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1
한승원 지음 / 열림원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남도 벌교에 가면 한광석이 있다.   삼십 년 째 전통염색에 넋이 나간 사람이다.   그가 물들인 쪽빛 모시를 보고 이 시대의 탁월한 시인 김지하와 소설가 조정래조차 마땅한 표현을 찾지 못하고 "아아, 이것을 무어라 해야 좋을까"  가슴을 내리치며 말의 입성을 포기해버렸다.   이 쪽빛을 자연에서 찾아낸 한광석은 '이는 청(靑)도 아니요, 벽(碧)도 아니요, 남(藍)도 아닌 까마득한 색'이란 애매모호한 명칭을 시도한다.     하늘과 같지만 같지 않은 그저 까마득한 색.   한 줄기 느낌을 부여잡고 나는 감히 태허(太虛)라 명명해본다.

태허(一)에 머물러있는(止) 正과 북 치고(鼓) 노래하니 즐겁다는 喜를 이름으로,  추사 김정희는 태어났다.   왕족과 혈의 연이 끊기지 않아서 낯선 이와 인사 때마다 잊지 않고 내뱉는 '월성위궁의 주인'이라는 자부심을 딛고, 그는  당대 석학인 채제공이 부추긴 자신의  천재성을 일찌기 간파하여 그에 상응하는 지독한 탐구의 궤적으로 생을 일관한다.

그는 북학파의 거두인 박제가의 훈도를 귀 활짝 열고 들었다.   북경 사신 행차에 부친 곁을 수행하면서 세상의 광활한 넓이와 깊이를 실감나게 뼛속에 새길 줄도 알았다.   집요하게 파고 또 파서 땅속 깊이 묻힌 원석을 기어이 캐어내고 다시 우러르는 보석으로 세공하여 그것으로 보는 사람의 눈을 부시게 하였다.   그는 의심했고, 경계했다.   주어진 모든 것을 샅샅이 분해하고 추려내어, 그 만의 방식으로 멋스럽게 재활했다.   철저한 고증으로 자신의 집터를 닦고, 짱짱한 범규로 기둥을 세우고, 잡다한 유행을 가리는 지붕을 덮고, 도도한 미학으로 벽을 장식했다.

빈틈없이 갑갑한 방 안에서 그는 오히려 바깥세상을 갑갑해하여, 한껏 비웃어주며 살았다.   윤택하고 분명한 그의 글씨와 엄격하면서도 호사스러운 진한 난의 향기에 취해, 한 겹 창호지 너머의 창밖으로 손조차 내밀려들지 않았다.   뼈를 저리는 북풍한설은 운치있는 풍경화에 불과했고, 사람의 텁텁한 살냄새마저 진한 묵향에 눌리고 가리워졌다.   그의 법도는 치밀하게 날이 섰고, 그 날 선 법도 안에서 그는 스스럼없이 당당했다.

불행이자 다행인 제주도 유배생활이 없었다면 그는 그저 글씨 잘 쓰는 사람, 경학에 밝은 사람으로 역사 속에 끄적끄적 흔적으로 밖에 남지 못했을 것이다.   구 년 동안의 외로움과 억울함, 오롯이 실재하는 육체적, 정신적인 고통,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에 대한 공포는 그토록 고고했던 그의 법도를 해체시켰고, 텅 빈 세상을 그대로 직시할 수 있는 혜안을 주었다.

이제 그의 글씨는 미술평론가 유흥준의 표현처럼 불필요한 기름기를 쫙 빼어 개성적인 기의 압축으로 종이에 새기듯 강단지다.   화려함에서 탈피한 그의 난은 모든 껍데기를 벗어던진 채, 무뚝뚝하고 퉁명스럽다.   여전히 강직하지만 그러나 교만하지 않은 품성으로 허공을 치달려 두터운 땅의 집착에서 벗어나려 한다.

'세한도'에 존재하는 그의 집은 반듯하고 각진 네모 집이 아니다.  바람이 통과하는 헐렁하고 빈틈 많은 집이다.   그 집은 그가 언제고 세상을 버린 후에 들어갈 안식처로서의 설계도였을 것이다.   그 의미심장한 동그라미의 출입문을 지친 몸뚱이가 지나갈 수 있도록 그가 여생을 비우고 다시 비우는 연습으로 일관했을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한동안 잊고 살았던 추사의 모습을 새삼 되돌리게 해준 것은 한승원의 소설이다.   이 소설은 영특한 추사의 어린시절부터 기고만장했던 젊은 시절의 패기와 늘그막의 시난고난한 일정까지 장중하고 깊이있게 그려놓았다.

해붕스님과의 설전에서 무례하도록 따지고 들이대는 젊은 추사의 모습이 잡티 없는 순수로 다가왔고, 그 추사의 옷매듭을 지그시 바라보며 작은 옷매듭 속에 묶여있는 조선 유학자들의 삶을 속으로 웃어주는 해붕스님을 따라 나도 배시시 웃었다.   안하무인인 양 시비하는 추사의 기세를 '반딧불로 수미산을 태우려고 덤벼드는 천둥벌거숭이'쯤으로 취급해버리는 벽파스님의 느긋한 너털웃음이 귓가에 들리는 듯 하여 나도 모르게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심지어 풀죽은 유배길에서조차 추사가 다녀간 흔적은 남겨야 한다며 대둔사 대웅전의 현판을 기어이 제 글씨로 바꾸어 단 그 서슬퍼런 자존감에 일순 경외심마저 느끼게 됐다.   하나의 세계를 토해내듯 형상화한 불이선란의 탄생을 지켜보며 추사의 가슴처럼 내 가슴까지 두근거렸다.

추사와 초의와의 우정은 쓸쓸한 사람에게 마땅한 시샘거리이다.   탐색의 시간을 훌쩍 건너뛰어 첫눈빛 하나만으로 서로를'내 멋진 벗'으로 분류해버리는 그들의 고수적인 교류가 부럽다.   우악스런 수인사가 혈관을 뚫고 피를 나눈 것이었고, 그 피가 어렵고 못날수록 서로에게 더욱 진하게 흐르는 것이 또한 부럽다.   가장 사랑하는 여인의 맨살과 가슴에까지라도 함께 나누면서 얼싸안고 춤을 추고 싶은 벗의 존재가 과연 범인에게는 가능한 것일까?

변덕스러운 차 맛에 '고소함과 배릿함'이란 언어의 테두리를 둘러 주었다.   소설가 한승원 덕분이다.   글씨와 그림으로만 추측했던 뼈대 뿐인 추사의 형상을 이 노작가는 피가 돌고, 살이 붙고, 마마자국 선명한 콧김나는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서게 해주었다.   푹신한 비단신을 미련없이 벗어던지고 거친 돌박길을 끙끙 기어오르는 추사의 고집이 짐짓 외면하고 싶어질 정도로 처연하고 숭고하다.   쓰리고 피흘리는 발바닥을 아프게 쥐어싸며 힘겹게 오르는 그 길이 결국은 그가 그토록 염원하던 해탈의 길임을, 그리하여 홀로 오른 산 정상에 서서 내려다보는 꾸물꾸물한 만물의 세계가 한치 가감없는 허무의 그림자임을.....수굿이 감내하는 추사의 뒷모습이 손에 잡힐 듯 아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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