편소설을 편애하는 내가 대하소설을 읽고 이런 마음이 들 줄이야. 심지어 @@이 ##에게 안겨 죽을 때는 잉잉 울기도 했는데, 하필 수도권에서 서울로 오는 긴~ 전철 안이어서 내릴 때 바닥만 보고 걷기도; (나중에 ##이 죽었을 때는 다행히(?) 집에서 울었다.)


그러나 아마 이 책을 20년 전에 읽었으면 정말 짜증 나는 책이라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책은 확실히 맞는 때, 읽어야 할 때가 있다. 그 시기가 서로 어긋나지 않아 다행이다. 한데 그렇담 예전에 진저리 치면서 읽었던 (그러면서도 마지막까지 꾸역꾸역 읽고야 말았던) “혼불”도 지금 읽으면 다른 생각이 들까? 문득 궁금해진다. 아니다, “김약국의 딸들”을 다시 읽어보아야겠다.


아 그러나 혹시 이북으로 토지를 사려는 분이 있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라. 중간 중간 문장이 끊기고 문장 하나가 띄어쓰기 없이 사이좋게 붙어 있는 화면이 부.지.기.수.다. 출판사 직원 여러분, 제발 수정 좀 해 주세요. 필요 시 인쇄본 대조 및 교정 무급봉사 용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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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넘게 약을 먹었어도 일희일비하는 성향은 고쳐지지 않았고, 마음이 잔잔해지지도 않았다. 잔잔해지지 않은 게 아니라 저 밑에 가라앉은 채로 잔잔했다는 게 더 맞겠다. 하루는 의사에게 물었다. 남들의 간증(?)에 따르면 약을 먹으면 화도 나지 않고 마음이 평온해진다던데 그게 사실인가요? 의사는 그렇다고 했다. 저는 아니던데요. 화가 나는 상황에서는 별 거 아니어도 똑같이 화가 나던데요? 그는 약의 효과가 나타나는 데는 최소 2주 이상이 걸리니 약을 더 꾸준히 먹어보자고 했다.


그러나 맞는 약이 없어 내 처방전은 2주마다 바뀌었다. 일전에는 끊임없이 새로운 약 조합이 있다는 게 놀라워 의사에게 “와우, 약의 세계란 정말 무궁무진하군요!”라고 했더니 그는 “아니요, 이제 얼마 안 남았어요. 지금이 플랜 E, F 정도 됩니다”라고 했다. 나는 끝이 궁금했지만 결국 플랜 Z를 보지도, 마음이 평온해지는 경지에도 이르지 못했다.


새 주치의는 첫 진료 때 ‘완벽한 사람’의 근황을 물었다. 다른 사람 탓을 하고 다닌다는데요? 그러자 의사는 마치 그를 보듯 나를 흘겨보았다. 뭐 그런 나쁜 사람이 있냐며. 외과의 대하듯, 내 증상이나 잘 파악하고 처치나 해주쇼, 딱 이만큼의 기대치를 갖고 병원에 갔던 나는 적이 당황했다. 아니 공감과 지지는 상담사한테나 가야 얻는 것 아니었어? 의사가 이렇게 막 환자 편파적이어도 되는 거야? 그 전 의사가 (예민한 사람이 아니면 눈치채지 못했을) 약간의 콧방귀와 함께 ‘그런 서비스는 제공하지 않습니다’ 했던 장면이 뇌리에 깊이 박힌 것처럼 지금의 의사가 눈을 흘긴 그 순간 역시 깊이 각인되었다. 속 깊은 얘길 하고 싶지 않아 일부러 상담센터가 아닌 정신과에 갔던 건데 이렇게 훅 들어와서 무장해제를 시켜버릴 줄이야.


상담을 끝낸 의사는 이전에 먹던 것과는 조금 다른 조합의 약을 처방했다. 꼴랑 세 알, 아침 약까지 해도 네 알. 약은 서서히 줄여야 하는 게 맞지만 너는 이미 1주일 동안 약을 끊은 상태이니 이참에 그냥 확 줄여보자고 했다. 전보다 약 개수가 줄어든 게 일단 마음에 들었다. 이전에는 1회분의 색색깔 약으로 무지개를 그릴 수도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그게 이제 한 달쯤 되어가나 보다.


그런데 가만 보니 요즘 텔레비전을 보며 웃는 횟수가 늘었다. 예전엔 하나도 재미없었던 예능 장면에서 나도 출연자들처럼 낄낄대고 있다는 데 종종 놀란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놀라웠던 깨달음은 아, 남들은 대개 이런 기분으로 이렇게 살고 있었던 거야...? 이십 평생 삼겹살을 먹지 않다가 군대 휴가 나와서 처음 먹어보고 이 맛있는 걸 지금까지 니들만 먹고 있었던 거냐며 식당 안의 손님들을 흘겨봤다는 성석제의 심정을 알 것 같다. 인생을 반 넘게 살고서야 새로운 세상을 약간 엿본 기분. 이게 약발 때문인지 의사에 대한 신뢰 때문인지 다른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나 역시 그 세계에 속해 있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나도 삼겹살을 한 번 먹어보았다는 걸,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다. 아, 그리고 나는 여전히 화가 날 때는 화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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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년 간 각기 다른 질환으로 여러 차례 전신마취 수술을 받았다. 팔뚝에 나란히 나란히 도열해 있는 주삿바늘 자국들을 보면서 피부에 난 상처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결코 ‘원래 없었던 것처럼’ 돌아가지는 않는다는 걸 상기한다. 마음의 상처도 그렇겠지. 새로운 주치의는 잊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의해 더 이상 휘둘리지 않을 때가 치료를 마치는 날이라 했다.


가장 최근의 수술은 3년 전 가을이었는데,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수술 전날 단골(?) 대학병원에 입원했다. 대개 입원한 날 밤부터 수액이 들어갔던 것 같은데 이번엔 저녁밥도 주고(병원밥을 맛있어하는 신기한 입맛) 주삿바늘도 안 꽂고, 혈압이며 체온을 재러 와 선잠을 깨우는 간호사도 없어서 독방에서 나이롱 환자 같은 하룻밤을 보냈다.


또 잠깐 돌아가자면 (옛날 친구 하나는 언젠가 내 얘기는 반죽이 흘러넘친 붕어빵 같다고 했다. 흘러넘치는 바람에 붕어빵 가장자리에 굳은 과자가 두루뭉술 붙어 있지만 그게 붕어빵이라는 걸 알아볼 수는 있다나) 내 수술은 대개 장기 입원을 요하는 것은 아니어서 나는 입원할 때마다 1인실에 묵는다. (그러면서도 3박 4일 입원비는 4일치가 아니라 3일치를 낸다는 걸 얼마 전에야 알았다. 어쩐지 매번 생각보다 싸더라;) 대학병원 1인실, 그것도 내 단골 병원의 1박 가격은 상당한 금액이지만 그냥 여행 가서 좋은 호텔에 며칠 묵는다고 생각한다. 안 그래도 아픈데 남들과 함께 있으면서 스트레스 받느니 결과적으로는 이게 더 싸게 먹히는 거라고. 정작 여행 다닐 때는 숙소에 돈을 많이 안 쓰는 편이니 어쨌거나 대충 균형은 맞는 거라고 말이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수술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에 ‘잠깐’ 올라탔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왔니? 자, 수술하자! 어, 수술 잘 됐네. 이제 집에 가서 회복해라, 안녕. 땡. 돈을 많이 벌 생각도 자신도 없으니 부디 앞으로 병원에 장기 입원할 일은 없어야 할 텐데.


6시가 좀 넘었나 7시가 넘었나, 이른 아침에 간호사가 드디어 수액을 들고 왔다. 전날과 다른 간호사인 걸 보니 아무튼 아침 교대시간이 지나서였다. 수술과 그 이후 처치를 위한 혈관 확보를 위해서라도 어쨌거나 팔에 줄은 하나 달아야 하는 것이다. 헌혈 바늘보다는 가늘지만 일회용보다는 굵은 주삿바늘이다. 개인병원에서 피를 뽑을 때마다 듣는 얘기가 혈관이 가늘다(=바늘 꽂기 어렵다)는 것이어서 가끔 혈관을 드러내려고 애꿎은 손목을 난타 당하거나 있는 힘껏 주먹을 쥐어야 하는데, 그러고도 여러 번 찔리는 일이 종종 발생하는데 종합병원에서는 그런 일이 거의 없다. 혈관에 대한 얘길 아예 안 들어본 건 아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그들은 능숙하게 핏줄을 한 번에 포착해 굵은 바늘을 꽂아 넣는다. 볼 때마다 경이롭다.


그런데 그날 아침의 간호사는 바늘을 잘못 꽂았다. 당황하고 미안해하는 그에게 나도 모르게 말했다. “괜찮아요. 너무 일찍 출근해서 그래요.” 어쩌다 그런 말이 나왔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마음 속 어딘가에 24시간 불이 켜져 있는 nurses station, 우리말로 뭐라는지 모르겠다, 간호사 스테이션? (이게 '우리말'이긴 한가?) 아무튼 그에 대한 각인이 있었던 건지. 같은 직장인으로서 새벽 같이 출근해야 하는 그 젊은이에게 나도 모를 안쓰러움이 있었던 건지.


작정하지 않았던 말에 대한 그의 반응을 아직 기억한다. 찰나의 침묵 후에 그는 말했다. 자신들의 입장을 헤아려 준 환자는 처음이라고. 그 말을 하는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요즘처럼 일찍 일어나는 날에는 가끔 얼굴도 이름도 기억 나지 않는 그 간호사 생각이 난다. 새로 채용된 간호사의 절반은 관둔다는데 그는 아직 거기 있을까. 그리고 내 수술을 집도한 의사들의 이름은 모두 기억하고 있는데, 의사보다 더 자주 만났던 간호사들의 이름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놀라고 부끄러워진다.


코로나 사태가 장기간 지속되면서 간호사들이 더 이상은 못 버티겠다고 눈물로 호소하는 뉴스를 보며 또 그의 생각을 했다. 여간해서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24시간을 지키며 육체노동과 정신노동, 감정노동을 병행하는 사람들. 인터뷰한 간호사는 자신들에게 고맙다고 하지 말고 밖에다 그들의 처우 개선해야 한다, 밥 먹여야 한다 호소해 달라고 했다. 부디 그들에게 정당한 대가와 휴식이 주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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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가 김대중 대통령 기일이었나 보다. 때가 때인지라 많은 정치인들이 그를 기린다며 한마디씩 보탰다. 경제위기 극복에 뭐에 뭐에 뭐에.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그의 최고의 업적은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는데, 그건 바로 우리나라를 실질적인 사형제 폐지 국가로 만든 것이다. 생전에 그의 실물을 딱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퇴임 후 사형제 폐지와 관련한 한 행사에서였다. (그런데 나는 거기 왜 있었던 거지?) 그는 노쇠한 몸을 이끌고 연단에 올라 사형제 폐지를 지지하는 짧은 연설을 하고 내려왔다.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 나지 않지만 마음을 울리는 연설이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비로소 그가 우연히 혹은 망설이다, 또 혹은 국제 사회의 눈이 무서워서 사형을 집행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이 그 자신이 사형수였던 경험 때문이었는지 자신의 종교(천주교) 때문이었는지 다른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모른다.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그는 사형제 폐지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실행에 옮긴 것은 그의 가장 큰 업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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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성격이 조급하고 과격한 데 비해 내 운전 습관은 매우 느긋하고 점잖은 편이다. 실생활에서의 내 성격을 아는 이들이 내 운전 습관을 보고 같은 사람인지 의심할 정도이니 말 다했지. 엄마는 내가 운전하는 차를 타더니 아버지랑 똑닮았다고 했다. (그러니까 아버지도 과격하고 짜증 잘 내는 사람이지만, 사실은 겁 많고 예민한 사람이란 뜻이다;) 운전 경력 30년이 넘었는데도 가끔 남의 집 기둥을 들이받고 다니는 어머니로서는;;; 답답할 만도 하다.


아 아무튼, 차로 변경 타이밍을 놓치면 까짓 좀 돌아가지 뭐 싶고(덕분에 어느 날은 아현동에 가야 할 걸 애먼 여의도를 한 바퀴 돌고 왔다. 다녀본 사람은 알겠지만 공덕에서 여의도까지는 유턴할 수 있는 데가 없다;), 경적도 몇 년에 한 번 울릴까 말까, 여간해선 울리지 않는다. 사실 거리에서 들리는 대부분의 경적 소리는 위험에 대한 경고보다는 화풀이가 더 많은데, 이왕 벌어진 일 화풀이해서 뭘 어쩌랴 싶은 것이다. 가장 최근에 빵빵거렸던 일은 골목으로 들어섰는데 그 앞에서 알짱거리고 있던 비둘기 두어 마리가 당최 움직일 생각을 안 해서 피하라고 콩콩콩 했던 것이다. (그런데 결국 안 비켜줘서 어렵게 피해 갔다 ㅠㅠ)


그런데 사실 내 차는 여유로움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열 살이 다 되어가는 경차다. 20년이 다 되어가는 중고 소형차에서 새차로 바꾸고 나는 한동안 왜 사람들은 모두 이 귀염둥이를 타지 않는 걸까 신기했다. 주차 쉬워, 골목길 다니기 쉬워, 공영주차장과 톨게이트비 할인에, 집에 차가 경차 한 대만 있을 경우 유류세도 지원해 주는데 왜왜왜 다들 경차를 타지 않는 것이지? 그러던 어느 날, 앞에 걸리적거리는 차가 있어 추월해 버릴 생각에 차로를 바꿔 액셀을 부앙 밟다가 알았다. 응? 차가 왜 안 나가? 아...


요즘 같은 때는 오르막을 오를 때 에어컨을 잠시 꺼줘야 하고 (...) 그도 모자라 핸들을 토닥이며 겸둥이 힘 내~! 할 수 있숴어~! 격려해야 하지만, 뒤쪽에 다른 차가 속도를 높이면서 붙으면 눈치껏 냉큼 냉큼 비켜줘야 하지만, 간혹 초보도 아닌데 빵빵대는 소릴 들어야 하지만 희한하게 경차라서, 혹은 여자 운전자라서 무시 당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내 잘못이 아닌데도 나한테 화내는 차들이 없지 않고, 내 앞을 막무가내로 끼어드는 차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는 그 차들을 보면서 내가 경차라, 여자라 무시 당한 게 아니라 그 차 운전자들의 인성이 막돼먹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운전을 어떻게 배웠길래 그따위야, 야~ 그렇게 운전할 거면 길거리에 나오지 말라 말이다, 오늘은 운전하며 마음 수양을 하라는 날인가, 날이 더우니 이상하게 운전하는 자들이 떼로 몰려 나왔나 보군, 어이구 그래 가라 가라 비켜 비켜. 게라웃 오브 마이 라이프, 꿍얼꿍얼.


물론 내가 실수했을 때는 당연히 미안해 하는데, 간혹 내 잘못해 비해 과하다 싶게 화내는 차들을 만날 때도 있다. 그럴 때도 내가 크고 비싼 차를 몰았더라면 저렇게까지 했을까 하는 생각보다는 아 웬만히 해라~ 고정해 고정해~ 하기 일쑤다. 그들은 내가 경차라, 혹은 여자라 얕봤을 수 있지만 그건 그런 왜곡된 가치관을 가진 그들 자신의 문제다.


이런 내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자존감이 높다고 하지만, 나는 간혹 이게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때가 있다. 그러고 보면 타인에 의해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과 내 잘못은 없어, 다 니 탓이야는 한끗 차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걸 가르는 기준은 뭘까.


혹은 이게 지나친 자기합리화의 소산인 걸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는 내가 경차라 무시 당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닐까 하는. 그러니까 음, 전 직원이 채 열 명이 안 됐던 첫 직장에서 나는 사장의 손님이 오면 커피를 타가야 했다. 한데 나는 그게 내가 ‘여직원’이어서가 아니라 ‘회사의 막내’이기 때문이라고 혼자 주문을 걸었다. 몇 달 뒤 남직원들이 새로 들어왔어도 그들은 커피 따위 타지 않았는데, 그 때 나는 ‘내가 커피를 잘 타니까’로 주문을 바꿨던 것 같다. 실제 커피믹스가 지금처럼 대중화되기 전, 나는 소위 다방 커피를 기가 막히게 타는 사람이었다.


운전 하나 가지고 이렇게 오만 가지 생각을 펼치는 나도 참.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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