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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따위 멸망해도 ㅣ 사계절 1318 문고 155
남유하 지음 / 사계절 / 2026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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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따위 멸망해도'는 두 가지 키워드 'LOVE'와 'DEATH' 버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계절 출판사의 조각 서평단에 선정되어 둘 중 하나를 골랐어야 했는데, 만약 세상이 멸망한다고 해도 나는 '사랑'으로 따뜻하게 마무리하고 싶어 'LOVE' 버전을 선택했다.
LOVE는 '세상 따위 멸망해도', '빛나지 않아' 그리고 '살아남은 아이들' 이라는 글로 채워져 있다. 나는 그 중에서 가장 글의 성격이 달라 보였던 '살아남은 아이들'에 대해 써보고자 한다. 앞선 두 이야기는 가볍게 읽어도 사랑이야기임을 바로 알 수 있다. 하지만 '살아남은 아이들'은 처음 읽으면 이게 왜 '사랑'의 범주에 들어간 이야기인지 어리둥절해진다.
이 이야기는 '아포칼립스'에 가깝다. 갑작스럽게 퍼진 '에키노 바이러스'는 아이들에게 치명적이어서, 감염된 아이들이 죽게되고, 그 중에 살아남은 아이들은 (일종의 무균실인) 돔으로 둘러싸인 학교에서 산다. 이야기 주인공도 어머니의 걱정으로 이 학교에서 생활하며 '미로'라는 친구와 룸메이트가 된다. 둘은 마음이 맞아 잘 어울려 다니는데, 어느 날 인공 자연인 '바람의 숲'으로 갔다가 미로의 어릴 적 소풍 이야기를 듣게 된다. 노을이 지던 하늘, 죽어가는 커다란 나무, 벌레... 등 많은 것들을 그리워하며, 자신이 돗자리 위로 기어가는 개미가 되고 엄마가 자신을 개미인 줄 알고 밀어내는 꿈을 꿨다고 말한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미로는 떨어져 있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어머니에게서 자신의 존재가 점점 작아지고, 사라진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자신은 아직 어머니를 많이 사랑하는데 어머니는 그렇지 않을 것 같다는 고민.
그러다가 미로는 '죽은 나무'가 보고 싶다고 말하며 주인공에게 학교 밖으로 나가자고 제안하고, 둘은 탈출 계획을 세워 바깥세상으로 통하는 문으로 나가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여전히 반투명한 돔이 뒤덮고 있고, 죽은 나무 그루터기가 있다. 미로와 주인공은 그 그루터기 앞에서 운다. 계획이 실패해 돌아가려던 찰나 로봇이 다가와 나가겠냐고 묻는다. 황량한 돔 바깥 풍경을 본 '미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하고 주인공은 결국 나가게 된다. '잘린 그루터기'가 미로의 희망을 무너뜨린게 아닐까 싶었다. 어쩌면 미로에게 잘려버린 나무가 아닌 죽어가는 나무가 희망이 아니었을까... 잘려버린 나무는 살아보겠다는 의지와는 상관이 없이 죽임을 당한것이고 자신의 희망도 마치 그 나무처럼 강제로 꺾여버렸다고 여겼을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반면에 주인공에게는 '의지'가 된 것이 흥미로웠다. 가짜가 아닌 진짜 세계. 가족, 자신이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것을 향해 나아가겠다는 마음이 황량한 벌판의 두려움을 이긴 것이니 말이다. 이것이야 말로 사랑이 두려움을 이긴게 아닐까 생각한다.
앞서 말했듯 처음에는 이게 왜 사랑 범주인지 싶지만, 글의 곳곳에 사랑이 묻어난다.
몇 문장을 적어보자면,
- 할 수만 있다면 그 기억들을 뇌 주름 사이에서 끄집어 내어 노란 종이로 싼 다음 노끈으로 묶어 책상 서랍 속에 보관하고 싶다. 변질되지 않고 오래오래 신선한 기억으로 남아 있도록.
-학교에 도착했을 때, 엄마는 내게 "아직 내리지 마."라고 했다. 자기가 먼저 차에서 내려 우산을 펴고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비 한 방울 조차 내 몸에 닿게 하지 않으려는 듯.
-응. 소중한 기억들을 다시 꺼내 보는 거야. 정직할 정도로 파란 하늘, 정수리를 달구던 따가운 햇살, 땀이 밴 목덜미를 스치던 바람, 초록 이파리를 흔드는 나무, 그리고 하얀 파도가 밀려오던...
-바람이 분다. 나는 바람의 냄새를 맡는다.
처음에는 그냥 넘어갔지만, 두 세번 읽으며 담담하게 사랑을 표현하기 까지 작가는 저 문장들을 몇 번이나 다듬었을까 궁금해졌다. 가끔 살아가다보면, ㅇㅣ 순간이 평생 그리워하게 될 소중한 추억이 될 거라는 직감이 들 때가 있다. 나에게는 어린시절의 어느 소풍 날, 중학교 3학년의 유달리 행복했던 나날들, 문득 주변에서 나에게 주는 사랑이 무척이나 커다랗게 느껴지는 순간 그리고 다시는 같은 기회가 오지 않을 것 같은 날. 그리고 돌아가지 못할 것 같은 날. 나이가 들면서 흐려질 것을 알기 때문에 그 기억과 감정들을 하나하나 날 것으로 간직하고 싶은 마음. 내게 소중했던 날들과 그 사람들을 향한 사랑이 그대로이길 바라는 마음. 이러한 복잡한 상태를 노란 종이, 노끈, 서랍으로 그냥 일상을 이야기하듯 표현한 점이 오히려 내게는 더 무겁게 다가왔다.
두 번째는 어머니께서 자식에게 보내는 사랑의 마음. 언뜻 보면, 가벼운 배려같지만 사실은 바이러스가 창궐한 무서운 세상에서 마지막까지 아이를 보호하고 싶다는 그 마음이 잘 드러난 대목같다. 이야기 속에서는 바이러스로 표현이 되었지만, 실제 세상도 이만큼 무서우니 그 속에서 최대한 아껴주고 싶은 부모님의 애정이 듬뿍 들어간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이 대목에서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 밤 늦게까지 주무시지 않고 나를 기다리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세, 네번째는 일상을 향한 주인공의 애정과 그 애정이 막막함과 무서움을 이긴 모습을 그려낸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무섭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야만 할 때가 있다는 것을. 그렇게 나아가기 위해선 자신에 대한 믿음과 그 목표를 향한 많은 애정이 있어야 함을. 여기서는 '바람'이 '사랑'과 동의어임을 나는 느낄 수 있다.
사랑의 모습은 참으로 다양하고, 이 책의 다른 작품에서도 사랑을 잘 그려냈지만, 내 생각에는 이 책의 작품 중에서 가장 넓은 사랑을 표현했다고 생각하고 그만큼 여운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