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해 사진에세이 3
박노해 지음 / 느린걸음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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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해 시인의 많은 책을 접하며 그동안 주로 붉은색과 초록색 표지를 봐온 것 같은데, 이번의 노란색 표지는 신선하기도 하고 뭔가 더 애잔하기도 하다. 무엇보다 표지 디자인에서 ''이라는 글자를 길게 끌어 길의 느낌을 표현한 게 맘에 든다. ''이라는 간명한 제목의 의미를 뭔가 더 단호하고 압축적으로 표현한 느낌이랄까.

저자가 서문에서 말한 두 대목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2020년 오늘, 세계가 재난 상황이라 한다. 재난(disaster)의 어원은 '떨어지다'라는 뜻의 dis ''이라는 뜻의 astro가 합쳐진 '별이 떨어진 상태', '별이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저 밤하늘의 별처럼 글썽이며 빛나던 나 자신과의 내적 연결이 끊어지고, 어둠 속 별의 지도와도 같던 성현과 스승과 시인과 탐험가와 수도자와 혁명가들이 떨어져 나간 세계. 그리하여 지구 중력권과 나 자신에게 갇혀버린 상태. 더는 나아갈 길이 없고 희망이 없는 처지가 재난이다."(12~3)

"우리가 세워야 할 것은 계획이 아니다. 먼저 세워야 할 것은 내 삶의 목적지다. '나 어떻게 살아서는 안 되는가'에 대한 확고한 원칙이다. 내가 결코 놓지 말아야 할 나의 첫마음, 그 첫마음의 불빛은 내 생의 최종 목적지에 놓여 나를 비추고 있고, 내가 가야만 할 길을 가리키고 있다. 나머지는 다 '여정의 놀라움' '인연의 신비'에 맡겨두기로 하자. '계획의 틈새' '비움의 여백' 사이로 걸어올 나만의 다른 길을 위해."(15)

글을 읽지 않고 봐도 인상적인 사진들이 있다. 처음에 실린 <하늘까지 이어진 밭>은 가장 압도적인 느낌으로 다가오는 사진이다. 68~69쪽의 <아이들의 나무돌이> 사진은 그 자체로 아주 아름다운 장면이다. 109쪽의 <내 그리운 '바그다드 카페'> 사진은 독자에게 직관적으로 말을 건네는 듯하다.

그리고 글과 함께 보면 더 좋은 사진들이 있다. 48 <길손을 위한 기도>, 77 <혼자 남은 할머니가>, 80 <저마다의 속도로>, 87 <나무의 아이>, 88<사랑의 무게>, 112 <눈물 흐르는 지구의 골목길에서>가 특히 그랬다. 이 외에도 꼽을 수 없이 많다.

이 책은 개인적으로 예전 박노해 시인의 체 게바라의 두 갈래 길에 대한 짧은 시구절이 쓰인 엽서를 본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인지 ''이라는 주제로 엮인 이번 책이 특히 깊이 와 닿았다. '인생이 길'이라는 측면에서도 그렇고, 길 위에서 '다른 존재를 생각하며 함께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예전 책들보다 더 집약적으로 표현된 것 같다. 시인은 내가 아는 그답게 '목적'을 잊지 않는 래디컬한(근본을 헤아리는) 면모를 이 책에서도 보여주고 있었다. 큰 위로가 되었다. 길을 헤매는 많은 어린 양들에게 소중한 북극성처럼 빛나는 책이 되어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책을 덮으면서 생각했다. '인생의 갈래 길 앞에서 고민하는 맑은 눈빛의 소유자를 만난다면, 이 책을 추천하리라.' 그 눈빛의 소유자가 외국인이라도 좋다. 영어 번역이 훌륭하게 되어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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