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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사람
최정화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11월
평점 :
주인공에게 몰입하게 되는 소설이 있다. 그의 언어와 행위에 집중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까지도 내 마음이 되어버리는 상태로 접어들 때가 종종 있다. 그래서 무조건적으로 그의 편을 들게 되어버리는 독서를 할 때가 있다. 그런 소설을 읽을 때면 조마조마하다. 주인공이 다치지 않길, 다치더라도 조금만 다치길, 너무 마음이 상하지 않기를 바라게 되니까.
최정화 장편 소설 『없는 사람』의 주인공 '무오'를 만났을 때도 딱 그런 기분이 들었다. 내가 이 주인공을 떨치지는 못할 거라는 생각. 나는 분명 무오에게 이입하고, 무오가 부당한 일을 했을 때도 무오를 지지할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가 무오에게 어떤 끝을 주었을지 조바심이 나, 쉽게 책을 내려놓지도 못 했다.
무오는 공장에서 우연히 만난 '이부'라는 사람에 의해 원래의 일터를 떠나게 되고, 그의 밑에서 일을 하게 된다. 이부의 설명은 간단했다. '도트'로 정해진 인물의 뒤를 따르며 점을 찍는 것, 도트로 하여금 누군가 자신의 목을 졸라온다는 것을 느끼도록 하는 것, 그것이 무오의 일이라고.
무오는 가짜 노조원이 되어 그들의 운동에 슬며시 끼어든다. 운동의 주축에는 도트가 있다. 무오의 일은 결국 노조를 방해하는 것이었지만, 무오는 그 안에서 혼란을 느낀다. 태어나서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 했던 말들이 마음을 울린다. 이를테면 '우리'가 공장의 주인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가 이길 것이라는 것. 그러면서도 가족이랄 것도 없는 자신에게 친근하게 굴었던 이부로부터 멀어지기도 힘들다. 한 번도 자기의 정체성을 뚜렷하게 느껴보지 못한 무오이지만, 그 누구보다 흔들린다. 특히 사람에게.
얼마 전 어느 작가에게서 그런 말을 들었던가. 한 마디 따뜻한 말에도 눈동자가 흔들리고 마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내가 느낀 무오는 그랬다. "그거 돈 많이 주나요?"라고 물으며, 마음이 시키지 않은 일을 넙죽 받고 말지만, 막상 누군가가 고통을 느껴야 하는 일에는 멈추고 마는. "무오야" 다정하게 부르는 목소리에도 눈물을 흘리게 되는.
인간은 필요하지 않은 일은 하지 않는다.(p.86) 무오는 돈이 필요했고 조금이나마 살갑게 구는 사람이 필요했다. 무오는 필요에 의해 이부가 주는 일들을 했다. 그런데, 인간이란 또 그렇지만은 않다.
"그런데 말이다, 인간이란 또 그렇지만은 않다는 거야. 사랑을 나누는 즉시 목숨을 빼앗긴다고 해도, 다음날 아침에 모가지가 날아갈 것을 알면서도 사랑을 나누는 게 또 인간이라는 거야.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인 거지." (p.10)
무오는 자신에게 결코 득이 되지 않은 일인 것을 알면서도 이부가 시킨 일들을 제대로 끝마치지 않게 된다. 끝마칠 수 없게 된다. 이부의 말을 듣지 않고, 노조에게 유리한 일을 한다고 해서 무오가 노조의 일원이 될 수 있는 것도 물론 아니었다. 무오가 설 자리는 어디인가. 무오 스스로도 모르지 않는가. 그런 생각을 하며 마음이 아팠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비상식적이고, 비이성적인 방향으로 인간은 행동할 수 있다. 정해진 대로 길을 걸으면 안전한 것을 알면서도, 잘 모르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래서 약하고, 흔들리고, 아프다. 무오처럼. 그리고 소설 속 다른 인물들도 무오와 크게 다르지 않다. 자기가 정한 방식 대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한 개인이 정할 수 있는 범위를 정하는 또 다른 무언가가 있다. 그리고 인간이란 자기가 정한 방식조차도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없는 경우가 많은 법이다.
무오는 계속 아플까? 무오의 혼란스러움은, 하얀 종이에 가지런한 글자들처럼 마침표로 정리될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어떤가. 나는 '나'를 가지고 살고 있을까? 그리고 앞으로는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