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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야 베들레헴의 길고양이 ㅣ 모퉁이책방 (곰곰어린이) 38
데보라 엘리스 지음, 김배경 옮김 / 책속물고기 / 2015년 3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중성의 실루엣 - 최대규
데보라 엘리스의 작품들을 좋아하게 되었다. 우연히 읽게 된 <브레드위너 시리즈> 4권을 한 순간에 다 읽게 되었고, <택시소년>, <택시소년, 지지 않는 잎>도 담박에 읽었다.
그러나 내가 데보라 엘리스에 대해서 잘 아는 것은 아니다. 그녀의 문제 의식과 실천 행동에 대해 어느 정도 인식을 하고 있을 뿐이다.
하여튼 <나는야 베들레헴의 길고양이> 를 회사 서재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는데 이 작품이 데보라 엘리스의 것인지를 몰랐다. 전혀 의식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유심히 보니 표지 왼쪽에 작은 글씨로 데보라 엘리스가 작가임을 적어놓고 있었다.
기대가 되었나? 데보라 엘리스보다는 <나는야 베들레헴의 길고양이> 라는 제목에 호기심이 생겼다. 베들레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상식이 있고,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 대한 낭만적인 인상을 가지고 있는 정도이다. 물론 역사를 통해서 얼마나 많은 굴곡이 그 땅에 있었는지에 대해서 피부로 와닿지 않기에 긴가민가한다.
일단 크리스마스 시즌 쯤에 이 책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니, 당연히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된 어떤 이야기이지 않을까? 정도에서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 내 책상 책꽂이에 꽂아두었던 이 책을 2021년 말에 읽게 되었다.
표지를 유심히 보았어야 했다. 분명 표지에는 군화발과 맨발의 그림이 있다. 한 고양이가 소파 밑에 낯의 눈을 뜨고서 앞을 응시하고 있다. 몇 동의 건물들이 좌우로 자리하고, 표지의 색상은 보라색과 옅은 노란색이다. 보라색이 주조이고, 노란색이 주변을 두르고 있다.
표지 일러스트는 윤주희 씨라고 대한민국 사람이다. 표지만 보아서는 잘 모르겠다. 왜 베들레헴의 고양이를 제목으로 뽑았는지.
차례를 살펴보면 총 25장으로 되어 있다. 허기진 하루/안전한 집/새 학년/길고양이/비밀 통로/숨어 있던 아이/첫 번째 벌칙/뜨개질의 추억/여름의 의미/두 번째 벌칙/훌륭한 연설/시끄러운 시위대/크리스마스/제자리/아이들의 노래/학부모 면담/돌을 던지는 소년/오해/남은 벌칙/총소리/사라진 벌칙/시위대/후회/기막힌 재주/행복한 나
허기진에서 시작하여 행복한 나로 끝났다.
"이 혼란한 세상에 친절을 베푸는 사람들에게"
이중성을 띤 작품이다.
1. 주인공은 클래어이다. 그런데 클래어는 열세 살에 죽었고 고양이로 다시 태어났다. 그러니 13세의 소녀와 그녀의 환생동물인 길고양이, 이중 주인공이 등장한다.
둘이 다르지만 결국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어떤 때는 13세의 소녀의 소리로, 다른 때는 길고양이의 소리로 그러다가 길고양이로 마무리된다. 그러니 제목도 클래어가 아니라 길고양이가 맞다.
2. 베들레헴도 이중적이다.
중동 팔레스틴의 베들레헴과 미국 펜실베니아 주의 베들레헴읻.
클래어는 미국의 베들레헴에서 살았고, 길고양이는 팔레스틴의 베들레헴에 산다.
3. 클래어의 이중성
클래어는 아주 성적도 좋고 공부도 잘하는 모범 학생이지만, 품행이 그렇게 모범적이지 못하고 아주 짖궂은 장난꾸러기이고 그런 점에서는 악한 아이다. 함부로 악하다고 말해서는 안 되지만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데 있어서 그러하다. 선생님에게도 동생에게도 그리고 특별히 장애인에게 보인 특이한 행동은 이건 아니다 싶다.
4. 길고양이의 이중성
클래어의 환생 동물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클래어를 모조리 기억하고 그의 분신이라는 점에서 클래어의 성격을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 길고양이의 그 독특한 야생성, 그리고 표독성이 보인다. 그러나 나름 어린 아이에게 보이는 따뜻함이 의외로 고양이의 부드러운 털 만큼 작품 전체에 살며시 스며든다.
작가가 말하려고 하는 바가 무엇일까?
줄거리를 잘 정리하면 좋겠는데, 중요한 문장 들만 정리해보자.
1. 허기진 하루 (나는 열세 살에 죽었고 고양이로 다시 태어났다. 지금 나는 집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낯선 동네의 길고양이다. 지금 나는 장벽 위에 앉아 있다. 나는 이름 말고는 기억하고 싶은 게 별로 없다. 그러나 그 사건만은 생생히 기억이 난다. 그날 밤, 나는 베들레헴 시내에서 멀지 않은 마을에 있었다.
죽어서 고양이가 됐으니, 한 번 더 죽으면 사람이 될지도 모르지, 나는 마지막까지 젖 먹던 힘을 짜내 군인들 쪽으로 뛰었다. 나는 군인들의 다리 사이를 지나 집 안에서 가장 구석진 소파 밑으로 들어갔다. )
2. 안전한 집(이 작은 집에는 별다른 게 없었다. 벽은 예수님이 태어난 이래 한 번도 칠한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베들레헴 남부, 난민 캠프촌 동쪽, 공터 옆, 언덕 위 집. 이 집이 맞다니까. 여기가 동네를 감시하기에 딱 좋은 곳이야." "만약 우리가 테러리스트를 잡으면, 원래 잡으려 했던 놈을 잡든, 다른 놈을 잡든 높은 사람들은 상관하지 않을 거예요. 누구를 잡아도 우린 영웅이 되는 거죠." "테러리스트를 잡는 게 중요한 게 아니야. 사람들이 안전한 게 중요한 거지."
미칠 노릇이다. 이 불공평한 세상! 열 세살에 죽은 것도 억울한데, 이런 끔찍한 곳에 길고양이로 다시 태어나다니. 보이는 것이라곤 돌멩이뿐이고, 사방에서 총성이 울리고, 날씨는 말도 못 하게 더울 데다 다른 고양이들도 많은 곳에 말이다.)
3. 새 학년(죽은 뒤에도 내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감정이 떠올랐다. 끝까지 날 도와주는 것처럼 굴던 담임 선생님에 대한 미움. 내 죽음에 책임이 있는 사람. 내가 죽은 것은 모두 담임 선생님 잘못이다. )
책임 문제가 나온다. 아이가 13세에 죽었다. 무슨 연유로 그렇게 되었을까? 뒷 부분에 가면 그 이유가 나온다. 결국 담임 선생님과의 관계에서 교통사고로 죽었다. 그런데 그것은 길고양이 클래어의 관점이고, 정확한 이유는 부주의로 말미암은 것이다. 폭력, 교통 사고로 인한 죽음과 베들레헴의 시가지 전투에서 애매하게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의 죽음은 어떤 점에서 서로 연관된다.
길게 뒷 이야기들을 이어서 살펴볼 수도 있겠지만 여기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여야 하겠다.
길고양이가 숨어든 베들레헴의 작은 집에 이스라엘 군인 2명이 들어와서 주변 감시와 테러리스트 검거 및 사살을 위한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 있다. 그런데 그 집에 원래 살고 있는 한 어린아이가 군인 몰래 숨어있다가 발각되었고 군인들은 이 아이를 데리고 부대로 귄환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 아이는 집을 떠나려고 하지 않고 아이의 생존을 확인하기 위해 찾아온 아이의 담임교사와 학급 친구들 사이에서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다가 결국 팔레스틴 소년투사에게 발각되어 일촉즉발의 위기에 처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클래어가 6학년 자기 교실에서 담임 선생님과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신경전으로 인해 소위 찍히는 아이가 되고 엄청난 벌칙을 넘치게 받게 된다. 그 벌칙은 [데시데라타]라는 아주 긴 시를 종이에 써서 제출하는 것이었다. 그 시는 1927년에 맥스 어만이라는 시인이 쓴 시이다.
그런데 왠 일인가? 베들레헴의 작은 집에 숨어있었던 한 어린아이의 입에서 이 시가 계속 흘러나오는 것이다. 위험한 상황에서 아이는 선생님께 배워서 암기한 이 시를 읊조린다. 이것도 이중성이다. 클래어는 억지 벌칙 과제로 이 시를 몇 십번이나 써서 담임 선생님 책상에 제출했고, 이런 과정에서 담임 선생님의 교육 방침에 이의를 제기한 클래어의 부모님에 의해서 학교를 옮기게 되는 마지막 순간에 담임 선생님과 함께 번갈아가며 읽게 된다.
"소란스럽고 바쁜 생활 속에서도 침묵 안에 평화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선생님은 나를 쳐다보며 가만히 기다렸다. 선생님에게 소리를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대신에 나는 그 다음 구절을 읽었다. 읽은 게 아니라 그 구절이 절로 입에서 흘러나왔다.
어쩌다 보니 시가 내 머리 속으로 흘러 들어가 자리를 잡은 것이었다. 그러길 바란 적도 없는데 말이다.
"포기하지 말고 가능한 모든 사람들과 잘 지내십시오."
"어리석고 무지한 사람들의 말에도 귀 기울이십시오. 그들도 할 이야기가 있을 테니까요."
선생님도 시를 읽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자신이 하찮아 보이고 초라한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내가 내뱉었다. 내 목소리가 더 커졌다.
"더 위대하거나 더 못한 사람은 언제나 있기 마련입니다."
"자기 자신의 모습을 찾으십시오."
제로 선생님이 조용히 말했다.
"나이 든 사람의 충고는 겸손히 받아들이고......"
'늙은 여우 같으니.' 라고 생각하며 내가 말했다.
"대개 두려움은 피로와 외로움에서 생깁니다."
".......자신에게 너그러워지십시오."
내가 말했다. 이 망할 놈의 시도 거의 다 끝나 간다. 눈이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당신은 나무나 별들과 마찬가지로 우주의 자녀입니다."
"당신은 이곳에 머무를 권한이 있습니다."
"당신이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이 자존심 싸움에서 선생님이 이기도록 놔둘 순 없었다. 나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고, 다시 그 구절을 외웠다.
"당신이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제로 선생님이 내 대신 나머지 구절을 외웠다.
"우주는 나름의 질서로 펼쳐져 있습니다."
'재수 없는 학교, 재수 없는 시.'
세상은 나름의 질서대로 펼쳐져 있지 않다. 세상은 착한 사람은 총에 맞아 죽고 나 같은 사람은 계속 살아남는 거대하고 끔찍한 쓰레기장이다.
이 학교는 나와 끝이다.
나는 끔찍한 학교와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영원히 벗어나기를 바랐다.
마침내 도로가 나왔다. 나는 걸으면서 미친 듯이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재수 없는 시야.'
나는 차도로 나가면서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재수 없는 시나 가르치는 재수 없는 선생.'
바로 그 순간, 트럭이 날 치고 지나갔다.
아, 클래어의 제로 선생님과 팔레스틴 베들레헴의 어린아이의 선생님도 이중성이다.
발간된 이스라엘 군사, 응징하려는 시위대, 그 중간에 어린아이, 그리고 어린아이의 선생님, 선생님은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고 한다.
기묘한 침묵이 안개처럼 내려앉았다. 군인들이 총을 겨누는게 보였다. 소년들이 돌멩이를 집어 드는 것도 보였다. 눈앞에 지옥이 쫘악 펼쳐지는 것 같았다.
이 위기의 순간에 길고양이 클래어는 그들의 중간 사이로 달려가서 춤추기 시작한다.
왠 고양이가?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 춤을 췄다.
그렇게 이기적이고 나쁜 아이였던 클래어가 자기가 아닌 모든 사람을 위해 죽을 각오로 행위를 한다. 뛰어오르고, 공중제비를 돌았다. 새 잡는 시늉도 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쥐를 이리저리 굴리고 때리는 시늉도 했다. 바닥에 등을 대고 드러누워 앞발을 흔들고, 우쭉대며 걷기도 하고, 리리듬을 타며 숨겨 두었던 춤 실격을 뽐냈다.
전부 입을 다물고 가만히 나를 지켜보았다.
군인들은 총을 내려놓았고 시위대도 돌을 떨어뜨렸다.
모두들 숨을 내쉬었다. 파시마 선생님이 달려와 오마르를 감싸 안았다. 군인들은 시위대에 둘러싸인 아론과 심카를 데리고 갔다. 다들 자신을 안아 주는 품으로 돌아갔다.
우리 할머니가 봤더라면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고 칭찬했을 텐데.
길고양이/비밀 통로/숨어 있던 아이/첫 번째 벌칙/뜨개질의 추억/여름의 의미/두 번째 벌칙/훌륭한 연설/시끄러운 시위대/크리스마스/제자리/아이들의 노래/학부모 면담/돌을 던지는 소년/오해/남은 벌칙/총소리/사라진 벌칙/시위대/후회/기막힌 재주
25장 행복한 나
내가 세계 평화를 이룬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서로를 죽이려는 걸 막았다. 어쨌든 나는 쓸모 있는 고양이라서 기분이 좋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맥락이다.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면, 일이 계속 꼬인다.
내가 선생님을 오해했다는 생각이 든다.
선생님은 날 미워하거나 처음부터 나한테 나쁜 감정이 있던 게 아니었을지 모른다.
세상은 끔찍한 곳이 아니다.
스스로 행복하려고 노력하면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
결말이 행복했다. 그렇다고 길고양이가 다시 사람이 되지는 않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