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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저녁이 저물 때
예니 에르펜베크 지음, 배수아 옮김 / 한길사 / 2018년 7월
평점 :

집안 어르신들과 만나 이 얘기 저 얘기 하다보면 죽을 고비를 여러번 넘겼던 사연을 들을 수 있다. 나만 해도 어릴 때 추락사할 뻔한 일이 있었다고 하니까.
내 기억은 없으나 주변 친척 어르신들 말로는 한밤중에 화장실 가려고 나왔던 건지 아랫집과 경계를 지은 담장을 내가 기어오르고 있었다고 한다. 만약 밤늦게 돌아온 어른들이 나를 발견하지 못하고 담장을 넘어갔다면 어린 내 몸은 땅바닥에 무사히 안착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린 아기의 죽음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그 일로 인해 서서히 무너져가는 가정을 보여준다. 난생처음 부모가 된 어린 부부는 질식한 아기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던 무지로 인해 위로와 경멸, 무관심을 받아야 했고 남편은 결국 아내를 떠나버린다. 혼자 남겨진 아내에게는 일상을 살아갈 힘조차 없어 또 다른 비극으로 발을 들인다.
비극을 상쇄하려는 듯 이때 '만약에'가 등장한다.
만약, 부부가 아기가 질식사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 기지를 발휘해 눈을 한줌 집어 아기의 품속에 넣었다면 아기는 깜짝 놀라 기침했을 것이고 울음을 터뜨렸을 것이고 죽지 않았을 것이다.
이야기는 거기서 다시 시작된다.
다시 살아난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고 동생도 태어난다. 아버지의 일이 잘 되어 시골마을에서 도시인 빈으로 이주를 하게 된 가족들 앞에 다른 문제는 더 없어 보였다.
그렇지만 생의 아이러니는 그곳에서도 발생한다.
그렇게 살아난 아이는 첫사랑의 상처를 안고 스스로 목숨을 버린다.
아이의 목숨을 살렸던 엄마는 사춘기에 반항기 어린 딸과 사이가 나빠졌고 '창녀'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그곳에서 히틀러 통치를 맞아 유대인이었던 가족들은 세파를 피해가지 못한다.
이후에도 여러번의 '만약'을 거쳐 결국 노인이 된 아이가 며느리의 냉대 속에 홀로 요양원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한 순간의 어려움을 피한다고 해서 남은 나날이 장밋빛이기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만약, 어린 시절 담장을 기어오르는 나를 아무도 발견하지 못하고 그대로 바깥으로 몸을 날렸다면 나는 지금 없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는 게 쉽지는 않았으니까 말이다.
학창시절과 성인기를 거칠 때 행복한 적도 많았지만 심하게 어렵고 힘든 일도 많았다. 누구든 그럴 때 있지 않은가. 죽고 싶다고 생각할 때.
그러다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지금 살아있는 것은 수많은 어긋난 우연 덕분이라고. 하나라도 제대로 맞아떨어진 불행이 등 뒤에서 다가왔다면 지금은 없을 거라고 말이다.
결국 내 말로는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겠지만 사람은 원래 불행한 미래가 아니라 행복한 미래를 꿈꾸게 되어있고 쉽게 망각하는 동물이니 괜찮을 것이다.
감당하기 어려운 불행을 겪고 나서 어린 아기의 어머니를 낳았던 그녀의 어머니가 딸을 위해 기운을 추스르고 일상을 이어나가는 것처럼.
- 한 사람이 죽은 하루가 저문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저녁이 저무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p.24
한 사람이 죽은 하루가 저문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저녁이 저무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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