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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제왕의 생애 (반양장)
쑤퉁 지음, 문현선 옮김 / 아고라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타인의 운명을 살아버린 제왕, 그 비극적 생애의 결말.
“나는 문득 인간이란 누구나 이 세상에서 힘들고 고된 여행을 하도록 정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왕 단백은 이 사실을 너무도 늦게 알아버렸다. 하지만 우리는 그의 우둔함을 비난할 수는 없다. 또한 그에게 자책하도록 강요할 수도 없다. 그는 타의해 의해, 정해진 삶을 온전히 살아내지 못한 폐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대섭국의 왕이 될 운명이 아니었다. 대섭국의 일개 왕자로 주변의 풍파를 목도했어야 할 인간이 풍파의 중심에 내몰린 것이었다. 조모 황보부인의 권력욕은 유약했던 어린 아이를 비정하고 잔인하게 만들었다. 국정에 대해서 전연 알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던 어린 단백에게 자유란 살육과 가해에 지나지 않았었기 때문에 이는 당연한 귀결이었다. 왕이라는 지위에 전연 관심이 없었던 어린 아이에게 왕위 계승이라는 타인의 운명이 갑자기 들이닥쳤던 것은 당시 그에게 인생의 불행은 아니었지만, 분명 기쁨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를 본인의 현실로 간주하기 시작한다. 이복형 단문에 대한 열등감과 의구심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이 현실을 유지하기 위해 점점 잔악하고 탐욕스럽게 변신해 갔다. 독화살을 맞지 않기 위해 잠시 연랑에게 자신의 옷과 왕관을 넘겨주었을 때의 그의 심정, 숱한 암살 위협을 겪을수록 강해져 갔던 절대 권력에 대한 집착은 타인의 운명을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하기 시작했다는 안쓰러운 반증이다.
피비린내를 그토록 싫어했던 단백에게 거대한 땅과 수많은 인물들은 감당할 수 없는 인내를 요구했다. 그가 그러한 요구에 맞서 몸소 체득했던 것은 야심과 음모를 어떻게 가려내야 하는지 뿐이었다. 그 결과 그가 그토록 원해 칼끝에서 시작되었던 혜비와의 사랑은 조모, 모친, 왕비와 후궁들의 시기와 질투에 일그러졌다. 단백이라는 유일한 권력을 독점하기 위한 싸움에 그는 결국 굴복한 것이다. 역사상 절대 군주들 중 이러한 고충을 겪지 않았던 이가 과연 몇이나 있을까 마는, 원래 이러한 현실의 주인공인 단문이 아니었던, 유약한 단백에게는 현실의 회피만이 고통을 제거하는 유일한 방책이었다.
원래의 운명을 제자리로 돌릴 수 없다면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이 신에 대한 인간의 미덕이겠지만, 353면에 등장하는 여러 인간들의 삶이란 불행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 단백이 그토록 제왕이 되고자 원했는가? 단문이 일개 왕자에 그치고자 하였는가? 연랑이 내시가 되길 원하였는가? 혜비는 옛 풍모를 잃고 일개 장사치가 되길 원했는가? 아니다. 원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단문은 원래의 운명을 되찾은 지 6년 만에 불에 타 죽었고, 연랑은 창검에 찔려 죽었다. 단문이 원래의 운명을 살았더라면, 연랑은 단백을 위해 팽나라 군사에게 죽지 않았을 것이고, 혜비는 일개 늙은 궁녀가 되었거나, 단문의 후궁이 되었을 것이다. 차라리 화려한 고통이 궁박한 일상이나 비참한 죽음보다 낫지 않았을까?
<제왕의 생애>에서 언급되고 있는 주요 인물들은 죽음을 최후의 운명으로 맞이한다. 다만 혜비와 단백만이 어그러진 운명의 소용돌이에서 튕겨져 나와 유유히 민초의 삶을 살고자 할 뿐이다. 그러나 단백 스스로가 뇌까렸듯, 그는 어딜가도 민초가 될 수 없는 제왕의 운명을 담지한 인간이었기에, 끝내 줄타는 옛 제후라는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조모의 욕심이 한 인간의 생애를 넘어 수많은 인간의 생애를 어긋나게 만들었다는 사실만으로 보았을 때, 이 세상은 불행이 역병처럼 전파되는 곳이라고 밖에 단정 지을 수 없다.
힘들고 고된 현재의 여행이 자신의 것이 아님을 직감한 단백에게 하늘을 부유하는 새들의일생이 참으로 공평하고 자유로운 것일 수밖에 없다. 그것들은 인간이 아니니까. 원하면 저곳으로, 그곳으로 훌쩍 떠나버릴 수 있으니까. 제왕의 생애에서 단백이 경험했던 저곳과 그곳은, 타인이 강요로 경험한 지점들이었을 뿐이니까.
그의 거칠었던 제왕의 생애가 궁극적으로 종결된 시점은 단문과, 연랑이 죽고 혜비가 옛 풍모를 잃었으며, 단백 자신이 세속에서는 결코 제왕의 생애를 마무리 할 수 없음을 직감한 때이다. 남은 절반의 생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순탄했던 인간 단백으로서의 시절이다. 불행이 351면을 빼곡하게 짜깁고 있고, 행복이 단 2면을 소략하게 채우고 있는 생애란, 아직 생을 갈무리 하지 못한 인간들에게는 의구심과 고통을 남기는 기록에 다름 아니다.
불행, 특히 타인의 불행이 행복보다 목도하기에 즐거운 대상이겠지만, 작가의 바람처럼 이러한 삶이 “꿈속의 꿈”이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