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 - 방대하지만 단일하지 않은 성폭력의 역사
조애나 버크 지음, 송은주 옮김, 정희진 해제 / 디플롯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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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만 100페이지가 넘는 책이다. 내용의 밀도가 높아 거의 전공서적 수준인데도 짧은 문장 덕에 가독성이 좋아 집중하면 (책 두께에 비해!) 금방 읽을 수 있다. 물론 간혹 치미는 역겨움에 쉬어가며 읽어야 한다. 책 한 권 가격으로 방대한 내용을 알 수 있는 좋은 책이었다.

그동안 철학, 인문학, 의학, 생물학, 국제 정치학이 발달하는 동안 배제되었던 여성 이슈를 제3세계, 소수자, 성폭력이라는 키워드로 재분석한 글이다. 특히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르완다의 대규모 학살과 같이 아프리카 대륙에서 있었던 일이 많이 서술돼 있다. 르완다 남성의 몇 명 중 한 명이 강간을 한 적이 있다더라 등의 문장을 읽으면 나도 모르게 그 나라 대부분의 남성에 대한 이미지를 마치 야만적이고 잠재적 성범죄자인 것처럼 고착화하게 된다. 그러나 바로 뒤따라오는 '백인 세계'의 통계수치를 보면 피차일반이다. 저자는 바로 이런 나같은 사람의 편견에 대해 경고하고 성 문제와 인종 문제를 분리시키기 않은 채 피해를 받아야 했던 사람들의 고통을 상기시켜 준다.

책 제목인 수치는 원래 부끄럽고 떳떳하지 못한 상태를 의미하지만, 그동안 의도적으로 숨기고 모른 척하고 불편해하던 것을 드러내고 가시화했다는 점에서 데이터를 숫자로 정량화한 의미의 수치로도 느껴졌다. 첫번째 챕터에서 수치와 모욕감은 희생자, 생존자의 것이 아니라 가해자의 것이어야 한다는 주장이 인상 깊다.

최근 직장에서 성적인 논란이 있었는데 가해자의 처분이 일주일도 되지 않아 아주 조용하고 빠르게 처리되었다. 물론 피해자가 계속 근무해야 하니 피해자를 배려한 처사였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이렇게 조용히 처리될 수밖에 없었는 이유 중 하나가 성문제는 가해자의 처벌 중심이 아니라 피해자의 피해 사실이 이슈가 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가해자의 처벌을 원하며 내멋대로 공론화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의 해결책으로 책의 마지막 장인 '강간 없는 세계'에서 제시하는 것들이 해답이 되길 바란다. 모든 사람이 성폭력에 관한 인식을 바꾸고, "성폭력이 불가피하지 않다고 인정"할 때 가해자가 부끄러워하는 세상이 올 것이다.

* 서평단에 선정되어 도서를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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