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주의자의 양심
배리 골드워터, 박종선 / 열아홉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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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어서는 마음 쪽으로는 진보에 끌리고도 있었지만 행동은 보수를 선택하거나, 모두가 아니라 자기들 이익만을 위해서 싸움만 일삼는 그들이 보기 싫어서 둘 다 아니라는 생각에 대부분 아예 선택을 포기한 적이 많았던 것 같다. 지금의 나의 위치는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전 세계적 조소거리의 치욕만 남기고 뭉개버린 지리멸렬한 보수 편에 서있는 것 같다. 물론 생각만 그렇지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는다. 어느 정도 넘어선 나이 탓인지 지킬 만한 것이라곤 쥐뿔 하나 없는 입장이지만 지키는 쪽으로 돌아선 이유는 공산주의와 독재에 대한 거부감에다 사회주의에 동조하는 진보라는 사람들이 뭔가도 모르면서 뭐라도 해내야 한다는 조급증에 설쳐대는 꼴도 보기 싫어서 일 것이다. 책을 읽어 가면서 보수와 진보에 대한 개념을 완전히 잘못 알고 있어 왔음을 깨닫게 된 것이 충격적이었다. 그래서 일단 보수(保守 지킬보,지킬수 conservative 전통적인,보수적인 )와 진보(進步 나아갈진,걸음보 progressive 진보적인)에 대한 단어들의 사전적 정의부터 재차 확인하면서 그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그러면서 보수는 기득권이나 권위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지키는 것으로, 진보는 변화나 개혁이 아니라 평등을 이루는 것으로 개인적인 정립을 하게 되었다. 전제 군주나 독재의 억압에서 벗어나려고 자유를 부르짖고 그기엔 불평등이라는 잘못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자유와 평등은 양립할 수 없는가 고민하게 된다. 자유를 택하면 차이가 없을 수 없다. 그 차이를 평등하게 하면 안 된다. 차이를 차별하지 않는 것을 평등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까?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서 발족한 노조가 또 하나의 귀족으로 되어 거대 노동 권력이라는 문제점을 만들고 있다는 것에 아주 많은 공감이 된다. 노동자 자신의 돈으로 결국은 자신의 자유를 속박하는 새로운 독재자들을 만드는 체계를 보면서 모든 일에 간섭을 하는 덩치 큰 정부의 권력 집중의 문제점을 깨닫게 되었다. 작은 정부를 부르짖는 이유를 생각하면서 자유를 억압하지 않는, 차이를 차별하지 않는 평등이 가능하지 고민하게 된다. 결론은 인공적인 강압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연계의 진화처럼 자발적으로 적자생존의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게끔 맡기는 것이 상책이라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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