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4 : 서울.경기도 - 숨겨진 우리 땅의 아름다움을 찾아서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4
신정일 지음 / 다음생각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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큼직하고 두꺼운 400여 쪽에 깨알같은 글씨로 사진과 사연을 버무린 인문지리역사문화서의 백미! 사단법인 <우리땅걷기>대표 신정일님의 ‘새로쓰는 택리지’를 한마디로 표현하고 싶은 말이다. 서울경기도편은 9권의 시리즈 중 4번 째 권이다. 숨겨진 우리 땅의 아름다움을 찾아서 저자는 직접 발로 30년간 온 산하를 뒤지고 다녔다. 400개의 산을 다녔고 10대 강을 걷고 있다. 독서량도 엄청나 40년간 읽은 책이 만 권이라 하니 이 책 택리지의 꼼꼼한 내용들은 모두 그의 발과 독서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그만큼 현실감있고 정확하며 아름답고 자료가 풍부하다. 과연 정도전에 쫓겨 전국을 유랑하던 옛사람, 이중환의 택리지가 유명한들 이보다 나을까?


서울의 한강 물길을 따라가며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특별한 역사가 서려있는 장소를 고문헌에 소개된 글과 사진을 섞어 설명한다. 서울 성곽길을 기행하고 서울 도심에서 근대화의 유적지를 산책한다.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없어지는 찰나, 저자는 자연스레 독자를 경기도로 이끈다. 산맥의 흐름과 사통팔달의 도시들, 남한강과 임진강, 삼팔접경의 도시들 이야기에 매료된다. 역사를 다루니 역사서요, 사진을 보여주니 사진첩이요, 문헌을 소개하니 인문서요, 여행의 기록이니 기행문이다. 죽도록 이 땅을 사랑한 이의 순수한 영혼을, 책을 손에 쥔 순간 바로 알았다.


서울의 종로를 이미 길이 아니라 흐름이라 깨닫고, ‘압력을 견디지 못해 부풀어 오르는 혈관’에 비유한 70년대 말 한국일보 문화부장 정달영의 글 <파고다공원>처럼 서울을 묘사하는데 곁들여진 고서와 속담, 어문학 자료 들이 방대하다. “걷다가 인파에 치이고 구두를 밟히고 가방 모서리에 찔려도 ‘얼굴 붉히지 말고 그냥 흘러가야 한다.’ 넓히고 넓힌 찻길에는 차가 홍수처럼 흘러간다. 그 땅 밑으로는 또 지하철이 오간다. 서울은 이처럼 모든 수송수단을 다 동원하여 그것들이 저마다 퍼져 나가도 감당해내지 못한다. 서울은, 그중에서도 종로는 압력을 견디지 못해 부풀어 오르는 혈관이다.”


1395년, 경복궁이 완공되자 태조는 정도전에게 새 대궐의 이름을 지어 바치라고 명한다. 정도전은 술 석 잔을 마신 뒤 “이미 술에 취하고 덕에 배불렀으니, 군자 만년에 큰 경복일러라”라고 한 시경 주아 편의 시구를 인용하여 대궐을 경복궁이라 이름 짓는다. 사정전과 근정전, 그 밖의 후궁과 별채 뿐 아니라 서울 8대문의 이름까지 직접 지어 붙인 정도전의 학식에 감탄한다. 개성에서 옮겨 온 도읍, 서울은 철저한 계획도시였다. 중인들은 직업별로 특정지역에 모여 살았고 4대문 안의 집들은 모두 처마를 담장보다 낮게 해야 했으며 건물구조를 ㄷ자나 ㅁ자로 하여 왕의 권위에 복종해야 했다.


조선후기에 한국을 여행했던 영국인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한국 사람의 호랑이에 대한 공포는 너무나 유명해서 ‘한국 사람은 1년의 반을 호랑이를 쫓느라 보내고 나머지 반을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사람의 문상을 가느라 보낸다’는 중국의 속담이 거짓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는 글을 남겼는데 그 시절은 그랬더라도 인왕산 호랑이, 백두산 호랑이의 멸종이 안타깝기만 하다.


마포 새우젓장수와 왕십리 미나리장수에 대한 조선시대의 구전 이야기가 재밌다. 목덜미가 까맣게 탄 사람을 왕십리 미나리장수, 얼굴이 까맣게 탄 사람을 마포 새우젓장수라 하였다하니, 그 이유는 왕십리에서 아침에 도성 안으로 미나리를 팔러 오려면 아침 햇볕을 등에 지고 와 목덜미가 햇볕에 탔기 때문이고, 마포에서 아침에 도성 안으로 새우젓을 팔러 오려면 아침 햇볕을 앞으로 안고 와 얼굴이 햇볕에 새까맣게 탔기 때문이라 한다.


종현성당 또는 명동천주교당이라고도 하며, 한국 최초의 본당이자 가톨릭의 상징이며 총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명동성당이 사적 제258호로 지정된 날짜가 1977년 11월 22일이라니 숫자놀음이 재밌다.


경기도로 넘어오면 큰 산줄기 이야기와 각 유명도시의 지명에 얽힌 이야기들이 멍석을 편다. 음성은 경기도 안성과 이천, 여주의 경계에 있으며 안성시 죽산면의 칠장산이 경기도와 충청도 경계에 우뚝 솟았는데 그 곳에서 뻗어 나간 산줄기를 한남정맥이라고 부른다고 하니 경기도 남부의 산세와 지세가 한눈에 들어온다.


‘동쪽으로 원주와 잇닿았고, 남쪽으로 여흥을 이웃하며, 북쪽으로 홍천에 이어진다’(최항의 <동한기>)라고 쓴 지평현과 양근현을 합해 오늘의 양평군이 된 것은 1930년이었고, 나라 안에서 가장 이름이 높았던 수원 쇠전은 2일과 4일에 장이 섰는데, 전라북도와 충남북 일대에서까지 소장수들이 소를 끌고 왔기에 현재 수원 갈비가 명성을 얻은 것이 아니었을까 추론한다.


그 자신도 조선 왕조의 희생양이 되어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았던 이중환은 왕씨들을 죽게 한 정도전을 괘씸하다는 말까지 동원하여 크게 비판하였는데, 당시 왕씨 성을 가진 사람으로 벼슬을 하였던 사람들은 모두 도망쳐 숨어서 성과 이름을 바꾸고 살았다고 한다. 마(馬)씨로, 전(全)씨로, 옥(玉)씨로 모두 왕(王) 자를 글자 속에 숨겼던 것이다.


1편 ‘살고싶은 곳‘에서 9편 ’우리 산하‘, 그리고 10편 ’이중환의 택리지 완역본‘까지 장서로 보관만 해도 서가의 품격을 높이리라. 시리즈를 모두 읽고 싶다. 대단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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