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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가까워질수록 빛이 줄어들고 어둠은 짙어졌다.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차고 거칠었다. 그러나 거기에도 집들이 있었고, 사람이 살았으며, 불빛이 흐르고 있었다. 집을 옮긴 후 내 몸에도 무늬 하나가 생겼다는 느낌이 들었다.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이 말의 형태로 드러나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게 될 무늬라고 생각하자 걸음이 더 빨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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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마지막 숙제로 남겨놓았던 책들을 새해 들어서야 읽기 시작하는 중이다. 그 중 첫 책. 김이설 <선화>.

김이설의 소설을 읽는 일은 쉽지 않다. 구석으로 바닥으로 내몰려 한치의 희망도 허락되지 않은 생들을 직시해야하는 불편을 감수해야하기 때문이다.

김이설은 매우 건조하고 사무적인 문장으로 소설 속 인물의 불행을 서술하는데, 그러한 문장 때문에 이들의 불행은 소설로 가공된 이의 불행이 아니라 신문과 잡지에 기록된 이웃 혹은 나의 불행으로 쉽게 받아들여진다. 꼼꼼한 취재로만 가능한 일일 터인데....아쉬운 건 그러하다보니 때때로 취재의 흔적까지도 노출되는 경우가 있다. 바로 이전 작품인 <환영>이 그러했다. 사실과 진실 사이에 혹은 현실 사이에 느끼는 어떤 강박이 있는 건 아닐까 싶었는데, <선화>는 그것이 기우였다고 말해준다.

선화라는 이름을 가진, 불행으로 얼룩진 주인공의 차갑고 우울한 일상을 따라가는 이 소설은 전작들과 다르게 전개된다. 여지를, 가능성을 남겨놓았다고나 할까. 섣불리 해피엔딩을 허락하지 않는 작가가 허락한 이 온기가 나는 몹시 반가웠는데, 작가가 자신의 화자들을 박제된 불행의 표본 혹은 마리오네뜨가 아니라 스스로 살아 있는 한 삶으로 한 생으로 비로소 마주하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선화>는 김이설이 이전에 쓴 어느 소설보다 따뜻하고 부드러웠지만.. 이 소설을 쓰는 동안 작가는 어느 때보다 많이 아프고 힘들었겠구나 하는 지레짐작.

한 작가의 전작을 읽다 보면 변화의 조짐이 느껴지는 작품이 있다. 김이설에게는 <선화>가 그런 작품이 아닐까. 알 수는 없지만 어쩐지 다음 소설은 전혀 다른 소설을 만나게 될 것도 같다.

덧말. 이건 정말 선무당 같은 지레짐작인데 뭔가 결함이 있는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 영흠에게서 나는 작가의 모습이 얼핏 보였는데...사실은 그게 아니라며 얼버무리고 감춘 말이 작가의 다음 소설은 아닐까.. 잠깐 그런 생각을 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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