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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갈 수 있는 배
무라타 사야카 지음, 김윤희 옮김 / 살림 / 2018년 10월
평점 :

학창시절을 지나고 어른이 되어 어른 대접 받으며 살다보면 사춘기 때의 조그마한 호기심에도 쉽게 흥분하던 문제들을 다 잊게 된다. 사춘기의 가장 큰 이벤트라면 어린아이에서 제대로 성별이 발현되는 2차성징의 시기일 것이다.
태어났을 때부터 이미 성별은 정해져 있지만 2차 성징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특별히 성별을 나타내는 옷차림이나 말을 하지 않는다면 구분이 잘 가지 않는다. 겉으로 보여지는 신체적 특징이야말로 생물학적인 성별이 제대로 나타나는 것이다.
주인공 리호는 그런 생물학적 성에 충실했던 사람이지만 사랑하는 남자와의 섹스가 항상 고통으로 끝맺게 되자 여성이라는 몸 안에 다른 성이 있는 게 아닐까 의심하고 새로 2차 성징을 맞이해 보려고 한다. 몸 안에 갇힌 원래의 성을 찾아나서는 리호와 달리 독서실에서 만난 치카코는 세계를 물성으로 보고 인간의 평범한 삶을 소꿉놀이로, 자신은 그곳에서 비켜난 인간으로 자각한다.
친구인 츠바키가 어릴 때부터 미모로 인해 겪던 곤욕도 인간으로서 느끼는 분노와 공감이 아니라 그저 지구의 한 존재가 어쩌다 겪는 사고처럼 아무렇지 않게 들어주는 것이다.
츠바키와 치카코는 동창으로 서로의 다른 점 때문에 친하게 지냈고 마음 상하는 일도 많지 않다. 치카코는 츠바키와 다른 세계에 살고 있고 한 공간에 놓이더라도 다른 시간을 사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이다.
- 이렇게 함께 방에 있는데도 치카코는 츠바키와 다른 시간의 흐름 속에 있었다. 어느 쪽이 맞다가 아니라 양쪽 모두 올바른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같은 장소에 있는데도 다른 공간에 있는 것처럼. 그것이 조금 힘들 뿐이었다. p.174
각자의 문제를 안고 시간을 보내던 세 사람은 결국 섹스를 통해 문제 해결의 통로를 찾는다. 리호는 무성의 존재를 통해 자신만의 느낌을 찾으려 하고 계속해서 2차 성징을 시도한다. 치카코는 독서실에서 만난 예의바른 남자로부터 고백을 받고 합의 하에 성관계를 갖지만 그가 바라는 건 인간과의 관계가 아니라 지구와의 관계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츠바키는 여성스러움에 대한 강박이 있지만 지극히 평범하고 주어진 성별에 대한 포지션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책에서 리호는 태평양 항로를 운항하다 퇴역후 야마시타 공원에 계류되어 있는 히카와마루라는 선박을 자주 떠올리고 언급한다. 리호는 자신이 갇힌 여성으로서의 몸을 벗어나 좀더 멀리 가고 싶어한다는 의지도 내비친다. 완전한 성 정체성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본인이 자유롭지 못하다면서. 히카와마루는 리호가 자신의 성 정체성을 파악하고 나면 아주 먼 곳까지 태워다 줄 배를 상징하는 것 같았다.
치카코는 지구의 모든 물과 햇빛과 바람은 인간과 연결되어 있어서 순환한다는 이야기를 할아버지로부터 들었고 그런 물성의 세계를 동경해 왔기에 어차피 멀리 가봐야 모두 연결된 하나의 우주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책에서 츠바키를 제외하고 치카코와 리호에 대한 소제목만으로 이야기가 연결되는 이유일 것이다.
사람은 치카코와 리호처럼 같이 있으면서도 다른 공간과 세계를 살고 있을 때가 많다. 같은 사고를 목격해서도 진술은 다 다른 것처럼. 작가는 이에 대해 '각자의 시간이 흐른다. 올바른 시간이' 라고 했다. 살아가는 방식과 가치관이 다르더라도 우리는 모두 올바른 시간을 살아내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