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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 (무삭제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25
노자 지음, 소준섭 옮김 / 현대지성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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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한자원문과 따로 음을 적어주신 부분이 너무 마음에 들었습니다.
배려심 넘치는 편집으로 인해 정말 읽기 수월합니다.
<군주론>, <유토피아>도 가독성 높은 번역으로 마음에 들었는데,
한문고전도 이렇게 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앞으로 한문고전도 많이 번역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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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6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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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간의 관습과 부조리가 한 인간을 죽이기까지의 과정.
자신 삶의 풍부 이외에는 무관심했을 뿐, ˝희망˝이 없단 이유로 한 인간을 세계는 냉대하고 처참히 죽였다.
정작 스토리의 주인공인 뫼르소를 세계는 소외시켰고 그의 눈부심, 무더위, 현기증을 이해해주지 않았다.
이것은 부조리를 설명한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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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전집 1 - 소크라테스의 변론 / 크리톤 / 파이돈 / 향연, 2017년 개정판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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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개]

나는 현실주의자다.

지금 내 두 눈, 두 귀, 맛, 촉감 등의 신체감각으로 느끼는 즐거움을

내세에 누릴 미래의 즐거움보다 더 우선시하는 사람이다. (사실 난 내세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지금 느끼는 고통으로부터

저 너머의 이데아 세계가 나를 해방시켜줄 거란 희망도 가지고 싶지 않다.

(하물며 소크라테스가 겪은 죽음도 나는 의연하게 그렇게 견디지는 못하리라!)

그럼에도 난 [파이돈]이 정말 위대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사람에겐 연료뿐만이 아닌 어디로 가야할지 알려주는 등대 또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영혼과 몸의 분리적 이해는 납득하기가 어렵다. 왜 이렇게 파이돈에 대한 이중적인 감정이 드는 걸까...


[책 자체에 대한 평가와 감사]

내 감정을 늘어놓기에 앞서, 책 자체에 대한 평가는 매우 만족스럽다. 천병희 선생님께서 옮기신 텍스트는 나같은 범인(凡人)이 읽기에도 편하였고, 삶과 죽음에 대한 고찰적 자세나 비장함과 장엄함이 느껴지게끔 문체를 잘 살려주셨다고 생각되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사족으로, 소크라테스의 변'론'으로 옮겨주신 것도 감사하다.)


[파이돈에 대한 모순적 감정]

[파이돈]에 대해서 이야기를 자세히 하지 않을 수 없다.

[변론]이 '소크라테스 자신의 죽음이 왜 부당한지'를,

[크리톤], [파이돈]은 '왜 그가 죽음을 피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합리적 이유'를 설명해준다고 생각한다.


'왜 죽음이 나쁜 것만은 아닌가?' [파이돈]이 이 의문에 명쾌히 설명해주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파이돈]을 십분 인정하기가 어려운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둘로 나눠서 해석한 세계

플라톤은 서로 대비되는 것들을 통해 세계를 설명했고, 이에 마찬가지로 혼(魂)과 몸을 설명했다. 혼은 보이지 않고, 몸 안에 있을 때는 감각기관의 영향을 받다가 죽음으로써 해방되는 존재인듯 싶다. 그러나 혼(魂)이란 것은 여러 복합적인 경험, 감각, 이성과 감성 등의 복합체임을 부정하기는 나는 어렵다.

이는 심미아스가 지적한 점과 비슷하다.(밑줄긋기 P.181 참조)

(이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자세한 반론은 본 책 P.193, 91e부터,

대충 현세(現世)에 있던 것들의 조화로는, 태어나기 전에 존재했던 혼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논지인듯)

혼은 순수한 객체가 아닌 다양한 복합체라는 사실을.

소크라테스(실은 플라톤)를 다시 반박하자면,

이데아가 여럿 있다면, 태어나기 이전에 존재했던 여러 이데아들이 다시 뭉쳐서 '혼'을 만들어 낼 수 있지는 아닐까?


2. 혼은 과연 '불변'인가

사람의 인생은 짧다. 그렇지만 그 안에서도 무수한 변화가 있기 마련이다.

그중에서도 뚜렷한 변화를 말하자면

희망을 품은 낭만주의자에서 희망을 버린 현실주의자로 변하거나,

순수하고 이상세계를 따르는 자에서 타락하고 본능만을 추구하는 자로 변하는 경우가 되기 마련이다.

이런 과정을 '변모'라 부를 수 있다면 그들은 왜 '변모'한 것일까? 플라톤의 [파이돈]은 이 과정을 설명해주기 어려울 듯 싶다. 철인 또한 '변모'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다. 상대되는 두가지가 서로를 향해 원을 그리듯 나아간다면 '타락', '변모'란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데아가 있음을 알고 있었는데도 반(反) 이데아의 세계로 돌아선다. 끊임없이 갈구했는데도 자신의 노력이나 끈기가 부족했다고 자책하거나 자신의 탐구방법이 적중하지 않았음을 깨달아서 지친 자에겐 무어라고 위로해줄 수 있을 것인가? 


[그럼에도 파이돈이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이유]

그렇지만 [파이돈]은 위대하다. 분명 우리가 힘들고 지쳐서 '타락', '변모'한다해도 본능과 쾌락만 좇으면 망가진다는 것을 [파이돈]은 설명해준다. 범속적이고 쉬운 방법으로는 우리의 실재를 드높여주지 못한다. (예를 들면 '한권으로 읽는', '1분만에 알수있는' 브랜드랄까...) 우리 스스로가 더욱 삶의 이유를 찾고, 삶의 율법을 찾아야 한다. 철인은 그래서 위대하다. 매일 술처먹고 방탕하게 산다해도 현실적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우리가 현재 먹고 살 문제도 결국은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했을 때' 진정으로 풀리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선 '변하고, 눈에 보이고, 일시적인 세계'가 아닌 '변함없는 진리를 향한 추구'야 말로 현재의 문제를 풀어내는 해결책일테니 말이다. 이런 점에서 파이돈은 위대하다! 나의 모순적인 감정은 필시 2가지 때문일 것이다. 나의 철학적 탐구가 어리숙했기 때문이거나, 플라톤의 의견이 틀렸거나.


처음 쓰는 서평이자, 감히 일반인 주제에 [파이돈]을 반박하는 내용을 써보았다. 사실 부끄럽다. 논리적으로 반박하다고 말하기 부끄러울 만큼 짧은 지혜로 [파이돈]에 대한 다소의 반감을 내비친 것은 사실이니 만큼,

어리숙한 독자에 대한 따끔한 질책을 누군가 나에게 해주었으면 한다.

그렇지만, 다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파이돈]은 위대하다.

이를테면 아름다운 것은 추한 것과, 옳은 것은 옳지 못한 것과 대립되는데, 그런 경우는 부지기수일세. 그래서 대립되는 것이 있는 것은 바로 그 대립되는 것에서 생기는 것이 필연적인지 살펴보기로 하자는 말일세. - P142

화음은 보이지 않고 육체적이지 않고 아주 아름다운 것이고 조율된 뤼라 안에서 신적인 것이지만, 뤼라 자체와 그 현들은 몸이고 몸의 형상을 지니며 복합적이고 지상적이고, 죽게 되어 있는 것과 같은 부류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 P181

만약 대립되는 둘 사이의 생성과정이 마치 원을 그리듯 언제나 서로 균형을 이루지 않고, 생성이 한 점에서 그와 대립되는 점을 향해 일직선으로 나아가고 출발점으로 되돌아오거나 굴절되지 않는다면, 종국에는 모든 것이 같은 모습을 띠고 같은 처지가 되어 생성하기를 멈출 것이라는 점을 자네는 알겠는가? -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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