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대혼돈
슬라보예 지젝 지음, 강우성 옮김 /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경희대학교출판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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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의 지성으로 전 세계적으로 명망이 높은 슬라보예 지젝은 경희대학교 글로벌 커뮤니케이션학부 석학교수(Eminent Scholar)로 이름을 올리고 있어서 그런지 유독 우리나라에서 인기가 높고 여러 매체를 통해 무수히 많이 인용되는 '록스타'급 철학자다. 이미 발간돼 있는 많은 저서들과 달리 <천하대혼돈>이 독보적인 까닭은 지젝의 20년 지기인 경희대 이택광 교수가 직접 제안해 원저 없이 한국에서 처음으로 출간되는 책이기 때문이다. 시기적으로 주로 2018년도 하반기에, 글쓴이가 여러 언론 매체에 기고한 짧은 글들을 묶은 게 <천하대혼돈>인데 그의 관심사는 전방위적인지라 전 지구의 논쟁적 사안들을 거의 망라한다. 새로운 세계 질서, 현대정치와 포퓰리즘, 디지털 정치학, 문화와 권력... 그리고 '대혼돈을 넘어'까지.


"천하대란, 형세대호

천하가 대혼란이지만 기운은 상서롭다."

- 마오쩌둥, P 119


25쪽에 달하는 "우파 포퓰리즘을 향한 좌파의 응답" 정도를 제외하곤 그다지 장문의 글은 없다. 언론 기고라는 특징상 긴 분량으로 투고하긴 어려웠던 결과겠지만, 그렇다고 내용이 호락호락하진 않다. 우선 보통 사람들은 잘 사용하지 않는 철학적인 용어와 인용이 많고, 이러한 단어들이 연결되는 문맥도 그 의미를 파악하기가 여간 쉽진 않다.

예를 두 개 들어보자.

"그 좌파적 변형은 칸트적 의미에서 훨씬 복잡하게 허위이다. 좀 막연하지만 하나의 적절한 상응 관계로 보면, 적대적 관계에서 적을 구성하는 일은 칸트의 도식주의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 P 96

"그는 모든 특정한 정체성을 해체하는 자본주의의 동력학이 민족적이고 성적인 정체성에도 영향을 끼치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을 터이다. 또한 성적인 '일면성과 편협성은 더욱더 불가능해지며', 성적 실천의 경우도 '모든 굳은 것들은 남김없이 녹아버리고, 모든 신성한 것들은 더렵혀'져서, 자본주의는 표준 규범적 이성애를 고정되지 않고 변화하는 정체성과 성향의 확산으로 대체하는 경향이 있다." - P 205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이런 사악한(!) 글을 쓰는 것도 재주다. 이런 글을 번역한 강우성 교수에게 경의를 표한다. 철학서적이 좋아하는 분야는 아니라 많이 읽진 않았어도, 이 정도면 내게는 거의 암호 해독 수준이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지젝은 '급진적 보편주의자'라고 한다. 그의 관심사는 동시대의 세계 곳곳에 뻗쳐 있고, 적당히 의뭉스러운 태도를 취하는 게 아니라 사안에 대해 뚜렷한 소신을 밝히는 태도의 선명성으로도 유명하다. 여기서도 뉴욕대 아비텔 로넬 교수가 제자 님로드 라이트먼로부터 당한 고소에 대해 로넬 교수를 지지하는 글을 써서 논란의 대상이 됐었던 일화가 소개된다. 오해가 있을까 봐 밝히자면, 로넬 교수는 여자고 제자 님로드는 남자로 일반적인 성폭력이나 권력 남용의 위치와는 정반대다.

사우디아라비아, 보스니아, EU, 미국, 이스라엘, 중국, 영국... 이 책에 실린 글들에서 다루는 국가와 지역이다. 보통 신문에서 사람들의 눈길이 제일 안 가는 지면이 외신면이라 하는데 슬로베니아 출신의 지젝은 G2로 통용되는 미국과 중국은 물론, 여성 운전은 허용되었으나 운전 권리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다 체포된 여성이 있는 사우디, 정부에 의해 살해당한 반체제 인사를 기리는 민중 집회 당시 놀랍게도 민족을 초월한 연대를 통해 작은 기적을 보여준 보스니아, 해리 왕자와 결혼한 흑인 페미니스트 때문에 시끌벅적한 영국에 이르기까지 그의 레이더망에 안 걸리는 지역이 없다. 또한 그의 관심사는 지구온난화, 섹스봇, 카톨릭 교단의 소아성애 범죄, 한 장의 사진 「전쟁의 공포(The Terror of War)_닉 우트」 (워낙 유명한 베트남전 사진이라 찾아보면 금방 안다)의 페이스북 이미지 삭제로 촉발된 보도지침 논란, 1~2년 사이 부쩍 국내 언론에서 빈번하게 사용되는 용어 '포퓰리즘' 등 동시대의 이슈를 지나치는 법이 없다.

앞서 지젝의 문장이 어렵다는 말을 했다. 마치 대학교재를 초등학교 우등생이 의욕적으로 읽고자 하는 느낌이다. 반드시 어려운 책이 좋은 건 아닐 거고, 어려운 내용을 쉽게 전달하는 것이야말로 '고수의 한 수'겠으나 지젝은 그럴 생각은 요만큼도 없는 듯하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교양인, 아니 적어도 교양인이 되길 바라는 독자라면 세계 곳곳의 대혼돈을 파헤치고 나름 대안을 제시하는, '지젝 입문서'로는 마춤인 이 책에 도전해보길 권한다. 매번 본인 입맛에 맞는 한정된 책의 범위에서 한 번쯤은 벗어나, 읽은 이의 머릿속 얼어붙은 바다를 깨부수는 문장으로 가득 찬 <천하대혼돈> 같은 책도 접해 보자. 머릿속이 더욱 혼란으로 가득 찰 수도 있지만, 잠 못 드는 밤 최적의 조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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