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회용 사람들
케빈 베일스 지음, 편동원 옮김 / 이소출판사 / 2003년 4월
평점 :
절판


베일스의 <일회용 사람들>은 오늘날 노예노동이 없다는 일반인들의 상식을 노예제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현대적으로 변형되어 존재하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는 책이다. 그 핵심적인 주장은 현대사회 노예가 과거사회의 노예와의 가장 큰 차이는 ‘일회용’이라는 데에 있다. 과거 노예들은 재산과 같이 취급되어 보살핌을 받았는데 오늘날의 노예들은 과거의 노예보다도 못한 존재로써 단기간 노동력을 착취하고 나면 일회용품처럼 폐기된다는 점에서 보다 극악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마찬가지로 보자면 과거의 노예주인들이 훨씬 ‘인간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세계화 시대에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지고 있는 것처럼 종신노예도 사라지고 있다. 이는 필요할 때마다 새로운 노예를 구입하는 것이 훨씬 편리하고 유리하기 때문이다.(46쪽) 저자는 노예제가 현대에까지도 - 특히 저발전국가에서 - 지속되고 있는 원인으로, 인구폭발과 세계화 경제, 영농의 근대화, 부패한 사회질서를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보다 근본적으로는 일자리 부족에 따른 노동력의 과잉공급을 지적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세계화 경제는 수익이 남는 곳이면 어디든, 어떤 조건이든 아랑곳하지 않고 투자하려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지역 사람들의 삶과 조건들에 관심을 가지기를 기대하기가 어렵다. 저발전국가에서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서는 ‘현대판 노예’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권리를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을 때가 와야만 가능할 것이다.

태국의 어린 여성에 대한 성적 착취를 통한 매매춘 사업의 번창은 얼마전까지 우리 나라에서도 종종 들었던 익숙한 이야기였다. 부모가 가난을 이유로 ‘하찮은’ 딸을 팔아버리고 여자 어린이들은 소수 성공하는 경우가 있지만 대부분 몇 년간 성노예 생활을 한 이후에는 매춘업자들에게 버려지고 떠돌다가 죽는다. 모리타니의 경우는 현대판 노예가 아니라 우리에게 익숙한 과거의 노예제와 사실상 다를바 없어 보였다. 즉 베일스가 정의한 ‘일회적’ 관계 보다는 훨씬 나은 ‘온정적’ 관계에 기반을 둔 노예제였다. 인종적인 차이가 노예여부를 결정짓고 있다는 점에서 근대적 인권 혹은 민주주의에 대한 모리타니 자체의 제도의 미성숙에서 기인한 것 같으며, 노예들 역시 이와 같은 노예제가 왜 잘못되었는가에 대한 고민도 없을 뿐 아니라 벗어나기 위한 노력도 거의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브라질 목탄가마의 채무노예는 단순한 속임수에서 비롯되고 있다. 도시에서부터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고립된 작업장에서 단지 빚을 졌다고 말하니까 빚을 갚아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순진한 사람들은 고립된 몇 년간 고립된 힘든 노동을 한 이후에는 버려지고 있다. 파키스탄의 벽돌가마의 사례는 브라질과 거의 유사한데 파키스탄에서는 아동노동이 채무관계를 통해 노예노동으로 동원된다는 점이다.

저자는 자신의 현대판 노예제라는 규정이 과장된 것이 결코 아님을 강조하지만 사실 과장된 주장이라는 느낌이 많이 든다. 마찬가지로 <빈곤의 경제>에서 살펴본 것처럼 저임금 서비스노동의 쳇바퀴에서 사실상 벗어날 수 없는 미국을 위시한 선진국의 서비스노동자들도 인신구속만 없지 모두 ‘현대판 노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실제 브라질, 파키스탄, 모리타니 등의 사례들에서도 타의에 의한 인신구속의 성격은 그리 강하지 않고 이데올로기적 속성이 ‘노예상태’를 유지하게 하는 것처럼 보였다.) 노동시장의 유연화가 급진전되면서 저임금 서비스직종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전무하고 하루하루 살아가기 급급한 비정규노동자들의 양산을 보고 있노라면 취업시장에서 상위부문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노예라고 할 수 있지만 변화된 세계질서와 변화된 노동시장의 조건에서는 새로운 규정이 필요하다. 신규일자리 창출은 줄어들면서 양질의 일자리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노동력의 공급과잉은 노동자들의 처우의 급격한 하락 및 고용불안으로 이어지고 있다. 제조업 성장의 한계와 서비스산업의 팽창 현상에서 노동력 구조변화에 대해 의 매그도프는 “일회용 노동자(disposable work)"라고 새롭게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베일스의 이 책은 다소 저널리즘적인 성격이 강한 글이라 생각되며, 새로운 노예제는 ‘노예제’가 아니라 새롭게 재규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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