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는 내가 책임질 수 있고 책임져야 하는 경계를뚜렷하게 알려준다. 내가 이끌고 다녀야 하는 무게를 정확하게 각인시킨다. 코어 근육이 얼마나 단단해져 있는지, 허벅지와 엉덩이 근육의 상태는 어떤지를 확실하게알려준다. 그리고 내가 발을 들어서 옮기지 않으면, 그리고 내가 계속 뛰기로 결정하지 않으면 결코 계속 뛸 수 없다는 사실도 알려준다. 나는 지금 당장 멈출 수도 있지만계속 뛸 수도 있다. 심장이 뛰고 숨이 차서 돌아버릴 것 같을 때 오로지 나만이 느리게 뛸지 걸을지 멈출지 결정할수 있다. 얼마나 남았는지 생각하며 속도를 조절하는 것역시. 매번 나를 새롭게 알아가고 동네의 풍경을 알아간다. 내가 나를 들고 뛰기. 왠지 계속할 수밖에 없는 것. - P251
그 무엇보다도 신애에게 가장 크게 배운 게 있다면 그것은 삶을 대하는 태도다. 내 앞에 정면으로 닥쳐오는 고난에 맞서기. 여러 선택지 중에서 빠르게 몇 개를 추려내기 언제든 용기를 가지고 무언가를 해내기. "진짜 싫은데일단 해봐야지 뭐 어떡할 거야." 정도로 요약할 수 있는태도는 거의 모두 신애에게서 배웠다. - P215
그래서 콩쿨은 어떻게 되었느냐고? 상을 받긴 받았지만 여러 사정으로 곧 피아노와는 작별을 고했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무의미했던 준비의 시간은 아주 사소한 순간까지도 지금의 내가 되어 있다. 글을 쓰는 이 순간까지도, 하나의 글감이 되어. - P49
꼭 예술로 뭔가를 얻어야 하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런경험 하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반론은타당하다. 우리는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 그러나 먹고사는이상의 삶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그렇다고 답하는 사람만 남아 있는 세계에서 살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가. 시간을 견디는 경험이란 삶의 모든순간을 받아들이고 의미 없는 삶에 의미를 부여해보려는노력이며, 흘러가는 감정에 집중하고 타인의 경험에 귀를기울이는 시도다. 그 모든 시도와 노력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데에 기여한다고 나는 믿는다. 인간은 다른 인간과 상호작용하는 속에서만 자신의 몸 밖으로 나가볼 수있다. 누구든지 태어나서 해볼 수 있는 경험보다 해보지못하는 경험이 까마득하게 많기에 우리는 함께 있을 때만서로를 보완할 수 있다. 그래서 함께 시간을 견디는 사람들, 혹은 예술만이 서로의 연장이 된다. - P51
책 300페이지를 읽는 일. 40분짜리 피아노 협주곡을 듣는 일. 두 시간짜리 영화를 보는 일. 미술관 내부를 아주천천히 걷는 일. 그러는 동안 나의 편견과 아집을 내려놓고 마음을 활짝 열어두는 일. 그럴 때 왠지 인류의 일원이되었다고 느낀다. 표현하고 경청해온 사람들의 커뮤니티에 한 발짝씩 다가선다고 느낀다. 이 바쁜 세상에서 시간을 견디는 인내심이란 진화에 불리한 성정일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그 인내심이 없다면 내가 꿈꾸는 다정한 사람들의 세계는 그 꿈의 흔적조차 파르르하게 사라질까 두렵다. - P52
‘고향 없는 인간‘, ‘책의 말들』의 에필로그에도 썼듯 나는 땅에 발붙이지 않은 모든 이를 스승으로 섬긴다. 고향이 없기에 미련을 가지지 않는다. 지금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 우리가 처한 세계를 뒤집어보는 사람, 그래서 오로지 인간과 지구에게 더 나은 세상이 어떤모습일지를 궁구하는 사람들의 뒤를 한 걸음 뒤에서 따를수 있다면 나의 삶은 그것으로 족하다. 그러므로 지금 이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라고 말하는 책보다 나를멀리 데려가는 책을 원한다. 내가 아닌 사람, 여기가 아닌곳, 지금이 아닌 때로 나를 데려가주기를 그래서 나의 오래된 시야도 생각도 감각도 재편해주기를 만나본 적 없는 사람과 겪어본 적 없는 일을 하게 허락해주기를. 이곳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해주기를. - P76
왜 살아가는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근본적인 질문이 불쑥 솟아오르면 그는 적당한 답을 던져줄 때까지 드러나기를 멈추지 않는다. 세상은 갑자기 다른 모습으로현현한다. 제어할 수 없는 거대한 세상의 혼돈과 나의 무력함. 지금껏 어디에 숨어 있다가 이제 나타났을까? 나는계속 살고 있었는데? 그런 감각은 마치 매직아이를 보듯불현듯 떠오른다. 그동안 늘 그 자리에 있었는데 보지 않았던 것처럼. 또렷하게 볼 힘조차 없어지고서야 내 눈에보이는 것처럼. -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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