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코는 없다>에서 하나코는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형상으로 나타난다. 소설 속 남성들의 의식 속에서 드러나는 그녀의 모습은 항상 모임의 자리에 있으되 어떤 발언을 하거나 모임에 어떤 식으로든 참여 또는 간섭을 하는 모습이 아니라, 그저 그 자리에 계속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일종의 신비감 내지는 위치를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학생 운동권 내지는 학생들의 모임으로 보이는 그 자리에 거의 유일하게 참여하는 여성으로 하나코는 드러난다. 종종 자신의 여성 친구를 대동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소설 속 주인공 남자의 기억 속에서 하나코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이러한 의식을 굳이 기원을 찾아 보자면 소위 말하는 ‘인자한 어머니’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희생하고 감내하는 어머니는 문명이 진행되어 가부장적 사회가 유지된 이래 계속해서 등장한 주제이고, 이 소설에서도 다시금 그 패턴이 반복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코는 그저 코가 예쁘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그 별명을 얻었다. 이름을 짓는다는 행위를 한 공동체 내에서 불리워 지는 명칭 내지는 정체성으로 인식 해본다면, 그녀는 정체성마저 스스로 결정 내지는 이름 짓지 못하고 남이 지어준 별명을 얻는다. 가야트리 스피박이 표현한 ‘서발턴’을 하나코라는 정체성에 비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 자신을 규정짓지 못하고, 타자의 시선 혹은 명명을 통해 정체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러한 소설의 서술은 근대성에 대한 인식과 연결 지어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근대적 세계관이 객관적, 외부적 결정자를 인간으로 상정하고, 사물과 인간 주위의 환경을 객관적이고 본질적으로 규명해 내려는 작업의 시도였다고 본다면, 중세의 종교적 세계관을 흔들고 등장한 서구 합리성의 시대는 르네상스를 거치며 인간의 의지로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 나가고 그를 위해 지식을 얻고 축적해야 한다는 당시로서는 개혁적인 인식에서 비롯된 지적 혁명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적 지식은 프랜시스 베이컨이 주장했듯이 ‘아는 것은 힘’ 즉 지식 권력과 밀접하게 연관이 되었다. 자연은 개발해야 할 대상이 되었고, 서구의 바깥은 ‘문명화’를 위해 식민지 지배가 필요하다는 패권적 제국주의 인식의 발호 기저에는 이러한 근대적 지식 체계가 그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혁명이 가지고 온 것이 제국주의, 국가주의와 군사대국주의로의 귀결에 어느정도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근대적 합리성은 과학의 진보를 이끌어 내었지만 그 지식과 진보는 타자를 점령하고 자연을 정복하는 이기적 인간을 하나의 이상적 인간상으로 끌어올려 소위 근대적 주체를 탄생시켰다. 인류 역사상 과학 기술의 진보가 가장 꽃피웠다고 여겨지는 시절에 등장한 근대적 무기가 전쟁의 기존 중세적 양상을 뛰어넘어 대량살상이 가능한 경지에 이르게 만든 것이다. 이러한 결과로 인류는 끝내 세계대전이라는 파국을 두 번이나 맞이하게 되었다.
근대의 모더니즘이 그 한계를 드러내게 되면서 이후 문화적, 지적 사조에서 소위 포스트 모더니즘이 등장한다. 그 논의 속에서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근대적 주체는 해체되어 가는 성향이 강하고, 새로운 주체 내지는 주체 자체를 거부하는 시선들이 등장하게 된다. 과학에서는 양자역학이나 새로운 형태의 우주론이 그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과학 연구에서 객관성과 정확성을 유지하는 것을 전제로 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해석이 남는다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비체(Abjection)’의 개념은, 주체도 아니고 객체도 아닌, 어떤 금기 시 되는 것에 대한 문제를 추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코는 없다>에서 드러나는 하나코 또한 그러한 시선 속에서 스스로 얘기할 수 없는 주체들 간의 알력 속 숨겨진 이야기를 드러내고자 한 시도의 하나이지 않을까 한다. 역사가 기억하는 사람에 의해 구성되고 기억되듯이, 하나코는 하나코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드러나지 않는 이야기를 전개함으로서 하나의 시선에 대한 알레고리를 만들어 내었다고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화차>에서 등장하는 여성은 신용 자본주의 사회 속 가장 약한 자리에 있다. 그녀의 무절제한 생활이나 혹은 낭비 등 본인의 잘못이 아니라, 태어날 때 주어진 부모님, 사회 구조 등 자신이 어찌 해 볼 수 없는 상태에서 내몰리게 된 모습이다. 개인의 신용 정보가 등록되고 검색 가능해 지는 사회 구조 속에서는 자신을 숨기고 살아갈 공간이 점점 없어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삶에서 자신의 잘못으로 말미암지 않음에도 짊어져야 했던 경제적, 사회적 제제를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지만, 과거의 기록은 그녀를 놓지 않고 옥죄인다.
투명성은 근대 자본주의의 한 특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보가 공개되고 빅데이터가 수집되는 공간에서 개인이 자신의 비밀을 숨기기가 점점 힘들어 진다. 신용뿐만 아니라 일거수 일투족, 즉 사회속에서 자신이 거쳐간 장소, 구입한 물품 등이 모두 기록으로 처리되어 저장된다. 신용카드 등 현대 생활이 편리하면 편리해 질수록 이러한 경향은 점점 강화되어 가지 않을까.
빅데이터의 정치는 새로운 편리함의 등장인가 아니면 거대한 판옵티콘의 등장인가 에 대해서 의견이 엇갈리는 지점일 수 있겠지만, <화차>에서 등장하는 모습은 거대한 감옥을 연상시킨다. 그녀가 모두 청산했다고 여겼던 과거는 끝내 그녀를 붙잡고 도망치지 못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그러하다고 볼 여지가 있다.
한병철의 <심리정치>에서 현대 정치의 특성으로 등장한 데이터 물신주의(그는 이것을 다타이즘(Dataism)이라고 부른다)는 데이터가 모든걸 설명하는 투명한 사회가 현대의 특징이며, 그 속에서 효율성의 추구로 말미암아 인간의 모든 활동이 측정되고 분류된다고 분석하고 있다. 이런 지적과 <화차>의 구성은 맞닿는 부분이 있다.
한편으로는 주인공이 여성이라는 지점을 짚어 볼 수 있다. 예컨대 결혼을 통해서 이러한 난국을 타개하고자 한다든지 하는 지점에서, 여성이 스스로 자립하기 어려운 면을 드러내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여성의 사라진다는 주제에서 사회적인 무(無) 인정, 사회적 사라짐의 대상으로 여성이 등장한다는 것은 ‘사라지는 여성’이라는 테마와 연결될 수 있다. 이렇듯 <하나코는 없다>와 <화차>의 텍스트는 주체 일수도 객체 일수도 없는 자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그리고 그 지점은 여성이라는 정체성과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비체’는 위험한 것, 무언가 어둡고 뜻 모를 공포, 점액질, 추방된 것, 불결, 불경함 등의 비유로서 나타낸다. 즉 주체와 객체 사이에서 어떻게든 구분되지 못하고 추방당하여 금기로 된 것에 대한 표현을 하고자 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여성에 대한 반감 내지 혐오는 남성 중심 문화에서 지속적으로 있어왔던 듯하다. 중세 시대 마녀사냥이 그러했고, 길고 긴 기독교적 문화의 전통에서(사실 성서에 드러난 예수의 삶은 항상 여성과 동지적 관계로 함께했던 것 같고, 어린이와 여성을 차별하지 않은 것에도 불구하고) 여성은 2등 인류로 분류되었다. 아담의 갈비뼈에서 여성이 태어났다 던지 이러한 논의가 그런 점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심지어 서구의 문화적 흐름 속에서 동양에서라면 요순 시대로 불릴 만큼 칭송 받는, 고대 민주주의 문화의 꽃으로 여겨지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적 토론과 정치적 논쟁에서도 여성은 그 주체가 되지 못했고 당시 시민으로 분류되지 못한 2등 시민으로 여겨졌다.
한반도에서 여성의 지위 또한 지난한 변천의 과정을 겪어 왔다고 생각한다. 조선 전기 즈음만 하더라도 양성의 차별은 크지 않았던 듯, 자식은 누구나 부모의 제사를 주관할 수 있었고 유산을 물려받는 등의 상황에서 큰 차별이 없었던 분위기였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시대 유교 사상이 점점 교조적 논리로 되어서 여성의 사회적 차별은 점점 심해졌고,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 되었다. 남존여비, 삼종지도, 남아 선호 사상 등과 같은 유교적 악습이 생겨났고, 그것은 세월이 흘러 강산이 변하고, 한반도를 할퀴고 지나간 일제 식민지 시대와 근대의 군사독재를 거치면서도, 또한 근대적 국가가 수립되어 소위 현대사회의 시대로 들어왔다는 요즘에도 명맥이 계속되어 유지된 것이다.
최근 들어 사회 문제로 부각된 여성에 대한 혐오 논란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런 사회현상의 원인으로는 사회 전반적인 경기 침체나 억압적인 정치 문제 등도 연결되는 점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여성에 대한 혐오가 존재한 다는 것을 인정한 후에 논의를 계속 하는 것이 사실에 부합하는 방향이라고 본다. 왜 여성이 사회적 약자가 되었는가에 대한 논의에서 출발하면서, 사회에 내재한 구시대적 인습을 재인식하여 타파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서 궁국적으로는 양성이 평등하게 자신의 인격과 재능을 계발할 수 있는 민주사회를 목표로 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참고 문헌>
<하나코는 없다; 외> 최윤 외 지음, 문학사상사, 1994, 1994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화차> 변영주 각본 감독, 미야베 미유키 원작 ; 이선균, 김민희, 조성하 주연 ; 필라멘트 픽처스 제작사; 보임 영화제작소; CJ E&M 공급 및 제작 ; 아트 서비스 판매; 2012
<Powers of Horror-An essay on abjection>, Julia Kristeva, Columbia University Press, 1982
<심리정치 : 신자유주의의 통치술>, 한병철, 문학과 지성사,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