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서 포도가 왔다. 이 지역 @@ 택배는 하필 우리 동네가 맨 마지막 경로라서 빨라야 저녁 7시, 늦으면 10시 넘어서도 도착하는데 시골에선 그 전에 쓰던 ## 택배보다 더 편한지 요즘은 땡땡 택배를 주로 이용해서 물건을 보내신다. (그 택배는 느으으읒게 온다고 백 번이나 말했는데 그래놓고 왜 6시만 되면 택배 안 갔냐고 전화하는지 모를 일)


아무튼 다른 시골은 모르겠지만 그쪽 시골은 요새 포도농사가 대유행인지 (이 포도 가격 급락은 시간 문제) 비싸기로 소문난 샤인 뭐시기 포도 몇 송이를 보내왔다. 한데 그래도 요즘은 7-8시 정도로 양호했던 도착 시간이 지나도 택배는 올 생각을 안 한다. 마침 빡세게 운동하고 온 날이라 졸음이 쏟아졌지만 9시까지 기다렸다. 실시간 배송위치에 따르면 우리집은 이미 배달을 마쳤어야 하나 남아 있는 택배 물량을 보니 음... 비도 오는데 마음을 접어야겠다.


9시가 좀 넘어 택배 도착 연락을 기다리다 못한 모친이 친히 전화를 했길래 받자마자 “택배 안 왔어~ 잘 거야. 내일 새벽에 확인할게” 하고 냅다 불 다 끄고 침대에 누웠는데 밖에서 누가 벨을 누른다. 다른 택배는 그냥 현관 앞에 놓고 가는데 이 집은 밤 늦게 올 때면 늘 벨을 누르고 간다. *(@&^@$!%!@)*&)_#+()&*^& 여기서 1차 짜증.


어휴, 스티로폼 상자가 무겁기도 하다. (1.5차 짜증) 테이프도 꽁꽁 싸매놨다. (제거하느라 1.8차 짜증) 열어봤더니 파는 것보다 두 배는 커 보이는 밀도 빽빽한 포도가 가득 들어 있다. 그런데 하나 들었더니 포도알이 우수수 떨어진다. 너무 익은 건지 시든 건지, 여섯 송이 중 두 송이가 지들이 봉숭아도 아니면서 손 대면 톡 하고 알알이 떨어져 나갔다. 다른 송이에서도 몇 개씩의 탈락자가 나오면서 포도알만으로 4.8리터 거대한 밀폐용기가 가득 찰 지경이었다. 원래는 포도가 오면 식기세척기로 과일 씻기에 도전해 볼 참이었는데 망했. 알알이 씻어서 통에 넣었다. 2차 짜증.


송이를 유지하고 있는 나머지 포도들은 너무 커서 밀폐용기에 2개씩이 안 들어갔다. 요리조리 넣으려고 꼭지도 좀 잘라보고 위치도 좀 바꿔보고 해서 겨우 한 통에 2송이씩 욱여넣었다. 여기서 포도알들이 또 떨어진 건 덤. 이 과정에서 3차 짜증.


갈무리를 다 하고 보니 열 시다. 아오 잘 시간 또 지났네. 4차 짜증.


그나마 다행인 건 9시 40분에 전화한 부친에게 짜증은 안 냈다는 거다. 그런데 문제는, 요즘엔 짜증이 바로 신체 증상으로 발현된다는 거다. 짜증과 함께 약한 편두통이 올라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왜 몸이 전보다 짜증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지 다음 진료 때 물어봐야겠다. 혹시라도 짜증으로 점철된 이 글을 읽고 짜증 났을 분께는 심심한 위로와 사과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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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는 시간이 점점 늦어지고 있다. 요 몇 달은 심하면 두 시 반에서 세 시 반, 보통은 네 시를 전후해 일어났었는데 최근 1주일은 네 시 반에서 다섯 시를 좀 넘어 일어나고 있다. 잠을 더 잘 수 있게 된 건 좋은데 덕분에 아침 활동 시간이 점점 짧아진다는 건 아쉽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간인데.


눈을 뜨면 뉴스를 켜고 침대에서 목 스트레칭을 하며 주요 뉴스를 듣는다. 세수를 하고 나름 출근복으로 갈아 입고 큰 컵으로 물을 한 잔 마신다. 커피를 한 잔 내려 책방으로 출근, 저작권 만료된 클래식 앨범을 올려주는 고마운 사이트에서 잔뜩 받아놓은 음악을 무한반복 시킨 다음 인터넷 뉴스를 좀 살펴보고 책을 읽거나 자료를 찾거나가 나의 아침 루틴이다. 나를 귀찮게 할 식구가 아무도 없음에도 이 시간을 가장 사랑하는 이유는 사위가 고요해서다. 사방이 캄캄할 때 책상에 작은 스탠드 하나만 켜져 있는 모습도 마음에 든다. 그렇게 낮 12시 정도가 되면 남들의 하루치를 산 셈이라 오후엔 당당히(?) 퇴근해서 논다.


그런데 요즘 갑자기 블로그에 일기를 쓰면서 상당량의 아침 시간이 날아가고 있다. 심지어 오늘은 다섯 시 반에 일어났다! 스트레칭도 못하고 허둥지둥 출근. 일어나는 시간이 늦어지니 워밍업 시간과 글을 줄여야 할 텐데 이런 사소한 일과도 균형을 찾기가 참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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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의 서문에는 내 이름이 나온다. 땡땡 선생이 아니었더라면 이 책은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라고. 여러 편의 국내외 학자들의 발표문을 엮어 낸 그 책을 만들기 위해 나는 저자들에게 일일이 메일을 보내 출판 허락과 수정 의사가 있는지 문의하고, 국내 저자들의 수정 일정을 점검하고 취합했다. 몇몇 학자의 글을 번역했고, 다른 이들의 번역을 검토했으며, 원고가 드디어 완성된 후에는 출판사와 왔다 갔다 하면서 여러 번의 편집과 교정을 거쳤고 (지금 생각해 봐도 ‘쓰나미’를 ‘츠나미’로 모두 바꾸라고 표시해 왔던 처음 편집본은...;;; 업계에서 나름 인지도 있는 출판사였는데...;;;) 나는 한갓지기로 소문 난 그 자리에 있으면서 주말 출근(물론 무급)을 한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왜 내가 가면 일 없다고 소문 난 자리도 갑자기 일이 많아지는지는 평생의 미스터리;) 어느 글도 지적했듯 번역투의 문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지만, 독자들은 누가 어느 글을 번역했는지 전혀 알 수 없지만 (나는 지금도 이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내 이름은 그 서문에서밖에 찾을 수 없지만 이 책은 나의 숨은 자랑이다.


그 책에는 또 다른 뒷이야기가 있는데, 어떤 글 하나는 영한 번역인데도 도저히 한글 문장을 읽을 수가 없었다. 나는 당시 내가 그 글을 읽지 못하는 이유가 그 학문의 심오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들만의 세계가 있을 거라고, 비록 비문투성이에 난해한 용어가 가득했지만 같은 학문을 하는 그들 서로는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그러나 번역자와 같은 학문 전공자였던 기획자는 그 글을 읽어보더니 딱 잘라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아 그래, 누구였더라. 책이 안 읽히면 자신이 모자라다 자책하지 말라고. 그건 순전히 저자/역자가 잘못 쓴 탓이라고 했었는데.


원래 그 글은 책의 맨 앞에 실릴 예정이었으나 기획자는 일단 그 글을 책의 맨 뒤로 옮기고 네가 다시 손을 보라고 했다. 으악, 드릅게 어려운 글인데. 그러나 기획자는 내 상사였으니 별수 없는 노릇. 원본과 대조해 가며 문장을 하나하나 뜯어보기 시작했다. 정작 맘 먹고 대조해 보니 살릴 수 있는 문장이 거의 없어서 여러 날을 재번역에 매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완성된 글을 기획자에게 보냈더니 이내 짧은 답장이 왔다. “@@(그 글의 원저자)을 다시 맨 앞으로!”


그러저러한 과정을 거쳐 책이 나오자 당시 나와 같이 일하던 사람은 “우와, 기획자님이 땡땡 씨 아니었으면 책이 안 나왔을 거라고 쓰셨던데?!”라고 말을 걸었다. 약간의 부러움과 질투가 묻어 있는 걸 모르지 않았으나 “사실이니까요”라고 말해주었다. 그는 나의 대답에 벙찐 표정이 되었지만 저간의 사정을 알았다면 그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서문’에서 시작된 이 에피소드를 떠올리게 된 건 최근 읽기 시작한 어떤 책의 서문 때문이다. 둘의 공통점은 ‘서문’이라는 것밖에 없지만; 아무튼 인트로와 감사를 겸하는 그 글의 마지막 문장은 이러했다. “And also, as always, we thank our spouses, our own life-long strategic alliances, @@ and ##. (그리고 늘 그렇듯 우리는 각자의 배우자, 평생의 전략적 동맹인 @@와 ##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보았던 배우자에 대한 수식 중 가장 정확하고 바람직한(?) 문구가 아닌가 싶다. 배우자, 함께 전략을 짜고 헤쳐나가는, 평생 내 편. 어떤 사람은 결혼해서 좋은 점이 ‘평생 내 편’이 생겼다는 거라던데, 내게도 평생 내 편이 있다. 그들과 다른 점은 우리는 혼인으로 묶이지 않았다는 것뿐. 사람들은 가끔 묻는다. 어떻게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결혼도 하지 않고’ 관계를 이어올 수 있냐고. 그럼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결혼을 하지 않아서’ 그럴 수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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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봐도 내 취향은 아니었던 “카트린 M의 성생활”에서 건진 단 하나의 문장은 “공포는 무지에서 나온다”는 것이었다. (밑줄을 안 그어놔서 몇 페이지인지는 모르겠다. 그걸 찾자고 다시 읽고 싶은 생각은 없다)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들리면 무섭지만 그 소리가 어디서 나는지, 왜 나는지 알게 되면 더는 무섭지 않은 것처럼. 한동안 그 문장을 적어 다이어리 내지 앞에 붙이고 다녔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르지만 사실은) 심약한 내가 세상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했던 이유는 바로 공포를 피하기 위해서였다는 걸, 그는 깨닫게 해 주었다.




지금 같은 가치관이 형성되기 한참 전인 어릴 때부터도 나는 과감하게 어떤 무지(無知)는 죄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몰라서 그랬으니까 다 괜찮다고 했다. 아니, 몰라서 그랬어도 괜찮은 게 있고 괜찮지 않은 게 있다. 탁자 위에 놓인 컵을 못 보고 쳐서 깨뜨렸을 때, 그건 몰라서 그랬으니까 괜찮다. 그러나 타인의 삶에 나쁜 쪽으로 영향을 주는 무지는 괜찮지 않다. 몰라서 하는 차별과 혐오는 위험하고 나쁘다. 당시엔 그것을 가르는 기준에 대해 명쾌하게 설명할 수도, 차별이나 혐오 같은 단어를 쓸 줄도 몰랐지만 몰랐다는 것이 결코 면죄부가 될 수 없다는 것만큼은 분명히 알았다.


요즘 내가 궁금한 건, 해변에서 잠든 듯 엎드려 죽어 있는 쿠르디의 사진을 보고 눈물 흘렸던 사람들과 무려 우리 인구의 0.00007%나 되는(!) 아프가니스탄인들이 한국에 온다고 거리낌 없이 혐오를 표현하는 사람들이 같은 사람일까 하는 것이다. 정부에서 아무리 이들 절반 이상이 쿠르디 같은 ‘아이들’이라고 강변해도 (이걸 재삼 강조하는 속셈이 보여 짠하긴 하다) 그 아이들이 커서 무슬림 청년이 될 것이고, 그들이 다시 아이를 무한정 낳아서(대체 이 근거는 뭐람) 우리나라는 곧 무슬림 천지가 될 거라는 비약에는 헛웃음이 날 지경이다.


지역에 이슬람 사원 하나 들어오는 것에 무슨 십자군 전쟁이라도 벌어진 것마냥 난리가 나지만 (이들은 이스탄불 여행을 가도 블루모스크에도, 아야소피아에도 들르지 않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니 무슬림 천지인 터키 여행 같은 건 평생 하지 않을 거라 믿는다. 당연히 ‘난민으로 골머리 썩고 있는 유럽 나라들’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정작 이슬람은 선교를 하지 않는 종교라는 사실은 모른다. 무슬림들도 싫어하는 극단주의자들을 제외한 절대 다수의 무슬림들은 ‘도를 아시냐’고도 묻지 않고, 길거리에서 확성기로 ‘불신천국 예수지옥’을 외치지도 않으며, ‘오지’에 가서 ‘선교봉사’를 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불신천국 예수지옥’을 보고 개신교는 무조건 다 나쁘다고 하지 않는다. 아니다, 개신교는 국내에서 싸잡아 욕 먹는 경우가 많으니 다른 사례를 보자. 신부가 어린이를 성착취 했다는 뉴스가 가끔 등장하고 교황님이 이에 대한 유감을 표해도 천주교 자체가 문제라고, 천주교인을 다 몰아내자고 하는 사람은 없다.


어느 조직에나 또라이는 있는 것처럼 어느 종교에나 극단주의자는 있다. 미국의 ‘일부’ 극단적 개신교인들은 무슬림을 죽이기도 하고, 임신중지 시술이나 수술을 행한 의사들을 살해하기도 한다. 종교 자체가 비합리적이니 이들의 행위는 합리성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에게 보이는 건, 혹은 우리가 보는 것은 오직 이슬람, 이슬람, 이슬람. 그러면서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종교와 관계없이 타인을 해하고 있다는 사실은 생각지 않으려 한다.


사람들이 이런 무지의 성을 쌓는 데 적극 가담하고 부추긴 것은 단연 정부와 언론이다. 작년 한 해 동안 우리나라에서 난민 인정을 받은 사람은 고작 69명. 신청자 대비 0.43%, 성별로 보면 남성 0.31%, 여성 0.79%이다. 누적 인원으로 봐도 3% 정도에 불과하다. OECD 평균 난민 인정률은 대략 25% 내외, 세계 평균은 30% 정도라고 한다. 한국보다 난민 인정률이 낮은 나라는 우리가 평소 욕하기 좋아하는 일본과 이스라엘뿐이다. 이처럼 21세기 쇄국정책을 적극 시행해 온 법무부는 그 부메랑을 그대로 맞아 어제 도착한 아프가니스탄인들이 ‘난민’이 아니라 ‘특별공로자’, ‘조력자’라는 걸 설득하기 위해 진을 빼고 있다. 평소 이들이 나서서 난민에 대한 인식을 바꾸려는 노력을 조금이라도 했다면, 난민에 대해 보다 열린 자세를 취해왔다면 지금과 같은 고생은 덜 했을 테다. 이에 더해 물리적으로 가깝지 않은 지역에 대한 정보를 자연스럽게 습득하기 어려운 우리나라에서 언론은 극단적인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행태만 즐겨 보도하고, 무슬림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을 재생산해 왔다. 그 와중에 우리도 과거 난민이었다는 사실은 쉽게 잊힌다.


“한국 전쟁의 발발로 600만 명이 넘는 피난민이 포화를 피해 피난길에 올랐다. 이처럼 국경을 넘지는 않았지만 거주지를 탈출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국내 실향민이라 부르는데 유엔난민기구는 이들 또한 난민으로 분류한다. (중략) 유엔은 유엔한국재건단을 설립해 긴급 구호와 원조를 제공했다. 집이 없는 피난민을 위해 집을 지어 주고 공부도 가르쳤다. 이는 유엔이 설립된 뒤 처음으로 실시한 난민 구호 활동이었다. 놀라운 사실은 한국 전쟁 당시 한국을 도왔던 나라 중에는 덴마크, 스웨덴, 이탈리아 같은 유럽 선진국뿐만 아니라 미얀마, 라이베리아, 이라크, 스리랑카, 그리고 현재 내전으로 가장 큰 고통을 겪고 있는 시리아 같은 나라도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 나라는 의료 및 물자 지원을 비롯해 전후 복구에도 힘을 보탰다. 한국 전쟁고아 2명은 시리아에 입양되어 가기도 했다. 불과 60여 년 전 이들 나라에 의지했던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문경란 “우리 곁의 난민” 34-35쪽)


그러나 공포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다. 그래서 내 안의 공포를 물리치기 위해 한 번 따져보기로 했다. 내게 위해를 가할 가능성이 높은 사람은 과연 자국민일까 난민일까. 한국엔 한국 사람이 많으니 한국인 범죄자가 많은 게 당연할 터. 2019년 기준 주민등록 인구 중 한국인은 51,849,861명, 그 해 살인 등 강력범죄부터 교통범죄까지 다~ 합친 한국인 범죄자는 1,549,238명이다. 계산기 두드리기 귀찮은 사람들을 위해 제가 한 번 해 보았습니다. 2.99%다.


외국인 범죄율도 마저 따져보자. 2019년 법무부 통계에 따르면 미등록 외국인 포함 체류외국인은 2,524,656명. 같은 해 범죄자 국적 통계에 의하면 한국 국적이 아닌 범죄자는 36,400명, 1.44%이다. 한국인 범죄율의 절반도 채 안 된다. 그리고 공식적인 통계는 없으나 (“그런 통계 자체가 차별적인 심증을 가지고 진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작성하지 않는다고 한다) ‘난민’의 범죄율은 그보다 더 낮다. 남의 나라에 와서 살게 해 달라고 요청하는 사람이 간도 크게 범죄를 저지르고 다닌다? 뭘 믿고? 왜 때문에?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뿐인가. 한국여성의전화 분석에 의하면 우리나라 여성들은 거의 하루 한 명꼴로 친밀한 관계의 ‘자국’ 남성에게 살해당한다. 여성에게 가장 공포스러운 존재는 ‘난민’이 아니라 내 옆의 파트너일 수 있다. 그렇다면 내가 길에서 마주칠 확률이 높은 건, 내게 위해를 가할 가능성이 높은 존재는 ‘귀신’일까 ‘사람’일까. 당신은 귀신이 무서운가 사람이 무서운가. 나는 사람이 더 무섭다.


“한국 사회는 내부에서 비롯된 공포를 외부의 ‘적’에게 투사하고 있다. 공포는 난민이 몰고 오는 것이 아니다. 공포는 내가 처한 현실의 반영이지 언젠가 맞닥뜨릴 미래에 대한 것이 아니다. (김선혜 외 경계 없는 페미니즘 53쪽)”


지금 ‘난민’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우리 사회 내부의 공포와 차별을 정확히 반영한다. 자국민 범죄자에게 향해야 할 비난과 공포를 타인에게 돌리고 있는 것이다. 결국 난민에 대해 우리가 가진 혐오와 공포는 우리 사회가 (외국인이나 난민 없이도) 안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너 왜 이것도 몰라! 하고 개인을 단죄할 수만은 없는 까닭이다. 그러나 남들에게 휘둘리는 삶을 살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 개개인은 문제의 원인을 분명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마음의 문제를 푸는 것은 그 문제를 직시하는 데서 시작하는 것처럼. 나의 공포는 어디서 비롯되는가, 그것이 혹시 무지에 따른 것은 아닌가.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나는 과연 정말 알고 있는가. 바쁜 세상에 굳이 그런 것까지 파고들 필요는 없다고? 이미 안다고 생각하는 것, 혹은 몰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 그로 인해 불편을 느끼지 않는 것 자체가 내가 ‘다수’라는 의미이다. 상사가 부하직원 눈치를 살피지 않는 것—나 같은 부하직원 제외—과 같은 이치다. 그런 권력을 가진 사람이 대체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나는 아직도 세상 모든 것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내 두려움을 직시하고 그것을 떨치려 고민하고 노력하면서 살고 있다. ‘고민하고 노력하면서 살고 있다’라니, 이렇게 자신 없고 소극적일 수가 없다. 그래도 평생 이 노력을 게을리하지는 않을 것이다. 공포를 물리치기 위해. 나의 무지로 죄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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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살 무렵부터 걸레질과 설거지의 세계에 들어섰음에도 나는 정리와 청소, 설거지를 극단적으로 싫어했다. 특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내 공간’은 말 그대로 난장판. 2인 1실 하숙집에서도 내 구역과 룸메이트의 구역은 확연히 나뉠 정도였으니. 설거지는 한 달에 한 번, 청소는 1년에 한 번 할까 말까, 바닥에는 온갖 책과 무언가의 잔해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고, 발 디딜 틈이 오솔길처럼 나 있었다. 침대엔 누울 자리 빼고는 팔 닿는 곳에 항상 책들이 놓여 있었다. 침대가 없었을 때는 요는 1년에 두어 번 개는 것이었다. 전기와 가스가 분리된 다가구 주택(보일러 하나로 한 층을 모두 데우던 이전 원룸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일명 분리형 원룸에서 살 때 청소에 소질 있던 당시 친구는 고기를 대가로 하루 종일 우리집을 청소해 주고 가기도 했다. 단칸방 청소에 거의 하루가 걸릴 정도였다니, 지금 생각하면 헤아릴 수 없는 수준이다.


엉망진창인 상태 그대로 우리집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그때도 지금도 애인 한 명뿐이다. 나머지(엄마 아부지 포함)는 결코 내가 ‘무장해제’된 공간에 들어설 수 없었다. 착한 애인은 한동안 내가 치우지도 않으면서 집이 너무 어지럽고 더러워졌다고 징징댈 때 한 번씩 청소를 해주었다. 비록 작지만 방이 세 칸이나 되는 집이었는데, 그는 집에서 청소기를 가져와 (우리집엔 그런 거 없었다) 내가 있을 때는 물론, 내가 없는 시간에도 종종 청소를 해주고 갔다. 그 다음 집에서도. 그 다음 다음 집에서도. 당시는 우렁총각이라고 불렀는데 이제 할매 할배가 되어가니 우렁서방으로 기억이 된다.


애인은 늘, 내가 문제가 아니라 집이 문제라고 했다. 집이 안 좋아서 내가 정리를 안 하는 거라고, 그냥 내 집도 아닌데 어지르고 살다 싹 다 버리고 이사해버리라고 부추기곤 했다. (잊을 때마다 한 번씩 등장하는 엔트로피의 법칙;)


정리라는 걸 하는 버릇을 들인 건 그로부터 몇 년 뒤, 사장이랑 대판 싸우고 회사를 때려치운 후 앞날이 불투명한 백수로 온종일 집에만 있을 때였다. 정리와 청소가 너무 싫으니 처음부터 어지르지 말자는 아주 단순하지만 외면하고 싶었던 결론에 드디어 도달한 것이다. 서랍장의 옷을 몽땅 꺼내 차곡차곡 개서 착착착 넣었고, 설거짓거리는 나올 때마다 해치웠다. 다만 바닥과 부엌 타일 청소 같은 건 그때도 거의 안 했는데 정리가 되어 있으니 크게 눈에 띄지는 않았다. 그 집에서 이사 나올 때 전문 임대사업자였던 집주인은 이렇게 집을 깨끗하게 쓴 세입자는 처음이라고 했다.


또 또 시간이 흘러 여러 집을 전전하다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를 왔다. 한 달 27만 원짜리 하숙방에서 시작한 서울살이가 방 세 칸에 화장실이 두 개나 있는, 무려 아파트로까지 넘어온 것이다. 심지어 새거였다! 여전히 나는 바닥 청소는 하지 않지만 하루 한 번 로보킹이 바닥을 쓸어주고 일주일에 한두 번은 에브리봇이 걸레질을 해준다. 그러한즉, 평소 우리집 바닥에 돌아다니는 물건은 이제 없다는 얘기다. 설거지 그릇이 많은 날엔 식기세척기가 나보다 더 깨끗하게 닦아준다. 애인은 우리집 개수대에 설거짓감이 없는 건 처음 본다고 했다. (이건 사실이 아니다, 그 전전전전 집부터 그랬다) 그러면서 그는 말했다. 거 보라고. 내가 집이 문제라고 하지 않았냐고. 그렇다. 우리집엔 이제 타조털 먼지떨이도 있고 (타조에서 쥐어뜯은 게 아니라 걔네가 흘린 털을 주워 만든 거라고 한다. 실제 어떻게 모으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이 타조 뒤를 좇으면서 털을 하나씩 줍는 모습을 상상할 때마다 웃겨 죽겠다) 구석 청소용으로 마련한 예쁜 BLDC 모터 청소기도 있고, 화장실 거울과 수전엔 얼룩 하나 없다. (세면대가 좀 더러워도 수전이 깨끗하면 다 깨끗해 보인다고 믿음) 일주일에 한 번쯤은 화장실 청소라는 것도 하고, 서랍 안이 너저분한 게 싫어서 서랍 정리용품도 하나씩 사서 정리하고는 혼자 즐거워한다. 엊그제는 리모컨이 여러 개 굴러다니는 게 보기 싫어서 연필꽂이를 사다 꽂아 넣었다. 이제 우리집은 누가 아무리 갑자기 와도 문을 열어줄 정도는 된다. 며칠 전 소독하러 오셨던 분은 심지어 “예쁘게 해 놓고 사시네요라고 하고 갔다! 지금은 인연이 끊긴, 옛날에 우리집을 청소해 주러 왔던 이가 와본다면 아마 기절할 정도로 놀랄 것이다.


어제 인덕션 상판을 스크래퍼로 열심히 긁어대면서 애인의 말이 떠올랐다. 정말 집이 문제였던 걸까? 아니다. 이 모든 일은 우렁서방이 이제 나이 들고 힘이 없어 청소를 안 해주기 때문이다...라는 건 농담이고, 새로 읽기 시작한 책 “불안한 마음을 잠재우는 법”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불안장애 환자를 많이 만난다는 정신건강의학과 의사가 쓴 책인데, ‘자존감’이란 건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는 것이다. 자존감이 낮아서 불안해지고, 병원에 오는 게 아니다. 취직이 안 돼서 자존감이 낮아진 사람의 자존감이 높아지는 방법은 취직이 되는 것뿐이다. 그러니까 취직을 위해 “뭐라도 하라”는 게 그의 조언이다. 나는 지금 “뭐라도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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