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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러스트
에르난 디아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2월
평점 :
삶을 사는
것과 자기서사를 쓰는 것을 동일시하던 때가 있었다. 죽을 때가 되면 내 삶이 어떤 훌륭한 흐름을 가진
이야기로 완성되어 있을지를 아주 자주 상상했고, 삶에서 마주하는 모든 사건과 인물을 그것이 나의 총체적 서사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할 것인가의 측면에서 해석했다. 가지고 싶은 이야기는 분명했다. 우승하는 이야기, 역경이 있지만 극복하는 이야기, 주인공이 아름답고 순수한 이야기. 당연히 우승해본 적은 별로 없고, 역경이야 틈틈이 있었지만 뒤따르는 극복 서사는 미미했으며, 아름다움이나
순수함과 나는 극단적으로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원하는 서사, 되고
싶은 주인공상이 너무 분명했기 때문에 나는 하루가 다르게 당초 기획에서 멀어지는 내 삶을 다시 쓰고 다시 썼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실제 나 자신과 유리되는 위험한 행동이라는 것을 절감했고, 이야기
쓰기를 그만두려 했으나 이내 인간은 자기서사를 쓰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
인간이 서사 쓰기를 멈출 수 없는 이유는 ‘단 하나의 진실’이라는 절대적인 자리가 비어있기 때문이다. 완전한 객관성이란
존재할 수 없으며, 우리가 그나마 가질 수 있는 것은 각자의 주관적 해석과 서사뿐이다. 진실의 부재 앞에서 모두가 자신의 이야기를 진실의 자리에
올려놓고 싶어한다. 그래서 세상은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서사를 놓고 이것이 진실에 가깝다며 쟁투를
벌이는 장이 된다. 누구의 이야기가 진실의 자리를 점하게 될 것인가,
거기엔 물론 갖은 권력이 작동한다. 소설 『트러스트』는
이 점을 밀도 있게 그려낸다.
이 소설은 언뜻 1920년대 미국 금융계에서 전설적인 부를 쌓은 금융계
인사인 앤드루 베벨의 일대기를 여러 각도에서 조명하는 듯 보인다. 1부에서는 해럴드 배너라는 소설가가, 2부에서는 앤드루 베벨 자신이, 3부에서는 베벨의 자서전을 대신
썼던 대필 작가 아이다 파르텐자가 앤드루 베벨이라는 인물을 각기 다르게 묘사한다. 해럴드 배너는 베벨을
타고난 감각과 판단력으로 월 스트리트를 장악했으나 쇠퇴해가는 아내를 올바르게 지키지 못한 인물로 그린다. 이에
앤드루 베벨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해럴드 배너를 강한 어조로 반박하며 자신의 부의 축적이 국가의 선을 위하는 일이기도 했음을 설파한다. 아이다 파르텐자는 베벨이 어떻게 돈과 권력을 이용하여 해럴드 배너의 서사를 완전히 삭제시켰는지 밝히며, ‘진실’이 베벨의 손에서 얼마나 손쉽게 구부러졌는지 폭로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독자가 궁극적으로 좇고자 하는 진실은 앤드루 베벨이
아니라 그의 아내, 밀드레드 베벨이다. 밀드레드는 앞선 세
이야기에서 베벨의 서사에 간접적으로 동원되는 존재인 동시에 세 명의 작가가 사실상 의도를 가지고 드러내거나 감추고자 하는 인물이다. 해럴드 배너가 결국 나타내고자 했던 진실은 앤드루 베벨이 밀드레드의 죽음에 지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이며, 앤드루 베벨은 이를 반박하기 위해 밀드레드라는 인물을 여성스럽고 온순한 전형적인 상으로 축소한다. (베벨은 현대음악을 좋아했던 밀드레드의 음악 취향까지 바꿀 만큼 적극적이고 주도면밀하다.) 이런 왜곡을 직접 받아쓴 아이다 파르텐자는 책임감을 느끼고 밀드레드 베벨이라는 인물의 실체에 뒤늦게나마
다가가고자 한다.
누가 이야기를 쓰냐에 따라 밀드레드에 대한 독자의 관념은 끊임없이
휘어지고 혼란에 빠진다. 밀드레드는 우아하지만 무언가 세상과 유리되었던 여자이다가, 순종적인 아내였다가, 그보다 훨씬 주체적인 여성이 아니었을까 짐작케 하는 인물로 휙휙 바뀐다. 세 장이 지나고 나서야 밀드레드의 일기장이 등장하고, 독자는 비로소 밀드레드 베벨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그것도 앞선
모든 이야기들을 뒤엎는 비밀과 함께. 그렇게 500페이지에 가까운 ‘밀드레드의
실체 찾기’가 반전과 함께 종결된다.
하지만, 과연 일기는 진실을
담보할까? 밀드레드가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들려준다면, 그것을 우리는 진실에 가장 가까운 서사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해럴드
배너가, 앤드루 베벨이, 아이다 파르텐자가 어떻게 자신만의
믿음과 의도를 진실의 형상을 띈 서사로 구현했는지 떠올리면, 밀드레드 역시 이들과 동일하게 서사를 놓고
첨예하게 다투는 있음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이 자각은 책 바깥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쟁투하는 네 개의 텍스트를 담고 있는 『트러스트』라는
소설을 쓴 작가 에르난 디아스도, 그것을 읽고 실시간으로 자신만의 해석을 창출하고 있는 독자도 서사 전쟁의 참여자다. 밀드레드 베벨은 어떤 인물인가, 라는 질문을 쫓아가던 독자는 개입
없는 서사란, 재구성 없는 진실이란 과연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의 핵심으로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