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체의 연구 - 서양 형이상학의 역사 이화학술총서
한자경 지음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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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 <실체의 연구>, 한자경

 

평소에는 잘 안 보다가 시험을 준비하게 될 때마다 찾게 되는 책들이 있다. 나에게는 한자경 선생님의 책이 그렇다. 석사 입학 준비를 할 때, 특히 칸트와 관련해 답안 작성 연습을 해야 할 때 한자경 선생님의 책들을 많이 찾아봤던 것 같다.

 

이 분은 개념을 정확하고 간결하게 설명하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지 않으신가 싶다. 이 분의 책을 읽다 보면 개념들을 정리하기 위해 적절한 도표와 등식들이 차용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런 걸 보다 보면 미국 혹은 일본 사람들이 쓴 개론서 같은 느낌이 들 때가 많다. 그들 특유의 어떤 자습서 같은 느낌이 든다고 해야 하나.

 

자습서라고 하니까 좀 부정적인 뉘앙스로 들릴 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런 식의 자습서적 정리는 과도한 일반화 혹은 동일시의 오류 가능성을 품고 있다. 서로 다른 맥락에 있는 개념인데 억지로 같은 것으로 만들어버린다든지 등등. 그래서 이런 책을 쓸 때는, 가능한 한 그런 오류를 최소화하면서도 개념을 명확하게 정리하는 능력을 발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실체의 연구>가 그 중간 지점에서 잘 균형을 맞추고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과도한 일반화와 동일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원전도 봐야 하고 다른 디테일한 연구서도 보아야 한다. 그렇지만 그와 동시에 가끔은 이런 자습서적인 정리가 한 번씩은 꼭 필요하지 않나 싶다. 어떤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공부할 때는 큰 눈과 작은 눈이 동시에 필요하다. 가끔씩은 개념에 파고 들어가서 문장 자체를 파고들어가야 하지만, 또 가끔씩은 그 문장들 밖으로, 책 밖으로 나와서 이것들이 무슨 맥락에서 나온 말인지, 철학사적으로는 어떤 맥락에 속하는 것인지 파악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책의 구성을 한 번 살펴보자. 책은 실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플라톤부터 들뢰즈까지 14명의 철학자들을 다룬다. 사실 실체대신 존재론이라는 말을 써도 될 것 같다. 철학자들이 실체에 대해 가졌던 관점을 소개하면서 자연스럽게 그 철학자의 존재론적인 구도를 소개하는 기능도 하기 때문이다.

 

한 철학자 당 적게는 20페이지에서 30페이지까지 배당돼있는데, 결코 긴 분량이라고 볼 수 없다. 전체 페이지수는 참고문헌 목록까지 450페이지 정도 되는데, 상당히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어떻게 500페이지도 안 되는 공간에 14명의 철학자들의 존재론을 담을 수 있나? 사실 말이 안 되는 건데, 한자경 선생님은 그걸 나름의 방식으로 해내고 있다!

 

그 나름의 방식이 얼마나 효과적인지 살펴보기 위해 한 챕터만 예를 들어보자. <칸트> 챕터 같은 경우 워낙 저자분의 주전공분야이기도 하고 하니까 일단 제외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렇다면 저자의 주 전공은 아니면서, 아직은 데이터가 충분히 쌓이지 않은 현대 철학자를 예로 드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래 그럼 <들뢰즈> 파트를 살펴보도록 하자.

 

시중에는 들뢰즈 연구서들이 상당히 많다. 국내 연구자들이 내놓은 것들도 많고, 영미 계통 연구자들이 쓴 책을 한국어로 번역한 책들도 상당히 많다. 근데 그런 책들을 읽다보면 양이 너무 많아서일까, 정작 중요한 이야기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대충 들뢰즈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는 알겠는데, 그 개념들의 위계가 어떻고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지칭하는지와 관련해 상당한 혼돈이 뒤따르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이것이 국내에 들뢰즈가 수용된 맥락을 대변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듣기로 들뢰즈는 (라깡 같은 사람도 마찬가지지만) 정통 형이상학의 맥락에서라기보다는 그것의 외부 맥락에서 수용된 측면이 많단다. 그러다보니 아마도 그를 정신분석학에 반대한 사람, 유목적 리좀을 주창한 사람, 기계 개념을 이야기한 사람 등등으로 수용한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그의 존재론이나 형이상학적인 개념들에 대한 분석이 (다른 철학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좀 덜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추정도 해본다. 그래서인지 나는 들뢰즈와 관련해 영화, 문학, 정신분석, 심지어 과학이나 수학과 관련된 문헌은 상당히 많이 봤음에도 들뢰즈와 칸트, 고대철학, 근대철학의 관계를 다룬 문헌은 그렇게 많이 보지 못했다.

 

사람들의 취향 문제인 탓도 좀 있는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차이와 반복> 이후 들뢰즈가 과타리를 만나면서부터 그의 철학이 제대로 꽃피웠다고 본다. 반면 다른 사람들은 과타리가 들뢰즈를 망쳐놨다고 말한다. 나는 망쳐놨다는 말이 너무 심한 건 아닌가 생각하긴 하지만 그래도 전반적으로는 후자의 입장 쪽을 많이 따르는 편이다.

 

나는 <시네마>, <안티 오이디푸스>, 심지어 마조히즘에 대한 그의 글을 읽으면서도 그 개념적 이해를 위해서 자꾸만 <차이와 반복>으로 돌아오게 되는 내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들뢰즈의 모든 개념적 뿌리가 <차이와 반복>에 가장 잘 담겨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체의 연구>는 이 <차이와 반복>을 주 레퍼런스로 삼고 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쓸데없는 이야기는 다 걷어내고 철학사적 맥락에서의 존재론과 개념에 대한 부분만 다루게 된다. 가령 저자는 그냥 평범하게 들뢰즈는 생성의 철학자요, 차이의 철학자입니다!’를 반복해서 주장하기보다는, 오히려 이념’, ‘강도’, ‘차이소’, ‘주름’, ‘시간’, ‘잠재성’, ‘역량’, ‘일의성같은 개념들을 소개하는데 상당한 지면을 할애한다.

 

특히 라이프니츠와 칸트를 연결시켜 개념을 정리하는 부분은 정말 일품이다. (물론 이런 설명들은 이미 들뢰즈 본인의 책에도 다 나와 있다. 중요한 것은 저자분이 이것들 중 딱 포인트가 될 만한 것들만을 선별해서 짧은 지면에 효과적으로 배분하고 있다는 것이다)

 

개론서들 중에는 가끔 강도를 이야기하면서 칸트의 맥락을 완전히 누락시키는 경우가 있는데, (혹은 그것은 내공이기에 다른 맥락에서 이야기한다고 하거나) 그 맥락이 없고서는 왜 그런 개념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저자는 칸트의 분석론에서 잠시 언급되고 지나간 내포량 개념이 어떻게 강도 개념의 탄생을 이야기했는지 기술한다.

 

차이소혹은 미분적인 것’, 그리고 미세지각을 라이프니츠와의 연관 하에 다루는 부분도 깔끔하다. 들뢰즈가 말하는 dx는 라이프니츠의 미분적인 것, 혹은 모나드와 관련해 어떤 부분에서 비슷하고 어떤 부분에서 다른가? 독자들이 원하는 궁금증은 이런 것인데, 저자는 바로 이 부분을 설명해주려 노력한다. 들뢰즈가 좋아했던 파도소리의 비유를 제시하면서 그 비유 하나로 강도’, ‘무의식’, ‘미세지각’, ‘수동적 종합’, 나아가 명석-혼잡판명-애매의 개념을 명확히 설명하는 부분은 정말 일품이다. 이 모든 개념의 설명이 단 두 세 페이지 안에서 효율적으로 이루어진다.

 

한편으로 저자분은 가려운 부분을 파악하는 능력도 상당하지 않으신가 추정된다. 가령 나는 이념개념을 항상 이해하기 어려워했고, 특히 그것의 세 가지 측면 (미규정성, 규정가능성, 규정성)을 어려워해서 항상 그 부분은 그냥 대충 넘어갔던 적이 많았다. 또한 다양한 주름 개념 (막주름, 안주름, 밖주름) 들을 정확히 다른 개념들에 대응시키지 못해서 혼동을 경험할 때가 많았다. 그런데 한자경 선생님이 딱 그 부분들을 단 몇 페이지만을 할애해 설명해주시는 것이 아닌가! 쓸데 없는 것 다 말고 딱 그 설명만 필요했었는데 말이다.

 

종종 나 자신이 이미 철학사에 어느 정도 통달했고, 해당 철학자에 대해 내공이 쌓였기 때문에 더 이상 개론서 따위는 필요 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나는 이제 그런 기본 개념들에 대해 명석(clear)하고도 판명(distinct)한 지식을 갖추고 있기에, AB가 무엇인지도, AB가 어떻게 다른지도 알고 있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설사 어떤 것을 명석하게 안다고, 그래서 그것에 대한 전체 그림은 명확히 안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 그 안의 세부개념들이 어떻게 서로 distinct하게 나뉘는지는 제대로 모르는 경우가 있다. 반면 세부적인 사항들의 구별에는 통달하고 있지만 그것의 전체 개념에 대해서는 명석하게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들뢰즈의 말마따나 명석한 것은 그 자체로 혼잡하고, 판명한 것은 그 자체로 애매하다. 그래서 때로는 주름을 펼쳐야 할때도, 주름을 다시 접어 넣어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나는 한자경 선생님의 <실체의 연구>가 그런 주름 운동을 도와주는 효과적인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총평을 내려본다. 개론서의 성격이 강하다보니 디테일한 측면에서는 다소 오류가 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숲과 나무 사이의 적절한 균형이 일품이다. 또한 설사 본인 내공이 상당해 지식적인 것을 얻을 수는 없더라도 최소한 어떻게 필요한 말만 하면서 짧은 지면에서 효과적으로 철학적 개념을 소개할 것인가를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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