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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소리 약국
김혜선 지음 / 도마뱀출판사 / 2025년 11월
평점 :
김혜선 작가의 『잔소리 약국』은 26년차 영화 저널리스트인 작가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자전적 소설입니다. 51년간 약국을 운영해온 어머니와 프리랜서로 살아가는 딸이 함께하는 2년 11개월의 동거 이야기를 통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두 여성의 복잡하고도 다정한 관계를 섬세하게 그려냅니다.
빈백에 앉아 단숨에 읽어버린 하루

오늘 수업을 마치자마자 빈백에 앉아 완독했습니다. 영어학원을 운영하며 하루 종일 아이들과 씨름하다 보면 저만의 시간이 참 귀한데, 이 책은 손에 잡는 순간 내려놓을 수가 없었어요. 읽는 내내 엄마 생각, 할아버지 생각이 났습니다.
할아버지의 마지막과 겹쳐진 이야기
저희 할아버지도 소설 속 엄마처럼 갑자기 넘어지셔서 고관절 수술을 받으셨어요. 하루 전까지만 해도 시니어 배드민턴 선수로 활발하게 뛰어다니시던 분이었는데, 그 작은 사고 하나로 모든 게 달라졌죠. 요양병원에서 1년 남짓 지내시다 급성 폐렴으로 하늘나라로 가셨거든요.
책 속 딸이 어머니의 일상을 지켜보며 느끼는 안타까움과 무력감이 너무나 생생하게 다가왔습니다. 한 순간의 사고가 한 사람의 전 생애를 어떻게 바꿔놓는지, 우리가 얼마나 취약한 존재인지를 할아버지를 통해 경험했기에 더 깊이 공감할 수 있었어요.
친정엄마와의 동거, 그 익숙하지만 낯선 시간들
지금 저희 엄마는 주중에 저희 집에서 같이 살면서 아들 둘 밥도 챙겨주시고 집안일을 도와주십니다. 친정엄마와의 동거가 어떤 느낌인지 공감가는 부분이 정말 많았어요.
책에서 "집안일이 두 배가 되는 게 아니라 두제곱이 된다"는 표현에 피식 웃었습니다. 정확해요. 한 사람이 더 있다는 건 단순히 수학적 계산으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변화를 가져오거든요. 생활 리듬, 식사 취향, 청소 방식, 심지어 TV 채널 하나까지도 조율해야 하는 게 동거의 현실이죠.
그런데도 엄마가 계시면 든든합니다. 퇴근해서 집에 오면 밥이 되어 있고, 아이들이 챙김을 받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소설 속 딸처럼 저도 가끔은 "혼자만의 아침 시간"이 그리울 때가 있지만, 함께하는 시간의 소중함을 더 크게 느낍니다.
K-차녀의 삶이 주는 울림
전 K-장녀로서 K-장남같은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남동생이 캐나다에 살아서 사실상 제가 모든 걸 책임지고 있거든요. 그래서 소설 속 K-차녀의 삶이 얼마나 고되고 힘들지 예상이 되어 더 빠져들었어요.작가가 용기 내어 써준 이 이야기가 저를 포함한 많은 K-딸들에게 위로가 될 거라 생각합니다.
51년 약국, 2만권 책방 - 한 곳을 지키는 삶의 의미
51년 동안 약국을 지킨 소설 속 엄마의 삶이 제가 가고 싶은 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전 책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행복할 것 같거든요. 그래서 2만권이 넘는 책들과 매일 생활하고, 또 근처에 책방까지 오픈할 생각도 할 수 있었던 듯합니다.
영어학원도 결국 '책'과 '배움'이 있는 공간이잖아요. 하루하루 아이들을 가르치며, 책을 읽히며,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는 일. 엄마의 약국이 "단순한 생계의 현장을 넘어, 한 여성이 쌓아온 세월"이 되듯, 제 학원도 언젠가는 그런 의미 있는 공간이 되길 바랍니다.
파주 북페어에서 뽑은 포춘 쿠키의 문장 "여행의 표지판이 새로운 길을 가리켰다" 대로 일이 펼쳐지는 중입니다~♡ 이 책도 그 여정의 한 표지판이 아닐까 싶어요.
죽음에 대한 생각, 잘 살아내는 법
나이가 들수록 주위에 돌봄이 필요한 분들이 늘어나고, 그분들의 마지막을 지켜보면서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 많아집니다. 죽음에 대한 책들과 그림책을 읽게 되면서 더더욱 그렇습니다.
『잔소리 약국』에서 작가는 "돌봄이 끝나도 삶은 계속되고, 어떤 마음은 여전히 살아 있다"고 말합니다. 이 문장이 주는 위로가 컸어요. 할아버지를 떠나보낸 후, 그리고 지금 엄마와 함께 살면서 느끼는 것들이 결국 삶의 연속성 안에서 의미를 갖는다는 것. 우리는 모두 누군가를 돌보고, 누군가에게 돌봄을 받으며 살아간다는 것.
잔소리는 사랑의 다른 이름
그래서 다짐해봅니다. 잔소리 하는 어른들이 주위에 계시다는 건 복이라고 생각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하루를 잘 살아내야겠다고.
엄마의 잔소리가 때론 성가시고, 제 삶에 대한 간섭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만, 그것도 사랑의 표현이라는 걸 이 책을 읽으며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잔소리는 걱정의 다른 얼굴"이라는 말처럼요.
감사한 하루를 마무리하며
오늘은 퇴근 길에 모듬회와 맥주를 사서 엄마랑 남편과 함께 한잔 하며 감사히 하루를 마무리했습니다. 평범한 일상이지만, 이렇게 함께 앉아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이더라고요.
김혜선 작가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책을 통해 제 삶을 돌아보고, 엄마와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을 주셔서요. 덕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