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해의 마지막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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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최대규 


어디서부터 잘못됐기에 소련군과 미군은 식민지로 고통받았던 땅을 분할 점령했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됐기에 우리 민족은 서로를 죽이게 됐을까?

- 김연수 장편소설. 일곱 해의 마지막. 문학동네. 95~96쪽


역사는 그냥 기록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그게 내 살이고 피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사실이 그렇다. 숨죽이며 그것을 안으로 품고 울먹인다. 

아, 왜? 아, 어째서?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오르지만 그래서 어쩌겠는가? 그런 인격으로 살아내야 하는 것을.

모두가 그렇다.

하늘을 본다. 누구에게도 같은 하늘이다. 하늘을 원망할 수 있을까?

오늘 우리는 왜 이렇게 싸워야 할까?

싸우면서 큰다고?

그러지 않으면 싸움만 남을 것이다.


116쪽 지옥의 탈출구

기행은 낮은 탄식을 내뱉었다. 그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승리만을 봤기 때문이었다.

승리와 패배가 같은 걸 일컫는 다른 말이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117쪽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아무리 혹독한 시절이라도 언젠가는 끝이 납니다.

사전에서 '세상'의 뜻풀이는 이렇게 고쳐야 해요. 영원한 것은 없는 곳이라고."



그들 / 최대규 


조민을 집단 살해하는 그들

어쩌면 그런 방대한 조직과

사회 체계

언론, 사법, 행정, 교육, 종교

모두 합쳐 한 젊은 사람을

집단 린치하고 매장할 수 있을까?

그런 표창장을 왜 만들어서 

사단의 실마리를 주었나?

너희는 깨끗하냐는 말은 사치일 뿐이다.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가들을 

집단 살해하던 그들

북조선에서 반동분자라고

집단 살해하던 그들

반대자들을 빨갱이라고 

집단 살해하던 그들


모두 제 정신으로 그리했다고

자기들은 애국적 존재들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이 나이고 우리들이다.

눈물이 난다.

철천지원수가 바로 이웃이다.

내가 사랑해야할 그들이다.


죽은 짓 / 최대규 


아버지 것인데

함께 나누라 하시는데

나눌수록 

더 많아진다 더 커진다 

더 풍성해진다

하시는데


자기 혼자 독차지하고

창고에 가득 재어두고

평안하게 살겠다

모든 사람들 것 빼앗으려

골몰하누나.


사랑한다 하는데

그것도 자기 만족 위해

모든 걸 자기 중심으로 해석하고

하나님도 자기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주문을 건다.


하나님의 사랑을

물화시키고

우주만물을 지배하려한다.

자기 것이 아닌데


제도 그래요

예도 그래요

모두 그래요

그래서 나도 그래요.


만인의 만인에 대한 싸움

생존경쟁의 싸움터로

만들려고 꾀를 부린다.


아닌데

그게 아닌데 


한 때도 그분의 사랑 아니면

존재할 수 없는데

빛을 어둠으로 만들려고 애쓴다.


그게 아닌데 

창조주가 돌보시는데

생명이 나의 것 아니고

그분의 것인데


이 모든 걸

친히 주장하시는데

눈을 감고

죽은 짓을 다하누나.


이분은 어쩌면 그렇게 글을 쓰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그렇게 구성을 하고 세부 묘사를 하고, 심리 묘사를 하고, 상황 묘사를 하고

그곳에 있는 사람처럼 전지적 작가의 싯점으로 할 수 있는 최고의 기술을 발휘하고 있다.

그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아는 만큼에서 이해하고 작가가 묘사하는 만큼에서 그 안으로 들어가고 나오고 하기를 몇 백번을 한다.

문학과 사상, 정치와 문학, 삶과 죽음, 사회 체제와 삶, 구호와 실질,

교묘한 술수, 겉과 속, 처세와 순진, 계급과 평등, 질서와 자유,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극과 극, 인간의 실상, 삶의 이유, 

온갖 것들이 혼합되어 있어서 가름하기가 쉽지 않다.


마지막 부분에 이르렀다.

문학이 문학 자체의 논리에 의해서 움직이지 못하고, 이념의 종이자 도구가 되어버리고, 선전장이 되어버리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그린다. 그리고 그 속에서 고뇌하는 창작하는 주체의 상황과 심정이 현실처럼 그려져 있다. 작가는 어떻게 그런 상황에 대해 그렇게 세밀하게 묘사하고 전개할 수 있을까? 거기에 아마 가보지도 못했을 터인데 말이다. 그를 만나지도 못했을 것은 뻔하고.


하기야 문학적 상상력을 누가 막을 수 있으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억지로 주장하지 않아도 이 한편의 소설로 그것을 다 말하지는 못하지만 절절하게 읽히는 것들이 있다.

마지막에 이르렀다.


230쪽 기행은 서희를 만났다.

서희는 인민학교 교사이다. 젊다. 

"일없습니다. 강변 버들강아지에 희뿌윰한 물색이 돌아 보기도 좋고, 땅이 물러져 걷기도 좋습니다."

"좋고 또 좋으니 참 좋소. 서희 동무는 마음 쓰는 법을 잘 아니 삼수갑산이라도 걱정이 없겠소."

"저라고 걱정이 왜 없겠습니까? 그렇지만 막상 삼수에 와보니 어떻습니까? 그 정도는 아니지 않습니까?"

"난 평양에 있었어도 삼수갑산을 가고 있었을 테니 거기나 여기나 매한가지요."

기행의 말에 서희가 큭큭대며 웃었다.

"선생님은 매한가지라는 말씀을 참 잘하십니다. 사람이 착하나 악하나 매한가지고, 시를 쓰나 안 쓰나 매한가지고. 그러면서도 지금 몰래 시를 쓰시던 것 아닙니까?"


지금 이 상황이 분명 인위적일 것이다. 온전히 작가의 상상력에 의한 창작일 것이다. 

북한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할 때, 마치 그 속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공산주의의 로보트,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의 졸개를 그냥 인격없는 마르모트 같이 생각된다. 그런데 그 속에서도 아이가 자라고 사람이 산다. 그들의 삶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 거대한 공작같은 정치의 산이 사람을 허깨비로 만들어버린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남한에 사는 사람들도 그들의 눈에는 허깨비와 로보트로 보일 수 있겠다. 그러나 그것이 진실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허깨비같은 정치와 이념의 거푸집을 허물고 사람다운 사회, 사람으로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은 그 사회 속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과업이다. 

한 부분의 삶이 아니라 전체의 삶이다. 하늘을 우러러 보아야할 삶이다. 누구의 종이 아니라 한 주체로서 한 인격으로서 고백하고 실천하고 고백하고 실천하고 살아야할 삶이다. 다른 사람도 그리하다. 그를 존경하고 사랑해야 한다.


232쪽 기행이 어린 학생들의 시를 처음 읽은 것도 그런 밤 중 하나였다. 승냥이떼의 울부짖음에 잠을 설친 기행은 양사를 한 번 둘러본뒤, 분만실에 앉아 칸델라 푸른 불빛에 비춰가며 어린 학생들의 시를 읽었다.

'물싸리 민솜대 바람에 흔들려/새하마노 들판에 여름이 온다'라고 쓴 시는 말맛이 좋았고, ''어머니가/국시를 하는데/햇빛이 동골동골한 기/ 어머니 치마에 앉았다./ 동생이 자꾸 붙잡는다'는 솔직하고 소박해서 좋았다.


기행이 양사에서 양이 새끼를 낳은 것을 받는 일에 자원하는 일이나, 서희가 가져온 아이들의 동시를 살펴보고 평을 적어주는 일이나 통하는 것이 있다. 생명에 대한 흠모, 생명 그 자체에 대한 동경이라고 할까? 아이에 대한 희망을 적어나간다. 그래 북한이나 남한이나 같은 아이이지, 그 아이들이 이제 커서 무엇이 되나? 현실이 어둡다고 빛마저 어둡게 보아서는 안 된다. 어둠을 물리칠 것은 빛 밖에 없다. 빛이 무엇인가?


233쪽 편지에서 병도는 유물사관의 출발점이 사물에 있음을 주장하고 있었다. 관념론자들은 사물 이전의 절대이념에 맞춰 현실을 재구성하지만 실제로 재구성되는 것은 현실이 아니라 그들의 의식이라고 그는 썼다.

햐, 그러고 보니 유물사관의 관념에 사로 잡힌 자들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말이다.

그렇다. 관념에 사로잡혀 자기 관념을 재구성하는 것에 그치고 말지, 현실의 개혁이나 현실의 진실은 남모르게 지나가고 만다. 사실은 정신과 물질이 하나같이 움직이다. 그런 관념을 가지면 물질을 그렇게 이용하게 되고, 물질이 그러하면 그런 관념을 가지고 나아가게 된다. 상호 작용이다. 현실이 그렇다. 현실의 물자체는 그냥 그대로 있지 않는다. 변화가 있다. 그리고 나 자신이 변화되어 가고 있다. 늙어간다. 새로워진다. 자라간다. 이 세상도 변화한다. 그러나 그러나 먼지 같은 세상의 변화이다. 그게 크게 보일 뿐이지, 한 순간이면 다 사라진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239쪽 어린 양들에 대한 사랑

그러나 마지막은 천불로 끝이 난다.

그때까지고 기행은 어디에서도 오지 않고, 어디로도 가지 않는다는 천불에 휩싸여 선 채로 타 오르는 숲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에서 내리는 불, 천불, 그것이 어디에 있는가? 그날이 올까?

벌써 임했는데 그것을 모르고 외면하고 있는 현실은 아닌가? 그 불은 지금 지금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 이런 생각에 생각을 넘어 생각이 지나가고 있다.


<작가의 말>

245쪽 언제부터인가 나는 현실에서 실현되지 못한 일들은 소설이 된다고 믿고 있었다. 소망했으나 이뤄지지 않은 일들, 마지막 순간에 차마 선택하지 못한 일들, 밤이면 두고두고 생각나는 일들은 모두 이야기가 되고 소설이 된다.

이오덕이 엮은 아름다운 시집 [일하는 아이들]은 경상북도 상주군 공검국민학교 2학년 박춘임이 쓴 [햇빛]으로 시작한다. 책에는 이 시가 1958년 12월 21일에 쓰였다고 인쇄돼 있다. 이즈음 북한의 백석은 삼수의 협동조합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소설을 쓰기 시작할 때의 내 나이와 같았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 완전히 실패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의 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동갑의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그저 사랑을 잃고 방황하는 젊은 기행에게는 덕원신학교 학생들의 연주를 들려주고 삼수로 쫓겨난 늙은 기행에게는 상주의 초등학생이 쓴 동시를 읽게 했을 뿐. 

그러므로 이것은 백석이 살아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자, 죽는 순간까지도 그가 마음 속에서 놓지 않았던 소망에 대한 이야기다. 백석은 1996년에 세상을 떠났고, 이제 나는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 된 그를 본다.

2020년 여름 김연수


그렇지. 소설이 소설이다. 그런데 백석이 1996년에 죽었다는 것은 그리고 1962년 이후에 30여년간 무엇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오늘날 그는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남한에서?) 되었다고 한다. 나는 시인이다. 무어 시인이라고 스스로를 규정할 필요는 없다. 그냥 매일 시를 쓴다고 쓰는 사람이다. 시가 무엇인가? 왜 사람들은 시를 쓰고 시를 읽는가? 한때의 낭만을 위해? 아이들은 왜 시를 쓰는가? 인간은 왜 시를 쓰는가? 나는 왜 시를 쓰는가? 어떻게 써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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