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에 대하여
그레구아르 들라쿠르 지음, 김수진 옮김 / 문학테라피 / 2017년 3월
평점 :
절판


아르튀르는 무엇을 사랑했으며, 쟈닌과 테레즈는 무엇을 살아가고 있었는지 책은 묻는다. 진짜 사랑, 그리고 진짜 삶에 대한 물음. 비극은 스스로 내포하고 있는 비극성을 무기로, 도저히 없는 삶의 아이러니 속으로 사람들을 몰아넣는다.


아르튀르의 사랑은 진짜 사랑이였나?

흔히들 안에는 영혼이 있다고 말한다. 영혼. 영혼은 순수한 자기로써 어떤 것의 간섭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육체 안에 갇혀있으면서 영혼은 끊임없이 샘솟는 욕망과 결핍과 마주하게 된다. 여기서 영혼은 본질적인 것이 되고, 육체는 이를테면 비본질적인 것이 된다.

그렇다면, 절정의 순간에, 육체 속에 가려져 있는 쟈닌이 아닌, 스칼렛을 외쳐버린 아르튀르는 진짜 사랑을 하지 않은 것이 된다.


테레즈는 진짜 삶을 것인가?

우리는 끊임없이 지나가는 현재를 지나보내며 산다. 현재라는 시간동안 나는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무너지며, 이렇듯 생동하는 현재가 끊어지는 순간, 우리는 삶이 끝났다고 말한다. 현재는 삶의 본질이고, 지나간 순간들은 비본질적인 것이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느와이야의 죽음을 이루고 있는 요소들로 현재의 삶을 채워나갔던 테레즈는 가짜 삶을 것이다.


쟈닌은 진짜 자기를 적이 있었나?

우리는 서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관계 속에서 서로의 정체성이 규정된다. 그렇기에 속에서도 우리는 타인의 부족한 조각이라고 것이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진짜 자기가 된다.

그렇다면, 쟈닌은 아르튀르와의 관계에서마저도 진짜 자기를 살지 못한게 된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아르튀르는 결국 쟈닌 혹은 스칼렛이 찍은 영화들을 보며, 거기서 쟈닌 혹은 스칼렛을 발견한다. 테레즈는 엘리자베스를 보며 느와이야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던 개들 혹은 공포가 만들어 허상을 잠시 잊는다. 쟈닌은 아르튀르와 함께 하면서, 아르튀르의 표면적 사랑 혹은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는다.


어쨌거나 그들은 그것을 느꼈다. 적어도 그들 스스로는 그것을 느꼈다고 느꼈다. 그렇다면 순간, 본질이 스스로를 드러냈던 것은 아니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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