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도마 - 김예지 장편소설
김예지 지음 / 정민미디어 / 2001년 5월
평점 :
품절
<업>이라는 시나리오를 쓰게 되는 연예계 데뷔 8년째인 29세의 여배우 김은규(소진).
은규와 몇년째 파트너로 일하고 있는 37세의 정형민 감독. 수년동안 은규에게 반해 스토커라고 해도 괜찮을 정도의 집착을 보이는 33세의 박재인 기자.
이 책 -도마-는 이 세사람의 시점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주로 말하는 이는 은규인데, 은규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많은 돈이 필요한 걸 깨닫고 쉽게 돈을 벌기위한 일환으로 연예계에 뛰어든다.
어린 시절 생모의 죽음후 아버지와 재혼한 '아버지의 여자'에게 수많은 매질을 받았던 소진과 지운의 이야기. 아버지와 새엄마의 냉대와 매질로 자폐아가 되고, 옥상에서 떨어져 죽은 지운. 소진은 자라서 집을 탈출하고, 대학 입학금과 생활비를 마련하고자 스스로 고급 룸살롱을 찾아 '처녀막 경매'하고...
가학적 폭행을 하던 아버지의 폭력성 유전자가 지운의 죽음으로 표면에 드러나게 된 소진은, 억눌린 살의를 해소하기 위해 의과를 선택한다. 그러던 중 자신의 꿈이 [짐승을 우리에서 사육하는 것]임을 깨달은 소진은 돈을 벌기위해서 연예계로 뛰어든다. 자신의 지성과 모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던 소진(은규)은 승승장구하게 되고, 어느정도의 돈을 마련한 은규는 짐승을 잡아(?)오는데...
이 책의 첫장면은 은규가 지하실에 가두어둔 짐승(새엄마)에게, 어린소진이 당했던 매질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영화배우인 은규가 어린 지운과 소진의 일을 그대로 재현한 시나리오 <업>을 형민과 함께 작업하면서, [아버지의 여자가 소진에게 행했던 행동들을, (업에서) 소진이 재현되는 시기에 맞춰, 그대로 짐승에게 재현시키는]일에 푹 빠진 은규. 그리고 [남자를 강간하고 싶은, 처녀막 경매때부터 능동적으로 주도하는 섹스가 하고싶은, 웬지 그래야 할 것 같은] 느낌을 가지는 은규의 이야기가 -도마-의 주된 줄기이다.
자신의 꿈(짐승을 사육하자)을 이루기 위해 행했던 수많은 계략과 뒷거래 등으로 어리고 순진했던 소진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이제는 타인의 상처에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악마만이 남은 은규와 적당히 타락하고 적당히 순수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어떤 일도 서슴치 않지만 의외로 단순해서 은규에게 선택당한 남자 형민. 그리고 은규에게 첫눈에 빠진, 스토커짓을 서슴치 않는 박재인 기자.
새엄마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짐승으로 사육하지만, 은규속에 남아있던 소진은 아직 살아 있었던 걸까? 짐승을 발톱을 깍아주면서, 발톱과 함께 떨어진 살점에 고통스러워하는 짐승을 보고 -다 널위한 거야. 넌 깨끗한 걸 좋아하잖아-라고 말하던 은규였지만, 자포자기한듯 보이는 짐승의 모습에 기운이 빠지는 건 왜일까.
누구의 잘못인가. 어리고 순진하던 소진이 은규가 된 것은. 그리고 은규가 짐승을 사육하게 된것은. 생모가 살아있을때만 하더라도 좋은 아버지, 좋은 남편이었던 소진의 아버지였지만, 고교동창의 아내였던 새엄마(짐승) 연희와의 재혼후 좋은 아버지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없다. 새엄마와 아이들(소진, 지운)의 불협화음이 못마땅한 아버지는 좋은 아버지와 좋은 남편을 병행할 길이 없자, 좋은 아버지를 버린 것.
-도마-는 아동학대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후반부에 가서는 특정한 가해자가 없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어 아쉬움을 주고 있다. 작가는 인간의 성선설을 믿는 것일까? 아니면 인간은 약한존재이므로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 상황이 그럴수 밖에 없었다'라고 말하는 것일까.
하긴, 작가도 끝을 어떻게 맺어야 할지 고민했을 듯 싶다. 은규가 철저하고 복수하고 또 완벽한 악녀로서의 삶을 살게하기도 마땅치 않고, 그렇다고 '전기줄에 목이 졸리고, 유리창문에 던져지기도 했던'은규가 가해자들과 화해하기도 힘든 일. 끝이 그다지 맘에 들지는 않지만, 은규의 생존방식은 그야말로 서바이벌, 그 자체였음을 새삼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