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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산조각 난 신 - 어느 태평양전쟁 귀환병의 수기
와타나베 기요시 지음, 장성주 옮김 / 글항아리 / 2017년 5월
평점 :
절판
"패배를 껴안고"에 언급되었던 책이다. 저자는 일본해군 수병으로 여러 해전에 참전했다. 타고 있던 전함이 부서지며 죽을 고비도 넘기고 옆의 전우가 내장을 쏟으며 죽어갈 때 직접 지켜보기도 했다. 전쟁동안 그는 열렬한 천황의 추종자였고 황군의 일원으로서 자부심을 느꼈다. 그러나 그가 믿던 세계는 너무도 빠르고 뻔뻔하리만치 그를 버렸다. 이 책은 그가 세상에 버림을 받고 쓴 일기이자 통렬한 자기고백이다.
첫장은 일본이 항복한 후 해군에서 전역조치 당해 고향으로 내려왔을 무렵부터 시작한다. 그는 미국에 항복을 해야했다는 것에 크게 분노한다. 더불어 천황의 안위를 걱정하면서 그가 제국의 원수로써 장엄한 최후와 책임을 질 것임을 믿는다.
하지만 항복문서 조약, 맥아더와 히로히토 천황의 듀엣 사진, 전후 이어지는 황가의 조서 등은 그것과 전혀 먼 곳이었고, 첫번째 신화이자 가장 큰 믿음은 깨진다. 천황에 대한 분노, 실망, 경멸을 품으며 등을 돌린다.
두번째 신화는 일본 사회 전체였다. 고위 관료직들은 어설픈 자살 쇼만 늘어놓고 어제 천황을 위해 몸을 바치라던 마을 유지들은 미국에 덤빈 것은 어리석었다고 말한다. 식량난으로 도시사람과 시골 사람들의 지위가 뒤바뀌고 야마토 타마시 (일본민족의 혼) 으로 대표된 화합의 세상은 사상누각임이 드러났다. 귀환한 군인들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치도 또 하나의 문제였다. 친구들은 보병, 만주 개척대, 카미카제등으로 차출되어 나갔고 시체로 돌아오거나 병에 걸리거나 자포자기가 되어 흥청망청되는 등 원래의 삶을 잃어버린다. 저자 역시 붕 떠버린 신세를 어찌해야할지 몰라 고통받는다. 그러나 제대군인들에 대한 멸시와 조롱만이 남았고, 이전에 전쟁에 참가한 시절은 절망, PTSD, 회한만 남길 뿐이었다.
만약 이대로 끝났다면 평범한 전후 기록으로 끝났을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강화가 끝나기 전까지 일본의 대다수 사람들이 비슷한 처지에 놓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책이 다른 기록들과 차별되는 점이 있다면 자기반성과 성장이 후반에 제시되기 때문일 것이다.
도쿄에 연이 닿는 지인들과 교류하면서 저자는 과연 자신은 일련의 사태에 아무런 잘못이 없는가를 생각해본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리고 전쟁에 대해 다시 돌아보게 하는 저작들 (주로 '빈곤론'같은 마르크스주의 책들이지만 당시 상황을 감안하면)을 통해 동조했던 자신을 다시 생각하고 성찰한다. 이후 도쿄로 떠나는 날, 천황에 편지와 함께 전쟁중 자신이 받았던 피복과 음식 등을 모두 돈으로 갚으며 산산조각난 신을 정리한다.
책이 특별히 잘 썼거나 멋진 문구들이 있지는 않다. 그러나 솔직하게 세태를 고발하고 그 일원이었던 자신을 반성하는 글이기에 소중하다. 단순히 지나간 역사에 대한 배상 치부가 아닌 자기기만의 멈춤이 중요하다. 당대 일본이 하지 못한 것, 지금의 일본이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의 글이 계속해서 남기 바라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