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과 치맥

 

 

또다시...4년 만에 돌아왔다.

전세계 팬들이 기다리고, 팬이 아닐지라고 4년에 한 번, 이 때만큼은 축구에 대한 한시적 애정과 관심이 폭발하는 시간, 월드컵이다.

올해는 세월호 참사의 여파인지, 아니면, 롤러코스터를 타듯 중구난방인 대표팀 성적 때문인지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다. 하긴 죄없는 아이들이 침몰하는 배에 갇혀 수장되는 모습을 속수무책 바라봐야만 했던 우리 어른들에겐 웃고 떠들고 즐길 권리란 애초에 허락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년에 비해 억눌린 분위기이긴하나 여전히 많은 국민들이 새벽잠을 떨치고 일어나 TV 앞에 앉아 숨죽인 응원을 하고 있으니 스포츠의 힘이란 퍽 대단한 것이기는 하다.

이런 월드컵 축구 관전에 치맥이 빠질 수 없다.

..

치킨과 맥주. 한국인이 유별나게 좋아하는 간식(?)이다. 수많은 닭들이 조류독감으로 생매장 당했는데도 약국 만큼이나 많다는 전국의 치킨 집에선 여전히 많은 닭들이 튀겨지고 있다.

이번 브라질 월드컵은 한국 대표팀 경기가 새벽에 이뤄지는 바람에 치맥을 즐기기 힘들다.

치킨집들은 모처럼의 특수를 놓치게 되니 울상이지만, 그 덕에 기름솥에 던져지는 신세를 모면하게 됐으니 닭들에겐 다행이랄까? 그래도 여전히 치킨집마다 북적이긴 하지만...

4년마다 돌아오는 월드컵을 치맥과 함께하며 난 그때마다 떠오르는 기억에 맘 한켠이 싸하다.

 

2002. 한일 월드컵.

우리나라는 당시 축구 강호들을 잇따라 물리치고 4강까지 진출하는 대이변을 일으켰다.

주최국으로서 누린 홈그라운드 잇점을 감안하더라도 놀라운 결과가 아닐 수 없었다.

지금도 TV에서 심심치않게 ‘4강 신화를 이룬 당시 화면을 접할 수 있으니 우리 국민들에게

그날의 기억은 그야말로 영광과 긍지의 역사다.

나에게도 2002년은 특별한 해였다.

그해, 나는 아버지를 잃었다.

5개월 밖에 못살거란 의사의 예언을 지키기로 작정이라도 한 듯 아버진 하루의 에누리도없이

5개월의 대장암 투병을 끝으로 세상과의 연을 끊었다.

당시 난, 이미 두 아이의 엄마였다. 젖먹이 둘째는 당시 세상에 나온지 아버지의 투병일수 만큼 되었었다. 그 애를 낳고 약 일주일 만에 대장 용종제거 수술을 받으러 가신 아버지가 암, 그것도 말기 암이란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두 번째 제왕절개 수술로 출산하였기에 수술후 회복과 아기가 삼칠이 지나야한다는 어른들의 만류로 아버지의 병실을 뒤늦게 찾을 수 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모습은 충격이었다. 다부지고 건장한 체격이었던 사람이 반쪽이 되있었다.

복부엔 기다랗고 붉은 선의 수술자국이 흉측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마치 커다란 곰인형의 배를 가르고 다시 꿰맨 것처럼 실밥자국이 선명했다. 그런 몸으로 아버진 조심스럽게 이제 막 삼칠이 지난 손녀를 안았다. 표정이 없던 얼굴에 잔잔하게 퍼지던 희미한 미소가 지켜보던 내 가슴을 헤집었다.

그때, 우리는 아버지가 받을 충격을 감안해 당분간 암이란 사실을 숨기기로 했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고 손녀를 안고 미소짓는 그 모습이 더 아플 수 밖에 없었다. 대수술을 받은 아버지가 기력을 회복하고 나면 얘기하자고 했지만, 그건 우리의 비겁한 핑계일 뿐.

두 사위는 그렇다치더라도 엄마도, 오빠도 , 동생도 나도 실은 아버지에게 그 참담한 소식을

전할 용기가 없었다.

누구보다 힘세고 건강했던 진짜 사나이였기에 어쩌면 5개월밖에 못산다는 의사의 선고가 무색하게 곧 떨치고 일어날 수도 있다고, 괜한 소리해서 미리부터 삶의 의욕을 꺾어놓지 말자고 우린 서로의 불안을 다독이고 부정했다.

그렇게 환자를 속이고 항암치료를 시작했다. 그러나, 치료는 단 한 번으로 끝나버렸다.

쇠약해진 몸에 독한 항암제가 들어가자 아버진 견디기 힘들어했고, 결국 스스로 치료를 포기

해버렸다. 자신이 암환자도 아닌데 왜 항암제를 맞아야하냐며 항의하는 아버지께 이런저런 말을 꾸며대가며 달래봤지만, 타고난 고집불통인 아버지를 꺾진 못했다. 결국, 퇴원절차를 밟았고, 병원에서도 가망이 없는 환자라 판단했던 건지 굳이 치료를 강요하지도 않았다.

 

퇴원후 한동안 아버진 기력을 회복하고 예전의 모습을 찾아가는 것 같았다.

모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회사에도 간간이 들러 자신이 진행하던 일을 챙길 정도였다.

우리는 다시 희망에 부풀었고 그래서 방심했다.

어느 날, 회사에 들렀다 돌아오는 길에 아버진 동네 내과에 들렀다 자신이 암이란 것을 알아

버렸다. 조심성 없고 배려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던 그 의사는 보호자도없이 홀로 영양주사를

맞기위해 온 아버지를 진찰하고는 당신은 심각한 암환자라고 말해버렸던 것이다.

하긴, 그자는 의사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했을 뿐인지도 몰랐다.

자신이 회복불가능한 암환자라는 사실을 알아버린 아버진 의외로 담담했다.

엄마에게 왜 진작 말하지 않았느냐... 당신 참 나쁘다.’ 이렇게 조용히 한마디 했을 뿐이다.

그 이상하리만치 차분한 그 태도가 우릴 더 불안하게 했다. 우리 가족은 모두 나서서 아버질

위로하고 희망을 북돋으려 애썼다. 그러나 그는 조용히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담담하게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는 듯 싶었던 아버진 그러나 그날 이후, 잠을 이루지 못했다. 곁을 지키던 엄마의 말에 의하면 거의 매일 뜬 눈으로 지새운다했다.

그 영향인지 하루가 다르게 말라갔다. 몸 안의 공기가, 수분이 빠져나가는 듯 점점 메말라갔다. 만지면 바스락하고 부서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의사가 말한 5개월의 시간 후, 아버지는 결국 돌아가셨다.

변변한 치료 한 번 못해보고 무기력하게 우왕좌왕하다 그를 보내야했던 우리는 또 엉겁결에 아버지의 장례를 치렀다. 입관절차를 진행하고 땅속에 아버지의 관을 묻고 그 위에 국화꽃을 던져 넣으면서도 우린 이 모든 상황이 지극히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것이 현실로 다가온 것은 모든 장례절차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서였다.

아버지의 임종과 장례를 치르느라 기진맥진한 우리는 집에 오자마자 모두 죽은 듯이 엎드려

깊은 잠에 빠졌다. 그리고, 밤이 돼서야 겨우 하나 둘 일어났다.

그때부터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안방에 고스란히 남은 그의 흔적을 보고 나서야 우린 이제부터 그의 부재를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체취가 그대로 남아있는 옷들, 화장대에 놓인 남성용 스킨과 로션, 읽던 곳을 표시해둔 성경책, 엄마와 중국여행때 찍은 사진을 넣어둔 핸드폰, 심지어 임종 때 아버지가 누워 계셨던 이부자리까지 그대로였지만, 아버지의 영정사진이 그가 이제 이 세상사람이 아님을 더없이 확실하게 우리에게 일깨워주었다.

나는 다시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은 장례식때와는 조금 다른 눈물인 것만 같았다.

농도가 더 진해졌달까... 더 짜고, 더 썼다.

그러나 그 눈물도 오래가지 않았다.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지못한 우리들은 배가 고팠다.

늦은 시간 식당을 가기도, 그럴만한 기력도 없었던 우린 치킨을 시켜먹기로했다. 누군가 맥주도 시키자해서, 생맥주도 함께 시켰다. 치킨과 맥주가 배달되어 왔고, 우린 모두 둘러앉아 먹었다. 다들 별다른 말한마디 없이 조용히 먹기만 했다.

간만에 맛본 치킨의 맛을 그야말로 기가 막혔다. 투병기간 중 아버진 육식을 금하고 있었기에 우리 모두 그 앞에선 고기를 먹지 않았다. 술은 더더군다나....그래서였을까? 그날의 치맥은 달디달았다.

한참을 먹는데 열중하다 문득 가슴이 뻐근해졌다.

아비를 땅에 묻고 온지 채 24시간도 지나지 않았건만, 나는 지금 뭘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내 슬픔의 유효기간이 이다지도 짧다니...

친척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자자하게 아버지와 난 각별했기에 더욱 더 당황스러웠다.

문상객들 앞에서 흘린 나의 눈물은 모두 거짓이고, 위선이었던 것만 같았다.

황당한 사실은 이런 생각도 배가 어느 정도 차자 겨우 들었다는 것이다.

나란 인간은 짐승과 다를 바 없었다. 참으로 스스로가 혐오스러웠다.

 

다시 두 달쯤 흘렀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이 개막되었고, 우린 모두 친정에 모여 함께 응원을 하기로 했다.

그날도 치맥이 함께했다. 나는 두 달 전 스스로를 혐오했던 기억을 깨끗이 밀어내고 웃고

떠들며 소리지르며 응원했다. 이탈리아와의 16강전에서 안정환이 역전 골든골을 넣었을 때

우린 그야말로 광분했다. 그 모습을 조용히 웃으며 바라보던 엄마의 한마디가 또 한 번 날

부끄럽게 했다.

이렇게 좋은 구경을 느이 아버진 같이 못보고 가버렸구나....’

엄마의 그 말에 우린 모두 겸연쩍어하며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아마도 서로 말을 하진 않았지만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참 스스로가 부끄럽고 어이없다는 생각.

그날, 돌아가신 아버지를 너무도 쉽게 잊어버렸다는 죄책감으로 우린 모두 무거워졌다.

우리 뇌에는 망각 이라는 편리한 기재가 있어 인생의 많은 고비와 시련을 견딜 수 있다고

한다. ‘세월이 약이라는 말은 이런 인간의 까먹는능력에 대한 찬사가 아닐까?

세월이 약이 될 수 있다니....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싶은 아픔도 세월이 흐른 후엔 차츰 아프지않게 되새길수 있게 되고, 결국은 잊혀지고마니 인간의 망각이란 실로 탁월한 신의 처방전이 아닐까싶다.

하지만, 축복으로만 볼 수 없는 것이 또한 이 망각의 능력이다.

모든 기억이 리셋되어 초기화된 인간이 세상에 던져졌을 때를 상상해 본 일이 있다.

나에 대한 정보를 가진 이가 누구인지, 그것이 어떤 것이며 또한 자신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지금 제공받고 있는 정보는 진실인지 거짓인지 조차 구별할 수 있는 기억이 없을 때 느낄 혼돈과 공포는 상상하기 조차 버거운 것이다.

삶이란 기억들의 총합이다.

나이테를 보면 그 나무의 수명과 함께 많은 정보들을 읽어낼 수 있듯이 세월은 우리에게 기억이란 나이테를 켜켜이 새겨놓는다.

 

우리들 인간이란 얼마나 어이없는 존재인가?

너무나 쉽게 까먹어 버림으로써 같은 실수를, 같은 아픔을 되풀이하고, 누군가에겐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입히기도한다.

그러나, 또한 인간은 희한한 존재이다.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희희낙락 살아가다도 어느 날, 뇌의 또다른 능력인 기억이란 놈은 망각이 감추어 버린 아픔을 불현 듯 가슴 밑바닥에서, 머리 뒤쪽 구석 어딘가에서 불쑥 꺼내 눈 앞에 내민다.

이렇게 망각기억이 상호 작용과 반작용을 통해 균형을 이루려 애쓰기에 우리 인간은

비로서 조금은 인간다워질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그리고, 어쩌면 인간은 뇌의 무시무시한 망각능력을 제어하기 위해 문자로, 그림으로 기록이란 걸 하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잊지않기 위해, 잊혀지지않기 위해서 말이다.

기억하고자 노력하는 존재, 그것이 인간이다.

 

지금 난, 망각하지 않기 위해, 인간으로 남기 위해서 이 글을 쓴다.

또다시 아무런 감흥없이 월드컵을 보며 치맥을 먹겠지만, 이젠 아프지 않게 아버지를, 2002년의 여름을 추억할 수 있지만 그래도 완전히 내 아버지를 잊고 싶진 않기에...

기억하시라!

망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당황하지말고 침착하게 끝까지~ !

 

...... ! ^^

 

 

 

2014. 6. 27. 새벽.

 

브라질 월드컵, 한국 : 벨기에 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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