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을 만나는 시간 - 오래된 책에서 오늘을 사는 지혜를 얻다
앨런 제이콥스 지음, 김성환 옮김 / 미래의창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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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께서 들려주시는 옛날이야기를 좋아했다.
섬에 사시는 할머니가 손녀 보러 이따금씩 우리집에 오시는 날에는 할머니와 함께 누워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로 시작하는 전래동화를 자장가처럼 들으며 잠들던 어린 날의 모습이 떠오른다. 주로 권선징악을 소재로 하는 흥부와 놀부나 광개토대왕과 같은 영웅의 이야기들이었다. 내가 그런 이야기들을 좋아했던 이유는 착하거나 의협심이 강한 주인공이 선하고 긍정적인 가치관을 끝까지 고수하면서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역경을 헤치고 성공하는 행복한 결말을 가지는 이야기이기에 나도 착하고 성실한 어린이가 되고 싶은 욕구를 자극했기 때문이다. 내가 살고 있는 시대보다 훨씬 더 가난하고 먹을 것이 없어서 많은 사람이 죽어가던 그런 시대, 폭력이 당연하고 지배자에 의해 백성들은 통제되는 무서운 시대의 살면서도 따뜻하고 아름다운 가치관을 지키며 살던 옛 사람들의 활약은 어린 내게 너무나 매력적이고 닮고 싶었다. 비록 현대적 가치관에서는 고리타분한 이야기일지라도 분명 시대를 막론한 가치가 있다.
그것이 이 시대의 우리가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물론 고전을 읽는 일이 앨런 제이콥스의 말처럼 ‘인격의 밀도’를 올리는 일이겠지만, 솔직히 내게 고전은 너무 어렵다.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다. 막상 완독에 성공했을 때는 남들은 모르는 엄청난 것을 혼자 발견한 것 마냥 신나지만, 완독의 과정은 고통스럽다. 지난가을, 고전독서 모임을 통해 오뒷세우스에 도전했었다. 아직 완독하지 못해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을 즈음 고전을 읽어야 하는 가치에 대해 납득할 수밖에 없는 설득을 펼치는 앨런 제이콥스의 저서, <고전을 만나는 시간>을 만났다. <고전을 만나는 시간>을 읽으며, 내가 오뒛세우스를 읽으며 피곤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그러나 계속 읽어나가야 하는 두 이유를 모두 찾게 되었다.

앨런은 저서를 통해 ‘과거는 심하게 잘못되었고, 진부하며, 사람들이 극복한 끔찍한 생각들로 가득 차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인 사람의 고정관념에 강력한 펀치를 날리는 사이다 발언들을 서슴없이 이어나간다. 어느 순간부터 이 사회는 옛 가치는 무조건 나쁜 것이고, 현대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것은 무조건 좋은 것처럼 인식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저자는 정보 과부하와 사회적 가속화로 인해 눈앞의 문제 해결에만 급급한 ‘정보 트리아쥬’ 세상에 갇혀있다고 꼬집는다. 트리아쥬는 전쟁터에서 의료진들이 부상자를 분류하는 작업을 의미한다. 인터넷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문화 비평가 매슈 크로퍼드가 말한 ‘주의력 공공재’가 거의 지켜지지 못하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눈앞의 문제에 대해 어떤 역사적 앞뒤 맥락을 생각하기보다는 지나치게 현재의 관점으로만 보는 경향이 상당하다. 책에 나오는 래퍼티의 글처럼 한 시대 앞서 오늘날을 바라볼 수 있는 그러한 옛글도 있다.

p38 “이 책에서는 과거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인격의 밀도’가 높아진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한다.”

‘인격의 밀도’라는 작가의 표현이 참 와닿는다. 몬다우겐이 말한 “사람들의 삶이 과거와 미래를 더 많이 포괄할 때, 인간의 대역폭은 더 두터워지고 인격 역시 더 견고해진다. 하지만 인간의 감각이 현재에 더 맞춰질수록 그만큼 더 보잘것없어진다”라는 문장을 인용해 그 의미를 더욱 확고히 한다.

물론 지금의 관점에서 의문이 드는 내용들도 있다.

p88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 불리는 조지 워싱턴과 토머스 제퍼슨은 그들이 미국 독립 선언서에서, 그리고 훗날 헌법에서 제시한 이념들이 노예 제도와 절대 양립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야 했다.

최근 남편과 체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우리가 성장하던 시기에는 부모나 교사에 의한 체벌은 일명 ‘사랑의 매’로 불리는 훈육 수단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잘못된 훈육방식이고 어떤 식으로든 무력은 폭력이며 아동학대로 간주 된다. 우리가 자랄 때 부모님이나 선생님께 회초리를 맞는 일은 내 행동이 잘못되었을 때 당연한 일이었고 어떤 의문도 품지 못했다(물론 비인격적으로 무분별하게 분풀이하듯 아이를 때리는 어른은 제외). 그러나 지금 우리가 훈육할 상황이 온다면, 어떤 경우에도 체벌은 하지 않을 것이다. 같은 일에 대해 불과 2~30년 사이에도 가치관과 시각이 달라진다. 즉, 어떤 역사적 문서가 작성되던 그 시기에는 그 때의 핵심 이념들이 결코 당연시 되지 않았기에 그들이 살던 시대에서는 종전보다 한 걸음 진보한 것이었고 그 자체도 파격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고전을 읽을 때 이러한 점들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그 안에 담겨있는 현재에도 유의미한 가치들을 놓칠 수밖에 없다.

p54 “이 책에서 만나는 죽은 이들(철학, 예술가, 사상가들)에게 필요한 것은 산 사람의 피, 즉 우리의 관심이다. 그러니 제발 관심의 피를 너무 아끼려고만 하지 말고, 그들에게 발언권을 줄 수 있는 우리의 권한을 마음껏 사용하자. 만일 그들이 충격을 주거나 비위를 거스른다면 우리는 언제든 그들에 관한 관심을 거두고 그들을 침묵하게 할 수 있다.”

내가 고전을 읽을 때 가지게 되는 마음은 ‘지금 내가 고민하고 있는 것들을 옛 사람들은 어떻게 접근했을까?’이다. 따라서 건강하게 과거와 관계 맺는 법 쳅터는 내게 의미있는 대목이 많았다. ‘현대 독자를 위한 고대의 지혜’라는 <아날로그 아르고스> 시리즈를 출간한 프린스턴 대학 출판부의 경우나 마시모 피글리우치의 <그리고 나는 스토아주의자가 되었다:성격 급한 뉴요커, 고대 철학의 지혜를 만나다>와 같은 책을 예전 같았으면 아무 생각 없이 서고에서 집어 들고 그 내용을 그대로 흡수했을 것이다. 스토아주의에 대한 현대적 논쟁의 여지를 간과하고서 말이다. 비록 그 시대의 행위들이 현대적 관점에서 비도덕적인 면이 있더라도 그 이면의 가치와 그 당시 시대상을 분석하는 힘이 필요하다. 물론 작가의 말처럼 현대와 차별해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지금과 똑같이 나쁜 건 나쁘다고, 좋은 건 좋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다만, 모순점이 있지만, 어떠한 맥락에서 그러한 주장이나 메시지가 완성되었고, 지금 이 시대에도 이어지는 가치가 무엇인지 보는 눈을 기르는 과정이 작가가 말하는 ‘인격의 밀도’를 높이는 시간이 아닐까 한다.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에서 주목받지 못한 ‘라비니아’라는 인물이 어슐러 르 권의 <라비니아>와 19세기의 걸작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를 뒤집어 20세기 걸작으로 재창조한 진 리스의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를 예로 들어 위대한 작품들은 또 다른 위대한 작품을 쓰는데 동기부여가 된다는 것 또한 느낄 수 있었다. 앞으로도 고전을 열심히 읽으며 새롭게 조명해보고 싶은 인물을 찾아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 될 것 같다. 이번 독서는 오래된 책에서 오늘을 사는 지혜를 얻는 방법론을 모색해본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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