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시간 - 느리게 사는 지혜에 관하여
토마스 기르스트 지음, 이덕임 옮김 / 을유문화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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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떤 시간을 살고 있나요?

<세상의 모든 시간>에는 자신의 앞에 놓인 시간들을 충실하게 살아간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작가는 서문에서 인간이 위대함을 창조할 수 있는 지구상의 유일한 생명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 그들이 무언가를 발견하고, 탄생시키기 까지 걸린 시간은 오히려 자연의 그것과 닮았습니다. 나만을 위해 여유를 부리는 일이 낭비로만 인식되는 세계 속에서 그들은 고집스럽게도 자신에게 내재되어있는 본연의 리듬을 따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자기 행동의 의미를 재발견 하는 시간’, 내가 쥐고 있는 몇 분 몇 초, 그 시간들을 존중하고자 나만의 결과 자국들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매만졌습니다. 그러다보면 삶을 견디고자, 타인의 시간을 뒤쫒고자 꽉 쥐었던 손에 힘이 서서히 빠지는 것을 느끼곤 했습니다. 그 사소한 틈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과 들이치는 빛을 바라보는 일이야말로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어떤 대상에 시간을 들이는 일은 모든 사람에게 불안의 시대 한가운데에서 내면의 중심을 잡아주는 방호벽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나만의 시간을 긍정하기 어려운 시대 속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생을 일궈내는 일은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해치울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작가는 번갯불을 일으키고 싶은 사람은 반드시 구름으로 오래 머물러있어야 한다, 여무는 시간을 반드시 둬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마음이 조급해질 때마다 머릿 속의 감각들을 풀어내기 위해 다섯페이지를 할애한 프루스트의 글을 되뇌어 보는 것은 어떨까요? 누군가의 사진을 들고 얼음 호수를 건너는 사람들이나, 의자를 만들기 위해 수십 그루의 나무를 심는 누군가의 모습도요. 세계의 끝에 위치한 벙커를 떠올려보는 것 또한 멋지지 않을까요. 어떤 전쟁이나 재난이 와도 그곳에서 자신만의 시간을 축적하고 있을 생물들에게서 우리는 미래의 나에게 어떤 시간을 물려줄 수 있을지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왕이면 나에게 찾아올 어떤 위협들도 차마 틈입할 수 없는, 그만큼 안정된 시간들을 선물할 수 있다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세상의 모든 시간을 들춰보고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전과 다른 영감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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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림지구 벙커X - 강영숙 장편소설
강영숙 지음 / 창비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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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 오면 재해로부터 더 멀어져야 하는데 지난 밤보다 재해에 더 가까워지곤 했다.’ ㅡ 34p
이 문장을 보자마자 단번에 밑줄을 그었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가 지나고 있는 오늘, 그리고 내일의 상황을 단 한 문장으로 압축시켜 보자면 이것이다 싶어서지요. 국가적 재난이나 다름없는 바이러스가 온 세계를 휩쓸고 있는 요즘, 이 책을 받아들게 되었습니다. 타이밍이 그래서 일까요. 어쩐지 우연이 아닌 일종의 신호처럼 느껴집니다.
지진이 지나가고 난 뒤의 부림지구 벙커X의 모습을 살펴보자면 참혹하기 그지 없습니다. 재난이 일어난 후의 일상은 그야말로 ‘뜻밖의 것’들로 가득합니다. 아니 일상이라고 말하기도 이상한 것들의 향연, 즉 비일상적인 것들에 익숙해져가고 있지요. 주인공 유진을 비롯하여 그곳에 거주하는 이재민들 모두 그들의 하루에 진하게 스며있는 재난의 냄새를 맡으며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소설 속에서 묘사하는 재난의 현실이란 가혹하기 마련입니다. 주인공 유진이 지진 상황에서조차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삶이 무너지고 난 후의 인물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 상황에서는 나를 설명할 수 있는 단어나 수식어조차 찾기 어렵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입니다, 라는 말 끝에 모두가 똑같이 ‘이재민’이라는 단어를 붙일 뿐이죠. 소설 속에서 같은 악취를 공유하는 이들은 그들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구가 모인 ‘존엄키트’를 받습니다. 존엄의 사전적 정의를 보자면 이러합니다. ‘인물이나 지위 따위가 감히 범할 수 없을 정도로 높고 엄숙함’. 재난 후 같은 극한의 상황에서 유지할 수 있는 존엄이란 과연 존재하는 걸까요? ‘인간이 어떻게 저런 짓거리’를 싶다가도 돌아서면 ‘인간이니까 그렇게 할 수 있는게 아닐까 싶은 것’이 재난을 겪은 다음의 인간의 모습입니다. 존엄 키트 속 구성은 최소한의 것들로만 구성되어있을 정도로 매우 단출합니다. 그것들마저 존엄이 무너지고 난 뒤에야 받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재난의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가만히 멈춰있기 보단 ‘일상’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들을 차근차근 수행해나갑니다. 그들이 자주 다니던 길이 곤죽처럼 변했음에도 걷고 또 걷거나 재난이 멈춘 뒤의 상황을 상상하면서 꿈을 꾸기도 합니다. 이미 사라져 버린 ‘문화’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어이없어 웃음이 나오다가도, 누군가와 함께 했던 기억이 떠올라 잠시라도 웃음을 지어보기도 하지요. 와인을 발견한 어느날에는 작은 파티를 열기도 합니다. 그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던 일상들을 바라고 바라면서 그들이 잊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지금의 현실’과 그 속에 존재하는 ‘나’입니다. 사람들은 신원을 증명하고, 누가 누군지에 대해서 끊임없이 기록을 해야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절차임에도 어쩐지 다른 이야기를 더 해주고 있는 듯 합니다. 이 상황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증명하는 일이 중요할까 싶어도, ‘내가 그냥 나지’ 라는 말 밖에 안나오는 상황 속에서도, 그 정보를 누군가가 악용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도. 내가 나를 알고 나를 증명해야만 이 세계를 거뜬하게 살아낼 수 있다는 것.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며 그럼에도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직시하는 일. 누군가 나를 기억해 주지 않아도 내가 나를 기억한다는 것이, 그것만이 무너진 세계 속에서 살아남는 일 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소설을 읽으면서 이런 것에 대해 고민하고 또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러분을 공격하는 많은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세요.’ ㅡ 122p
소설에서는 연구원들이 ‘재해 초기가 지나면 모두 무서운 인간들로 변한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우리의 요즘은 어떠한지 궁금하네요. 재난과의 동거는 어려운 쪽의 몫이라는 작가의 말을 다시금 읽어봅니다. 그럼에도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묵묵하게, 무심하고도 다정하게 오늘을 살아내기를. 큰 일은 일어나지 않되, 여러분들의 일상을 벌어지게 만드는 소소한 일들은 끊임없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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