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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책읽기 - 김현 일기 1986~1989, 개정판
김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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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론가 김현의 글은 김현다움이랄까, 그 솔직함이 묻어난다. 초판이 나온 지 25년이 되어 가지만, 그의 일기는 지금을 사는 나에게도 울림을 준다. 방대한 독서량과 진솔한 성찰을 일기 형식으로 녹여낸 그의 내면은 진솔하다. 마지막 일기는 그의 죽음이 가까워짐을 암시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그의 짧은 생이 아쉽다. 짧은 생애에도 전집을 남겼으니 꼭 그런것만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몇 가지 감명깊은 일기들 :


'2.14 

자리매김이라는 말이 나는 싫다. 자리매김이란 관계 맺기, 관계 짓기보다 훨씬 고착적이어서, 한번 자리가 맺어지면 변경하기가 힘들다. 변화를 전제하지 않은 자리매김이란 딱지 붙이기에 다름 아니다.


2.25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불안감에서 해방되려 한다. 위대한 선도아는 그것을 이용하여 우선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고 그것을 해소하는 가장 손쉬운 길을 제시한다. 그 길이 축제로 변할 수 있을 때 혁명은 완성된다.


Ne revoyez plus, mon ami

A moi parler: venez y vous,

Car messagiers sont dangereux


사랑하는 사람이여 사람을 보내

말하지 말고, 제발 직접 와주세요

중간에 사람이 끼면 위험하니까요

중세의 연애시의 서두이지만, 이 서두는 하나의 깊은 암시를 간직하고 있다. ...'(본문 27-28페이지)

 

생각해 볼 만한 메시지다. 또 하나:


'3.12

김치수의 지적: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보수주의가 자리 잡고 있는데도 진보주의자인 척할 때는, 사소한 것에 과격해지고, 본질적인 것에는 무관심해 진다." 옳은 말이다.'(본문 274페이지)


주위에 이런 사람 한둘 쯤 있지 않은가? 공감되는 글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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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뿐하게 읽는 나쓰메 소세키
오쿠이즈미 히카루 지음, 지비원 옮김 / 현암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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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읽다가 그만두었는데, 이 책을 읽어보니 언젠가는 다시 도전하리라 라는 생각을 해본다. 다자이 오사무랑 비교가 많이 된다. 두 작가 모두 인간 소통의 불가능성을 탐구했던 것 같다. 도저히 세상과 화해하지 못하는 개인을 다룬다. 다만 이 책의 내용에 언급된 대로 다자이의 세계는 좀 더 마니아적이고 어둡고 더욱 비주류적인 듯 하고, 소세키의 월드는 그래도 좀 대중적이랄까, 그런 면이 있다.

 고양이는 역시 영물인가 싶다. 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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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tracted: The Erosion of Attention and the Coming Dark Age (Hardcover) - The Erosion of Attention and the Coming Dark Age
매기 잭슨 지음 / Prometheus Books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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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중력은 귀한 자산이다. 한가지 문제에 골몰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세상의 이유를 저자는 새로운 기술과 찬란한 미래사회의 이면으로 묘사한다.

 제목에서 보듯이 집중이 필요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묘사하고 있다. 스마트폰, 이메일, 페이스북, 티비, 영화 등 갖가지 볼거리가 가득한 문명에서 책을 읽고 생각한다는 것은 구시대의 유물처럼 여기진다. 그러나 인간 문화는 독서와 사색이 중요한 한 부분을 이루었으며, 그것이 점점 사라지는 것은 인생의 공허함을 역으로 낳을 수 있다고 저자는 묘사하고 있다.

한글판으로도 나왔는데, 영어로 읽어보니 어휘를 다양하게 구사하는 저자를 따라가기 힘든 부분이 있었다. 문맥의 문제라기 보다는 다양한 단어를 구사하고, 묘사적인 문체가 많은 듯 하다. 집중이 힘든 세상에서 한번쯤 생각해 볼 만한 책이다.

정신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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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코는 없다>에서 하나코는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형상으로 나타난다소설 속 남성들의 의식 속에서 드러나는 그녀의 모습은 항상 모임의 자리에 있으되 어떤 발언을 하거나 모임에 어떤 식으로든 참여 또는 간섭을 하는 모습이 아니라그저 그 자리에 계속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일종의 신비감 내지는 위치를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학생 운동권 내지는 학생들의 모임으로 보이는 그 자리에 거의 유일하게 참여하는 여성으로 하나코는 드러난다종종 자신의 여성 친구를 대동하는 경우도 있었지만소설 속 주인공 남자의 기억 속에서 하나코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이러한 의식을 굳이 기원을 찾아 보자면 소위 말하는 인자한 어머니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희생하고 감내하는 어머니는 문명이 진행되어 가부장적 사회가 유지된 이래 계속해서 등장한 주제이고이 소설에서도 다시금 그 패턴이 반복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코는 그저 코가 예쁘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그 별명을 얻었다이름을 짓는다는 행위를 한 공동체 내에서 불리워 지는 명칭 내지는 정체성으로 인식 해본다면그녀는 정체성마저 스스로 결정 내지는 이름 짓지 못하고 남이 지어준 별명을 얻는다가야트리 스피박이 표현한 서발턴을 하나코라는 정체성에 비유해 볼 수 있을 것이다스스로 자신을 규정짓지 못하고타자의 시선 혹은 명명을 통해 정체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러한 소설의 서술은 근대성에 대한 인식과 연결 지어 생각해 볼 수도 있다근대적 세계관이 객관적외부적 결정자를 인간으로 상정하고사물과 인간 주위의 환경을 객관적이고 본질적으로 규명해 내려는 작업의 시도였다고 본다면중세의 종교적 세계관을 흔들고 등장한 서구 합리성의 시대는 르네상스를 거치며 인간의 의지로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 나가고 그를 위해 지식을 얻고 축적해야 한다는 당시로서는 개혁적인 인식에서 비롯된 지적 혁명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적 지식은 프랜시스 베이컨이 주장했듯이 아는 것은 힘’ 즉 지식 권력과 밀접하게 연관이 되었다자연은 개발해야 할 대상이 되었고서구의 바깥은 문명화를 위해 식민지 지배가 필요하다는 패권적 제국주의 인식의 발호 기저에는 이러한 근대적 지식 체계가 그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혁명이 가지고 온 것이 제국주의국가주의와 군사대국주의로의 귀결에 어느정도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근대적 합리성은 과학의 진보를 이끌어 내었지만 그 지식과 진보는 타자를 점령하고 자연을 정복하는 이기적 인간을 하나의 이상적 인간상으로 끌어올려 소위 근대적 주체를 탄생시켰다인류 역사상 과학 기술의 진보가 가장 꽃피웠다고 여겨지는 시절에 등장한 근대적 무기가 전쟁의 기존 중세적 양상을 뛰어넘어 대량살상이 가능한 경지에 이르게 만든 것이다이러한 결과로 인류는 끝내 세계대전이라는 파국을 두 번이나 맞이하게 되었다.

 근대의 모더니즘이 그 한계를 드러내게 되면서 이후 문화적지적 사조에서 소위 포스트 모더니즘이 등장한다그 논의 속에서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근대적 주체는 해체되어 가는 성향이 강하고새로운 주체 내지는 주체 자체를 거부하는 시선들이 등장하게 된다과학에서는 양자역학이나 새로운 형태의 우주론이 그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과학 연구에서 객관성과 정확성을 유지하는 것을 전제로 하여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해석이 남는다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비체(Abjection)’의 개념은주체도 아니고 객체도 아닌어떤 금기 시 되는 것에 대한 문제를 추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코는 없다>에서 드러나는 하나코 또한 그러한 시선 속에서 스스로 얘기할 수 없는 주체들 간의 알력 속 숨겨진 이야기를 드러내고자 한 시도의 하나이지 않을까 한다역사가 기억하는 사람에 의해 구성되고 기억되듯이하나코는 하나코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드러나지 않는 이야기를 전개함으로서 하나의 시선에 대한 알레고리를 만들어 내었다고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화차>에서 등장하는 여성은 신용 자본주의 사회 속 가장 약한 자리에 있다그녀의 무절제한 생활이나 혹은 낭비 등 본인의 잘못이 아니라태어날 때 주어진 부모님사회 구조 등 자신이 어찌 해 볼 수 없는 상태에서 내몰리게 된 모습이다개인의 신용 정보가 등록되고 검색 가능해 지는 사회 구조 속에서는 자신을 숨기고 살아갈 공간이 점점 없어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그녀의 삶에서 자신의 잘못으로 말미암지 않음에도 짊어져야 했던 경제적사회적 제제를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지만과거의 기록은 그녀를 놓지 않고 옥죄인다.

 투명성은 근대 자본주의의 한 특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정보가 공개되고 빅데이터가 수집되는 공간에서 개인이 자신의 비밀을 숨기기가 점점 힘들어 진다신용뿐만 아니라 일거수 일투족즉 사회속에서 자신이 거쳐간 장소구입한 물품 등이 모두 기록으로 처리되어 저장된다신용카드 등 현대 생활이 편리하면 편리해 질수록 이러한 경향은 점점 강화되어 가지 않을까.

 빅데이터의 정치는 새로운 편리함의 등장인가 아니면 거대한 판옵티콘의 등장인가 에 대해서 의견이 엇갈리는 지점일 수 있겠지만, <화차>에서 등장하는 모습은 거대한 감옥을 연상시킨다그녀가 모두 청산했다고 여겼던 과거는 끝내 그녀를 붙잡고 도망치지 못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그러하다고 볼 여지가 있다.

 한병철의 <심리정치>에서 현대 정치의 특성으로 등장한 데이터 물신주의(그는 이것을 다타이즘(Dataism)이라고 부른다)는 데이터가 모든걸 설명하는 투명한 사회가 현대의 특징이며그 속에서 효율성의 추구로 말미암아 인간의 모든 활동이 측정되고 분류된다고 분석하고 있다. 이런 지적과 <화차>의 구성은 맞닿는 부분이 있다.

 한편으로는 주인공이 여성이라는 지점을 짚어 볼 수 있다예컨대 결혼을 통해서 이러한 난국을 타개하고자 한다든지 하는 지점에서, 여성이 스스로 자립하기 어려운 면을 드러내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여성의 사라진다는 주제에서 사회적인 무(인정사회적 사라짐의 대상으로 여성이 등장한다는 것은 사라지는 여성이라는 테마와 연결될 수 있다이렇듯 <하나코는 없다>와 <화차>의 텍스트는 주체 일수도 객체 일수도 없는 자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그리고 그 지점은 여성이라는 정체성과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비체는 위험한 것무언가 어둡고 뜻 모를 공포점액질추방된 것불결불경함 등의 비유로서 나타낸다. 즉 주체와 객체 사이에서 어떻게든 구분되지 못하고 추방당하여 금기로 된 것에 대한 표현을 하고자 한 것이다역사적으로 여성에 대한 반감 내지 혐오는 남성 중심 문화에서 지속적으로 있어왔던 듯하다중세 시대 마녀사냥이 그러했고길고 긴 기독교적 문화의 전통에서(사실 성서에 드러난 예수의 삶은 항상 여성과 동지적 관계로 함께했던 것 같고어린이와 여성을 차별하지 않은 것에도 불구하고여성은 2등 인류로 분류되었다아담의 갈비뼈에서 여성이 태어났다 던지 이러한 논의가 그런 점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심지어 서구의 문화적 흐름 속에서 동양에서라면 요순 시대로 불릴 만큼 칭송 받는고대 민주주의 문화의 꽃으로 여겨지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적 토론과 정치적 논쟁에서도 여성은 그 주체가 되지 못했고 당시 시민으로 분류되지 못한 2등 시민으로 여겨졌다.

 한반도에서 여성의 지위 또한 지난한 변천의 과정을 겪어 왔다고 생각한다조선 전기 즈음만 하더라도 양성의 차별은 크지 않았던 듯자식은 누구나 부모의 제사를 주관할 수 있었고 유산을 물려받는 등의 상황에서 큰 차별이 없었던 분위기였다고 한다그러나 조선시대 유교 사상이 점점 교조적 논리로 되어서 여성의 사회적 차별은 점점 심해졌고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 되었다남존여비삼종지도남아 선호 사상 등과 같은 유교적 악습이 생겨났고그것은 세월이 흘러 강산이 변하고한반도를 할퀴고 지나간 일제 식민지 시대와 근대의 군사독재를 거치면서도또한 근대적 국가가 수립되어 소위 현대사회의 시대로 들어왔다는 요즘에도 명맥이 계속되어 유지된 것이다.

 최근 들어 사회 문제로 부각된 여성에 대한 혐오 논란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런 사회현상의 원인으로는 사회 전반적인 경기 침체나 억압적인 정치 문제 등도 연결되는 점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그러나 본질적으로 여성에 대한 혐오가 존재한 다는 것을 인정한 후에 논의를 계속 하는 것이 사실에 부합하는 방향이라고 본다. 왜 여성이 사회적 약자가 되었는가에 대한 논의에서 출발하면서, 사회에 내재한 구시대적 인습을 재인식하여 타파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서 궁국적으로는 양성이 평등하게 자신의 인격과 재능을 계발할 수 있는 민주사회를 목표로 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참고 문헌>

<하나코는 없다; 외> 최윤 외 지음, 문학사상사, 1994, 1994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화차> 변영주 각본 감독, 미야베 미유키 원작 ; 이선균, 김민희, 조성하 주연 ; 필라멘트 픽처스 제작사; 보임 영화제작소; CJ E&M 공급 및 제작 ; 아트 서비스 판매; 2012

<Powers of Horror-An essay on abjection>, Julia Kristeva, Columbia University Press, 1982

<심리정치 신자유주의의 통치술>, 한병철문학과 지성사,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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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나키스트 인식론자라고 불리는 오스트리아 출신 파울 파이어아벤트는 과학 철학자로 분류되는 듯하다. 하지만 그의 글은 다양한 분야를 아우른다. 고대 희랍 사상가들부터 시작하여 빈 학파라고 불리우는 카를 포퍼나, 경제학자 하이에크와의 만남, 호주와 미국의 대학에 적을 두는 말년까지 다양한 경력을 가진다. 젊은 시절에는 2차 대전이 발발하자 독일 군으로 징집되어 몸에 총상을 입기도 한다.

 그의 철학은 합리주의에 대한 공격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한 흐름의 대표격인 현대 서구중심의 과학을 주 비판대상으로 삼는다. 합리성을 떠받드는 지적 흐름을 비판하면서, 카를 포퍼로 대표되는 합리적 반증주의, 이므레 라카토스의 연구 프로그램 이론 등을 과학, 나아가서 인간의 행복과 지성의 향유를 가로막는 제한이라고 여긴다.

 그러면서 소위 말하는 과학이 후대의 과학철학자들이 말하듯 합리적으로 진행되고 발전해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논박한다. 갈릴레이 갈릴레오의 유명한 망원경 실험방법을 예시로 들기도 하고, 고대 희랍의 지성사를 훑으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대표되는 지적 흐름과는 또 다른 호메로스, 크세노파네스의 글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합리성을 주장하는 과학이 그 자체로서 그전의 합리적이라 여겨지던 인식 체계 내지 방법론을 비판하며 새로운 지평을 열어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지점에서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에 나타난 패러다임의 전환 내지 통약불가능성(Incommensurablity)에 대해 동의하는 듯 하다.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에 난다는 말처럼, 혁명적 전환이 일어나고 전혀 예기치 못한 방법으로의 변화가 일어난 다음에야 그 경과를 복기해 보았을 때 그 방향은 일견 합리적으로 보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한 현대사회의 과학 만능주의를 비판하면서, 과학 또는 전문가 집단의 지식 체계 또는 그것에 종사하는 집단 내의, 그리고 그들 소위 지식인들과 시민들 사이에 민주적 소통이 없어짐을 경계하고 있다. 특히 과거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었던 것처럼, 과학 또한 사회에서 분리되어 민주적 방법에 따라 그 통제가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의 저서 <The tyranny of science>를 번역해 보자면 과학의 독재 내지는 전제 정도 될 것 같다. 서구의 합리성이 어떻게 그 문명권과 다른 사회 공동체를 소위 교육하려고 했는지 비판하면서, 아메리카 인디언이나 소수민족 우대 정책을 통한 대학의 재교육화정책이 과연 적절한 방법인가 에 대해 회의하기도 한다.

 악명높은 그의 명제가 바로 ‘Anything Goes’로 대변되는 지적 태도다. 모든 삶의 방식(tradition이라고 그의 글에서 나타나는데, 전통 내지는 삶의 방식을 뜻한 듯 하다)은 그 나름대로 존재하며, 어떤 것에 우위가 있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나름대로의 독자적 권리를 인정받아야 한다는 주장은 서구 합리적 사고를 신봉하는 사람들에게는 비합리적이라고 들리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그의 주장대로 나에게 비합리적인 것이 타인에게 반드시 비합리적일 이유는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Conquest of Abundance>의 앞부분에는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중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의 이야기가 나온다. 트로이 전쟁 당시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과 같이 트로이 전쟁에 참전했으나, 서로 불화가 생겨 아킬레스가 군대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온다. 아가멤논은 사자를 보내 위로 명목의 보상을 하면서, 전사로서의 명예를 지키라고 요구한다. 아킬레스는 화내고, 분노하더니, 사절로 온 사람들에게 일견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한다. 전사와 비겁한 자 사이에는 명예에 차이가 없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당시 사회적인 명예를 여기는 방식과 맞지 않았고, 당연히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아킬레우스 입장에서는 기존의 통념에 대해 새로운 자세를 취한 것이 된다. 이런 식으로 인식의 전환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간다.

 최근 밀양 송전탑 문제는 이런 과학적 합리주의, 개발을 통한 발전을 옹호하는 국가주의적 입장에 더하여 핵 마피아로 불리는 원전 이익 집단과, 밀양에 뿌리를 박고 살아가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싸움이었다. 원전 사업에 가담하는 사람들은 스스로의 금전적 이익과 직결되기 때문이라고 차치하더라도, 직접 연관되지 않은 사람들의 인식은 그런 투쟁을 지역 이기주의로 보거나, 더 나은 삶을 위한 불가피한 희생 정도로 여길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 땅에서 평생을 살아온 삶을 송두리째 뽑아낼 만한 권리가 누구에게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 과학기술의 발달은 분명 원자력 발전을 가능하게 만들었고, 우리나라는 원자력 의존도가 굉장히 높은 나라라고 한다. 그러나 원자력 발전 또한 완전한 에너지 대안이라고 하기 어렵고, 또 그로 인해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볼 때, 그가 주장했던 과학의 독재에 대해 숙고하지 않을 수 없다는 느낌이다.

참고문헌

<킬링 타임 : 파울 파이어아벤트의 철학적 자서전> 파울 파이어아벤트 지음, 정병훈, 김성이 옮김, 서울 ; 한겨레출판, 2009

<Against Method>, Paul Feyerabend, London;New York : Verso, 2010, 4 ed.

<Conquest of abundance : a tale of abstraction versus the richness of being> Paul Feyerabend, edited by Bert Terpstra, Chicago : University of Chicago Press, c1999

<The tyranny of science>, Paul Feyerabned ; edited, and with an introduction by Eric Oberheim, Cambridge, UK ; Malden, MA : Polity Press, 2011

<방법에의 도전 : 새로운 과학관과 인식론적 아나키즘> 폴 페이어아벤트 지음 ; 정병훈 옮김, 서울 : []겨레, 1987, []겨레 비평총서 ; 19 ([]은 한글고어의 번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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