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충격적인 사진들을 보고 있는 ‘우리’란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우리’라는 말은 약소국이나 자신의 생명을 걸거 싸우고 있는 국가 없는 사람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타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열한 전쟁에 명목상 관심을 보이는 척하는 사람들(훨씬 더 수가 많은 유권자들만 포함하는 경향이 있다. 사진은 별손해를 보지 않을 사람들이나 특권층이 무시하고 싶어하는 문제들을 생생하게(그도 아니면 ‘훨씬 더 생생하게) 만들어 주는 수단이다. - P23
뉴스가 소위 ‘전 세계‘라는 어법으로 말하는 세계는 — 어느 라디오 네트워크는 한 시간에도 수차례씩 이렇게 읊조린다. "우리에게 22분만 할애하십시오. 우리가 당신에게전 세계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전 세계는커녕) 지리적으로나 관심 여부로나 아주 국한된 장소일 뿐이며, 뭔가 알아야 할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도 매우 짧고 굵게만 방송되는 것이 고작일 뿐이다. 저 멀리 어딘가에서 벌어진 전쟁들 중에서도 고작 몇 개만이 추려내질 뿐이니, 그처럼 선택된 전쟁들 속에서 [대중매체가 모아놓은] 고통을 의식한다고 한들 그것은 억지 의식일 뿐이다. 게다가 카메라에 찍힌 형태인 한, 그 의식은 금방 불타올랐다가 많은 사람들에게 공유된 뒤, 곧장 우리의 생각에서 사라져갈것이다. (복잡한 사유, 문헌, 어휘에 기대기 때문에 비교적 소수의독자들에게만 주어지는) 글로 씌어진 이야기와 대조적으로, 사진은 단 하나의 언어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며 잠재적으로 모든 이들을 위한 것일 수밖에 없다. - P41
대부분의 전쟁은 그에합당한 의미를 제대로 부여받지 못한다. 볼리비아(당시 인구 1백만 명)와 파라과이(당시 인구 3백50만 명)가 교전을 벌여 대량 학살을 낳은 차코 전쟁(1932~35년)8)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독일의포토저널리즘 작가 빌리 루게가 약 10만 명에 달하는 군인들의생명을 앗아간 이 전쟁을 사진에 담았는데, 그가 여러 전투를 근접 촬영한 뛰어난 사진들은 이 전쟁과 마찬가지로 잊혀졌다. 그렇지만 1930년대의 2/4분기에 발발한 스페인 내전, 1990년대 중반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가 보스니아에 맞서 일으킨 전쟁, 2000년에 들어와 훨씬 더 격렬하게 악화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같은 싸움들은 확실히 수많은 카메라의 주목을 받았다. 이런 싸움들에는 훨씬 커다란 투쟁의 의미가 부여됐기 때문이다. - P60
아마 극한의 상태에서 발생한 현실의 고통을 담은 이미지를 쳐다볼 수 있는 권리를 지닌 사람은 그런 고통을 격감시키려 뭔가를 할 수 있었던 사암(즉, 그런 사진이 촬영됐던 군사 병원의 외과의사)이나 그런 고통에서 뭔가를 배울 수 있었던 사람밖에 없을것이다. 의도했든 안 했든, 나머지 우리는 관음증 환자이다. - P67
그렇지만 고작 몇 십 센티미터, 그것도 대부분그 반도 안 되는 거리에서 사진에 찍혔던 모든 연령대의 캄보디아여성들과 남성들(이들 중 대부분이 어린아이들이었다)은 —— 티치아노의 『살가죽이 벗겨지는 마르시아스에서 아폴로의 단검이영원히 마르시아스의 몸을 찔러 들어가기 일보직전에 있는 것처럼 영원히 죽음을 응시하고 있으며, 영원히 살해당하기 일보직전에 처해 있고, 영원히 학대를 받고 있다. 이 사진을 보는 사람은 카메라 뒤에 서 있는 [사진작가의] 시종들과 똑같은 위치에 놓여있는 셈이다. 그야말로 이것은 구역질 나는 경험이다. 이 감옥에서사진을 찍었던 인물의 이름은 잘 알려져 있으며, 우리는 그 사진작가의 이름을 언급할 수도 있다(그의 이름은 엠 에인이다). 이와반면에 그가 찍은 사람들, 그러니까 여윈 몸에 걸쳐진 상의 위쪽에 번호표를 달고 아연실색된 얼굴을 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일종의 집합체로만 존재한다. 즉, 익명의 희생자들로만. - P96
사진 없는 전쟁, 즉 1930년 에른스트 윙거가 관찰했듯이 저 뛰어난 전쟁의 미학을 갖추지 않은 전쟁은 존재하지 않는다. 카메라와 총, 그러니까 피사체를 ‘쏘는’ 카메라와 인간을 쏘는 총을 동일시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전쟁을 일으키는 행위는 곧 사진을 찍는 행위인 것이다. 윙거는 이렇게 썼다. "위대한 역사적 사건을 매우 꼼꼼히 보존하려는 행위와 자신이 지닌 무기로 적들의 위치를 정확하 몇 초, 몇 미터 단위까지 추적해 그들을 섬멸하려는 행위는 모두 똑같은 사고방식에서 수행된다." - P103
사진 배경이 되는 장소가 될 수 있는 한 멀리 떨어져 있고 이국적이면 이국적일수록, 우리는 죽은 자들이나 죽어 가는 자들의 정면 모습을 훨씬 더 완전하게 볼 수 있다. 따라서 신식민지화된 아프리카는 부유한 나라에 살고 있는 일반 대중들의 의식 속에 (그곳의 육감적인 음악을 제외한다면) 주로 깜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있는 희생자들의 모습이 담긴 일련의 잊지 못할 사진들로존재한다. 1960년대 말 기근이 들린 비아프라 주민들의 모습에서부터 1994년 거의 1백만 명이 죽어 갔던 대량 학살에서 살아남은르완다 투치족 생존자들의 모습, 그리고 몇 년 뒤 시에라리온의반군 세력인 통일혁명전선)이 공포 정책을 펴나가던 시기에 그들에게 사지가 잘린 어른들과 어린아이들의 모습 등을 담은 사진들이 그렇다(좀더 최근 사례를 들어보자면, 빈곤에 찌든 채 에이즈로 죽어 가는 일가족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 있다). 이런 사진들이 보여주는 광경에는 이중의 메시지가 있다. 이 사진들은 잔악하고 부당한 고통, 반드시 치유해야만 할 고통을 보여준다. 그리고그와 동시에 이런 고통은 다름 아닌 바로 그런 곳에서 발생하는일이라고 믿게 만든다. 곳곳에 존재하는 이런 사진들, 이처럼 끔찍하기 짝이 없는 사진들은 이 세상의 미개한 곳과 뒤떨어진 곳(간단히 말해서 가난한 나라들)에서야 이런 비극이 빚어진다는 믿음을 조장할 수밖에 없다. - P109
피사체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인물 사진은 이와 정반대 형태의 사진을 무절제하게 탐닉하도록 만들어 왔던 유명인 숭배 풍조의 공범이 되어버린다. 간단히 말해서, 오직 유명인들만 그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나머지 사람들을 그들의 직업, 인종, 곤경을 상징하는 일종의 본보기로 환원하는 셈이되는 것이다. 39개국에서 이주민들의 모습을 찍은 살가도의 사진은 이런 단일한 방향 아래에서, 그 이주민들이 겪고 있는 상이한고난과 그 고난을 불러온 상이한 원인을 한데 뭉그러뜨려 버린다. 어떤 고통을 전 세계적인 것으로 다룸으로써 실제보다 과장되게만들 경우, 사람들은 자신들이 훨씬 더 많이 ‘보호 받아야 한다고느끼게 된다. 게다가 사람들로 하여금 그런 고통이나 불행은 너무나 엄청날 뿐만 아니라 도저히 되돌릴 수도 없고 대단히 광범위한 까닭에 아무리 특정 지역에 개입을 하고 정치적으로 개입을 하더라도 그다지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고 느끼게 만들어 버린다. 어떤 문제가 이 정도의 규모로 인식되어 버리면, 고작 연민의 늪에 빠져 허우적댈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해당 문제를 추상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렇지만 모든 역사와 마찬가지로 모든 정치는 구체적인 것이다(확실히, 역사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정치까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P121
미국인들은 저곳, 그리고 미국이 개입되지 않는 곳에서 행해진 악을 사진으로 찍기를 더 좋아한다(미국은 그야말로 독특한 나라이다. 건국 이래로 사악한 지도자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증명하려는 그런 나라가 바로 미국인 것이다). 다른 모든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이라는 나라가 비극적인 과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미국은 예외라는 건국 신조, 즉 지금까지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이 나라의 믿음과 그리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미국의 역사를 진보의 역사로 보려는 국가적 합의는 비참한 광경을 담은 사진들이 맞닥뜨린 새로운 환경이다. 이런 환경에서라면 사람들은 그 어느 곳에서 벌어졌든지간에 그릇된 일들에 온 정신을 뺏길 것이다. 단, 미국 자체를 유일한 해결사이자 구원자로 보는 한에서만 말이다. - P134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보스니아 밖에 있던 사람들이 저 끔찍한 이미지들을 보고서도 신경을 끄게 된 이유는 보스니아 전쟁이끝날 기미가 보이지도 않으며, 자국의 지도자들이 이 전쟁은 도저히 손쓸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어느 한 전쟁, 혹은 그 어떤 전쟁일지라도 도저히 멈출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면 사람들은 그 전쟁이 가져온 참사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연민은 변하기 쉬운 감정이다.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이런 감정은 곧 시들해지는 법이다. 따라서 정작 문제는 이렇다. 이제 막 샘솟은 이런 감정으로, 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알게 된 지식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만약 ‘우리’(그런데‘우리’란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느낀다면, 그리고 ‘그들(그런데 ‘그들은 또 누구인가?)이 할 수 있는 일도 전혀 없다고 느낀다면, 사람들은 금방 지루해하고 냉소적이 되며, 무감각해지는 것이다. - P153
감정을 무디개 만드는 것은 수동성이다. ...어떤 이미지들을 통해서 타인이 겪고 있는 고통에 상상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텔레비전 화면에서 클로즈업되어 보여지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볼 수 있다는 특권을 부당하게 향유하는 사람들 사이에 일련의 연결고리가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비록 우리가 권력과 맺고 있는 실제 관계를 또 한번 신비화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 고통스런 이미지들은 최초의 자극만을 제공할 뿐이니. - P154
한번 충격을 줬다가 이내 분노를 일으키게 만드는 종류의 이미지가 넘쳐날수록, 우리는 반응 능력을 잃어가게 된다. 연민이 극한에 다다르면 걸국 무감각에 빠지기 마련이며, 그래서 통속적인 처방이 내려지는 법이다. - P159
매우 영향력있는 어느 분석에 따르면, 우리는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각각의 상황은 스펙터클로 변신해야만 우리에게 현실적으로(즉, 흥미롭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게다가 사람들은 스스로 이미지가 되기를, 즉 유명인사가 되기를 갈망한다. 이렇게 현실은 위신을 잃어버렸고, 따라서 재현만이 남게 된다는 것이다. 대중매체를 통한 재현만이 말이다.
...현대성의 시민들, 스펙터클이 되어버린 폭력의 소비자들, 전쟁터에 직접 가보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도 그 참상을 세세히 말하는 데 정통한 사람들은 진실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비웃도록 단련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좀체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지 않도록 온갖 일을 다하는 사람들도 존재할 것이다. 위험에서 멀리 떨어져 의자애 앉은 채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주장하기란 얼마나 쉬운 일인가. - P161
이 세상에 온갖 악행이 존재하고 있다는 데 매번 놀라는 사람, 인간이 얼마나 섬뜩한 방식으로 타인에게 잔인한 해코지를 손수 저지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증거를 볼 때마다 끊임없이 환멸을 느끼는 사람은 도덕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아직 성숙하지 못한 인물이다. 나이가 얼마나 됐든지 간에, 무릇 사람이라면 이럴 정도로 무지할 뿐만 아니라 세상만사를 망각할 만큼 순수하고 천박해질 수 있을 권리가 전혀 없다. - P167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남몰래 볼 수 있거나, 오랫동안 천천히 볼 수 있는 책에서는 이런 사진의 무게감과 진지함이 어느 정도 훨씬 더 오래 살아남는다. 그렇지만 특정 시기가 되면 책장도 덮여지기 마련이며, [사진을 보고 받은] 강렬한 감정도 곧 사그라질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사진이 고발한 특정 사건들도 곧 뇌리에서 잊혀질 것이다. 다시 말해서, 특정한 갈등과 특정한 범죄의 속성을 둘러싼 비난은 인간의 잔인함, 인간의 야만성 자체를 둘러싼 비난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이렇듯 광대한 과정 안에서라면 사진작가의 의도라는 것은 거의 무의미해진다. - P178
이 사진 속의 죽은 병사들은 놀랄 만큼 살아 있는 것들에 무관심하다. 자신들의 목숨을 앗아간 사람들, 자신들을 보고 있는 사람들, 즉 우리에게 말이다. 그렇지만 왜 그들이 우리의 시선을 끌려고 노력해야 하는가? 그들이 우리에게 무슨 말인가를 꼭 들려줘야만 하는 것일까? [그들이 말해준다 해도] ‘우리, 즉 그들이 겪어 왔던 일들을 전혀 겪어본 적이 없는 ‘우리’ 모두는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알아듣지 못한다. 정말이지 우리는 그들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상상조차 할수 없다. 우리는 전쟁이 얼마나 끔찍하며,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그런 상황이 당연한 것처럼 되어버리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이해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다. 전쟁이 벌어지던 바로 그때에 포화 속에 갇혔으나 운 좋게도 주변 사람들을 쓰러뜨린 죽음에서 벗어난 모든 군인들, 모든 언론인들, 모든 부역 노동자들, 독자적인 모든 관찰자들이 절절히 공감하는 바가 바로 이점이다. 그리고 그들이 옳다. - P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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