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이상은 상상의 영역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창업자정신으로 혁신적인 학교와 진보적인 정치 집단을 조직하고,새로운 형태의 공동체를 만들고, 삶의 질을 높이는 기술을 개발하는데 성공한 실제 사례들이 비록 감질날 정도로 적기는 하지만명히 존재했다. 나는 나 자신이 그런 사람들을 얼마나 깊이 존경하는지 알고 있다. 그들이 이룬 일을 우연히 미디어에서 접하거나,(훨씬 더 나쁜 경우지만) 파티에서 만난 옛 친구에게서 들을 때마다 강렬한 질투의 나락으로 떨어지면서 나는 도대체 뭐하는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들곤 했기 때문이다. 이런 창업자 유형에 속한사람들은 나와는 달리 판매세나 직원 장부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자신의 꿈속으로 달아나버리거나 하지 않았다. 이들은 재정,법, 채용이라는 까다로운 문제도 견디고 살아남았으며, 그 결과 그들의 만개하던 공상은 이익도 남고 의미도 있는 현실적 영역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런 모범적 인물을 단순한 지식인과 비교하는 것은, 레스토랑을 소유한 요리사와 요리책을 쓰는 작가를비교하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공개적으로 이런 진부한 질투를 고백한 것을 변명할 핑계를 찾자면, 이런 맥락에서 내가 겪은 감정이 나 혼자만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그러니까 니체의 말처럼 아직 나 자신이 되지 못한많은 수의 우리)는 혼자 있을 때면 우리가 해보고 싶어하는 여러가지 일을 그려보면서 스스로 세상을 더 낫게 바꿀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곤 한다. 자신에게 더 도취되어 있을 때면,
심지어 가게 처마는 어떤 모양이어야 하고 새로운 서비스의 광고는 어떤 식으로 써야 하는지까지 꼼꼼하게 생각해보기도 한다.
이런 유쾌하고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하는 백일몽은 우리 인격 가운데 한 측면, 그러니까 어린 시절에 부엌 한구석에 식료품점을차려놓고 기뻐하거나 정원에 판지 상자로 호텔을 짓고 만족하던바로 그 측면에서 나오는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우리 안에 깊이자리 잡은 어떤 열망과 통찰에 창업이라는 형식을 부여하고 싶은인간적 충동은 태어날 때부터 평생 동안 끈질기게 지속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언젠가는 내가 직접 만든, 물에 뜨는 신발을 들고 그 박람회장을 다시 찾아가보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