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지나간 세계
아사다 지로 지음, 이선희 옮김 / 부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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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사다 지로의 <칼에 지다>는 내 인생 소설 중 한 편이다.

국내 최신간으로 소개되는 <겨울이 지나간 세계>는 2016~17년 마이니치 신문에 연재되었던 소설로 일본에선 <OMOKAGE>란 원제로 2017년에 단행본 출간되었던 작품이다. 원제와는 다르지만 <겨울이 지나간 세계>라는 국내 출간명은 작품의 이미지를 제대로 형상화한 문학적인, 박수쳐 주고픈 작명이다.

이 소설은 칠순이 된 작가의 깊은 연륜이 사골 국물처럼 진하게 우러나오고 여기에 '아사다 지로'표 감동이 첨가된 또 하나의 수작이다. "몰락한 명문가의 아이가 소설가가 되는 경우가 많다"라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문장을 읽고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아사다 지로! 도쿄의 큰 부잣집 아들로 태어난 아사다의 집안은 망했는지 모르지만, 우린 이래서 오늘도 뛰어난 이야기꾼 아사다 지로의 신간을 읽는다. 참 다행이다.

「한 남자가 있다.

다케와키라는 이름의 이 남자는 평생 한 눈 팔지 않고 직장인으로 성실하게 살아왔고, 집과 직장만을 지하철로 통근하는 무미건조한 인생을 살았다. 65세 정년퇴임 환송식까지 마치고 마지막 퇴근을 하던 중 그는 지하철에서 뇌출혈로 쓰러지고, 신비한 기억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

대기업 임원으로 어느 정도 성공한 직장 생활을 한 다케와키. 아내와 외동딸 가족을 둔 단란한 가정사는 타의 모범으로 언뜻 겉보기에는 불행의 그림자가 전혀 비추지 않는 듯하지만, 생사의 기로에서 그는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여행을 다른 세상인 이세계(異世界)로 떠나 미지의 인물들을 만나고 과거의 기억을 소환한다.

다케와키에게는 아들 하루야가 있었으나, 어린 나이에 저세상으로 보낸 아픈 기억이 원죄처럼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다. 그리고 거의 아는 사람이 없지만, 그는 부모가 누군인지 모르는 고아다. 이름도 독지가의 성과 프로야구 선수의 이름을 조합해서 만들었고, 12월 15일이라는 생일조차 명확하지 않다. 사실 그는 이러한 태생적인 불행을 한마디 불평 없이 견디며, 묵묵히 자기 가족이란 울타리를 만들어내며 고분분투했던 거다.

'지하철 인생'이라고 요약할 수 있는 그의 인생사는 이세계 여행을 통해 지하철이 갖는 커다란 의미가 다시금 드러난다. 그리고 출생의 비밀이라는 풀리지 않던 매듭을 풀게 된다.

소설의 주인공 다케와키는 1951년생이다. 아사다 지로 역시 '51년생이니 주인공의 설정이 우연만은 아닐 터이다.

<겨울이 지나간 세계>는 '51년생들과 그리고 전후에 태어난 그 윗세대('전후세대'로 칭할 수 있겠다)에게 전하는 소설가의 따뜻한 정종 한 잔이다. 술잔과 더불어 깊은 공감과 따뜻한 위로가 함께함은 물론이다.

전후세대는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는 경우도, 있기는 했으나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경우도 많았기에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바로 일본의 고도성장기, 경제부흥을 이끌었다.

"남들에게 말할 수 있는 고통은 뻔할 뻔자다. 그런데 남들한테 말할 수 없는 고생이라면······.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다." - P 41

"시시한 이야기가 너무나 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 P 230~231

'이야기'를 '인생'으로 바꿔 보자는 게 저자의 의도는 아닐는지. 시시한 인생은 없다!

"하지만 65년 만에 끝나서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 인생의 행복과 불행의 양이 똑같다면 내게는 아직 15년이나 20년쯤 행복한 시간이 남아 있어야 한다." - P 237

저자의 동년배인 이들에게 아사다가 꼭 전하고픈 한마디.

"당신은 참 열심히 살았어요." - P 101

 

"따분함은 참 좋다. 삶에 아무런 영향이 없는 것들을 생각하는 시간. 오직 사고와 상상만 하는 비생산적인 시간. 옛날 인류는 풍요로운 시간을 주체하지 못하며 살다가 우아하게 눈을 감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런 일들은 나태함이 되고 비생산적인 행위가 되었으며, 사람들은 자유로운 사고와 상상을 봉쇄하며 살게 되었다. 아무리 수명이 늘어났다고 해도 그런 인생은 너무나, 그런 죽음은 너무나 빈곤하지 않은가." - P 192

 

어느덧 인생의 후반전을 뛰는 사람들, 특히 남성 독자라면 <겨울이 지나간 세계>를 통해 아사다 지로가 선사하는 "BRAVO, MY LIFE & YOUR LIFE!"에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오르는 격한 공감을 피할 수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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