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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있는 리플리 ㅣ 리플리 5부작 1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김미정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10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위험이란 게 뭘까? 위험하기 때문에 상황이 흥미진진해졌다.
153쪽, 재능 있는 리플리.
톰 리플리는 수가 빠른 사람이었다. 임기응변에 능했고 다른 사람을 모사하는 재간도 있었다. 돌이켜보면 이 능력들은 사람들을 속이는데 탁월한 재능이었다. 뉴욕에서 무직자로 살아가고 있지만 세무서, 광고회사 직원으로 자신을 위장했다. 속인 신분으로 신뢰를 쌓거나 돈을 편취하기도 했다. 거주지를 바꿔가며 남의 집에 얹혀사는 신세였음에도 그의 취향은 제법 고상하여 고상과는 거리가 멀었던 자신의 실제 삶과 주변 인물들을 증오했다. 특히 부모를 대신해 그를 돌보았던 도티이모를 가장 증오했다. 어린 시절 이모에게 폭력과 굴욕을 당했던 기억이 25살이 된 해에도 쓰라림을 안겨주곤 했다. 이는 톰의 불안정한 심리와 낮은 자존감, 그리고 잘못된 방향으로 결핍을 메우려는 그의 습성과 관련이 깊다.
톰은 디키가 부러웠다. 심장이 터질 듯한 부러움과 자기 연민이 톰을 덮쳤다.
47쪽, 재능 있는 리플리.
둘은 친구가 아니었다. 서로가 서로를 알지 못했다. 이런 깨달음이 끔찍한 사실이자 불변의 진리라는 듯이 톰의 머리를 때렸다. 과거에 만난 사람들도 그랬고, 앞으로 만날 사람들도 그럴 것이다. 앞으로 몇 번이 됐든 톰은 그들을 결코 알지 못하리라는 걸 깨달았다. 최악은 그가 번번이 착각한다는 것. 그들을 안다는 착각, 그들과 완벽하게 죽이 맞고 그들도 그와 비슷하다는 착각을 한동안 한다는 게 최악이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충격적인 깨달음을 얻는 순간, 톰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78쪽, 재능 있는 리플리.
톰은 몽지벨로에서 유유자적하며 그림을 그리는 디키를 보며 자신의 삶과 비교했다. 톰에게 디키는 여러모로 완벽한 사람이었다. 부유한 환경에서 자유롭게 하고 싶은 것을 영위하는 삶. 톰은 점차 처음의 계획과는 다른 감정을 품게 된다. 자신의 신체와 디키의 닮은 점을 찾았고 닮지 않은 부분은 디키를 따라 고치려 했다. 디키가 마지와 단둘이 시간을 가질 때면 시기가 극에 달하기도 했다. 디키는 그런 톰이 마냥 편치만은 않았다. 어느 새벽 바닷가, 톰이 남성 곡예단을 보며 좋아하던 때였다. 디키는 남성 동성애자를 조롱하는 표현을 쓰며 톰을 무안하게 만들었다. 이는 디키를 소유하고 싶어했던 톰이 그를 죽이게 되는 촉매제가 된다. 늘상 떠돌이 강아지처럼 외롭게 살아가다 자신이 좋아하는 이의 환심을 사려 노력했고, 그 사람에게 모든 것을 바치며 여생을 함께 할 계획까지 구상한다. 톰에 비해 별달리 노력하지 않았던 마지가 디키를 차지하려는 것이 아니꼬웠을 수밖에. 반면 디키는 자신이 준 사랑에 모멸감을 선사할 뿐이었다. 이로써 디키는 미래가 아닌 과거로 강등되고 만다. 톰에게도 아버지 혹은 마지와 같은 존재만 있었어도 이토록 극단적으로 끝나지는 않았을 터다. 디키가 본인을 조금만 싫어하는 기색을 보여도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은 감정을 지녔던 톰이 몇 시간만에 사랑했던 디키를 죽이고 평온하게 식사를 하며 여행 계획을 짰다. 심지어는 몽지벨로에서 디키의 재산을 정리하여 새로운 삶을 사는 것에 흥분하기도 했다. 사실 그가 선망했던 것은 타인이 아닌 도회적인 신사로서의 자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디키의 죽음 이후부터는 톰과 독자의 감정선에 점차 거리가 두어진다.
톰은 쇼가 시작되기를, 막이 올라가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만 같았다.
183쪽, 재능 있는 리플리.
톰은 안정적인 상황을 탈피하고 싶어하면서도 초조한 상황을 견디지 못한다. 어느덧 두명의 사람을 죽이게 된 톰은 동일한 경위에게 두번의 심문을 받는다. 로마에서는 디킨 그린리프로, 베네치아에서는 톰 리플리로. 두 심문에서 디키 그린리프의 반지를 끼거나 디키가 살해당한 것 아니냐는 질문을 던지는 등의 대범함을 보인다. 이러한 대범함이 외려 진실을 숨기는데 도움이 될 것임을 이용한 것이다. 타인을 속이며 희열을 느끼는 모습으로 미루어 보아, 긴장이 가져다 주는 자극에 중독된 것일수도 있다.
톰은 디키가 되었다. 모두에게 미소를 짓고 누구든 손을 내밀면 천 프랑을 건네는 성격 좋고 순수한 디키가 된 것이다.
111쪽, 재능 있는 리플리.
🔖 적어도 난 그린리프 씨를 구슬려 돈을 더 타내려고 하진 않았잖아. 그랬더라면 돈을 더 받아 낼 수 있었을 텐데. 디키가 기분 좋을 때 얘기를 꺼냈더라면, 디키가 거들었다면, 돈을 더 뜯어낼 수 있었을 텐데. 다들 그랬을 거야. 누구라도 그랬겠지만, 난 그러지 않았어. 그게 가장 중요해. 톰은 뿌듯했다.
81쪽, 재능 있는 리플리.
사람을 죽이는 일에 대해서도 죄책감을 갖지 않더라도 다른 이들 앞에서는 좋은 사람이 되고자 애쓰는 것 또한 톰의 모순 중 하나다. 누군가 구걸하면 그에게 호쾌하게 적선을 하는 것, 싫어하는 사람이 이야기를 하더라도 끊지않고 들어주는 것. 그가 생각하는 멋진 신사가 되는 방법인 듯 했다. 톰이 지극히 모순적이며 극단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왜 그와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는지, 그가 위험해 처해있을 때 그보다 그를 더 걱정하게 되는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일 멜리오 알베르고(최고급 호텔로 갑시다).”라며 호쾌하게 마무리를 장식하는 그의 말에 마냥 마음이 편치만은 않은 것은 피할 수 없나보다.
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