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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각본
김지혜 지음 / 창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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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하신 아버지와 자상하신 어머니 밑에서 1남 1녀의 첫째로 태어나...

자기소개에서 절대 쓰지 말아야 할 첫 문장이란다.

참 익숙하고 뻔해설까,

읽자마자 한 가정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기도 한다.

이처럼 다들 가족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보편적인 이미지가 있을 것이다.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자식은 평균적으로 하나에서 둘, 많으면 셋 정도가 다들 생각하는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이 아닐까?

수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걸 보면, 모두가 살아온 환경과 경험이 비슷한 걸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조금만 더 삶에 집중해 보면 우리 사회에는 훨씬 더 다양한 형태의 가족들이 존재함을 느낄 수 있다. 한 부모가족, 입양가족, 재혼가족, 이주배경 가족, 조손가족, 비혼 가족, 동성 커플 가족, 트랜스젠더 가족 등...

하지만 이들은 국가가 명명한 '건강가족'의 형태가 아니다.

가족의 '변화'나 '다양성'보다는

가족의 '위기'나 해체', 혹은 '붕괴'의 결과로 받아들여진다.

변화와 다양성의 담론.

그리고 위기와 해체의 담론.

각각의 결과는 극명하다. 다양한 삶의 양식을 받아들인다면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며 새로운 제도가 속속들이 만들어질 것이고, 건강가족 이외의 형태를 위기라고 생각한다면 이미 존재하는 가족의 질서에 맞추어 도덕적 훈계에 따라 살아가게 될 것이다. (p188)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

어느 쪽에 더 가까운가?

정상적이고 건강한 가족이라는 것이 대체 뭐길래

이미 특정한 형태와 구성원의 역할이 있는 걸까.

그러고 보면 우리의 가족은 견고한 각본 같다. (p9)

<가족 각본>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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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 - 장류진 소설집
장류진 지음 / 창비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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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요즘 자주 하는 종류의 생각이 있는데 또 그 생각을 하게 된다. 죽고싶다는 생각은 아니었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아니다. 다만, 말하자면 이런 것들.

어떤 착한 사람이 나를 납치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 부드러운 실크 스카프로 내 입에 재갈을 물리고 내 두 팔을 등 뒤에서 묶고 극세사로 만든 보송보송한 안대로 내 눈을 가리고 하얀 봉고차에 태운 다음 내가 모르는 곳, 나를 모르는 곳으로 데려가 줬으면. 그래서 딱 한달만 날 가뒀다가 풀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같은 것들.

혹은 큰 길을 건널 때 작고 귀여운 노란색 폭스바겐 비틀이 나를 경쾌하게 탁, 치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 그래서 살짝만 다쳤으면. 이를테면 팔만 똑, 다리만 똑, 예쁘게 실금만 갔으면. 그래서 다시 예쁘게 붙을 때까지 딱 두달만 깁스하고 누워 있으면서 누가 날 먹여주고 재워주고 닦아줬으면 좋겠다는 생각. (중략) 의식이 아득하게 흐려지면서 그런 생각들에 또다시 사로잡힌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장류진 소설집 [연수]의 <동계올림픽>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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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귀여우면서도 어딘지 살벌한 상상들이 한페이지가 넘어가도록 이어진다. 언젠가 나도 해봤을법한 생각들에 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왠지 조금은 슬프기도 하다.

이정도로 구체화된 상상까진 아니더라도,

결국은 아무런 걱정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쉬고 싶다는 그런 생각.

누구나 해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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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류진 소설집 [연수]에는 공감 포인트가 많다.

그럼에도 내 추측들은 한 끗씩 비껴나간다.

머릿속에 연상될만큼 뚜렷한 캐릭터들,

그리고 종잡을 수 없는 그들의 행보.

내가 다 안다고 생각했던 친구의 모습이 절대 그 친구의 전부가 아닌 것처럼 [연수] 속 인물들도 꼭 그랬던 것 같다.

이 책에서는 이런 소소한 반전들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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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총 여섯작의 단편 소설로 이루어져 있다.

표제작 <연수>는 시원했고,

<펀펀 페스티벌>은 슬펐고,

<라이딩크루>는 웃겼고,

<공모>는 허탈했고,

<동계올림픽>은 먹먹했고,

<미라와 라라>에서는 겁이 났다.

읽다보면 답답한 결말도 위로가 되던 결말도 있었는데 처음 읽었을 때는 웃으며 볼 수 있는 부분들 위주로 기억에 남았었다. 술술 읽히는 문체기에 나 또한 가벼운 마음으로 읽고 싶었던걸까?

2회독을 할 때는 느낌이 또 달랐다. 다시 읽으니 사건보다는 인물들에 조금 더 이입할 수 있었다. 모두가 희망차지만은 않지만,그럼에도 각기 다른 이유로 그리고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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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작인 <연수>는 제목 그대로 '운전연수'와 관련한 이야기이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좋은 학교와 좋은 직장.

순탄한 삶을 살아온 골드미스 '주연'.

그리고 운전 연수 전 혈액형을 묻고,

첫만남엔 남편 아침밥은 차려줬냐 묻는

'일타강사' 운전연수 아주머니.


초반부 둘은 완전히 상극같지만, '엄마와 딸'이라는 관계 속 공통점에 묶이기도 하고, 나중엔 점차 유대가 생기는 모습을 모여준다. 정말 혈액형으로 성격을 파악하려고 했다는 아주머니를 보고도 '주연'은 이제 경계가 아닌 믿음의 눈빛을 주기도 한다.

그리고 초면에 남편의 아침밥 유무를 질문했던 아주머니마저 남편의 아침을 차려주고 나오진 않는다 하자 둘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린다. 그럼 그건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셨던걸까? 아니면 별 생각없는 인사치례? 아무튼간에 경계해야할 무례한 속뜻을 숨긴 질문은 아니었다는 것. 이 대목에서는 왜인지 내가 아는 분들의 목소리로도 들리는 것 같아 나도 둘과 함께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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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합숙 면접의 마지막 밤에 진행되는

협동 장기자랑, "펀펀 페스티벌"

면접자 '지원'은 밴드 보컬을 자원하고

거기서 훤칠하고 잘생긴 '찬휘'를 만난다.

그런데 찬휘는 참.. 이른바 '짜치는' 스타일이었다.

의견조율에 있어서 독단적이고, 자기 중심적이고, 조금만 알아도 다 아는 것처럼 나서는 그런 사람. 의견 충돌로 팀의 분위기가 부산스러울 때마다 '지원'은 열심히 중재하는 역할을 택한다. 일단은 이것도 면접의 한 과정이기에 분명 중재하는 모습은 가산점이 있을거란 기대로.

어찌저찌 연습을 마치고 무대에 올라가기 직전, 찬휘는 지원에게 조언인 듯 훈수를 던진다. 지원에게는 노래부를 때 특정한 부분에서 드러나는 이상한 쪼가 있다며 지금이라도 의식해서 바꿔보라는건데, 무대 직전 이야기하는 심보가 참 투명하다. 그리고 찬휘의 의도대로인지는 모르겠지만 지원은 자신의 '쪼'를 의식하다가 결국 크게 삑사리를 내고 만다. 그리고 이를 수습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은 내 얼굴이 더 뜨거워졌기에 이 대목은 최대한 빠르게 넘어갔다.

면접이 끝난 후에도 찬휘와 지원은 간간히 연락을 이어갔다. 찬휘는 그 회사에 합격해 사내밴드부까지 만들어 활동했고 지원은 그렇지 않다는 차이점이 있지만.

말을 할 때 괜히 영어를 섞어 말을 하는 사람,

가사를 다 몰라도 흥에 취해 부르고 보는 사람,

처음 봤을 때 찬휘는 꼴불견에 가까웠지만

다시 봤을 땐 거침없이 사는 모습이 부럽기도 했다.

나도 언젠가는 망설이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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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집 '천의 얼굴'에서는 많은 것들이 메이드된다.

회식 중 천사장의 손 끝에서는 각자가 원하는 비율대로의 소맥이 만들어지고

미팅 중 천사장의 말 끝에서는 새중앙에너지에게 유리한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착석만 하면 술도 안주도 입맛에 맞춰 척척 세팅이 되는 이 '천의 얼굴'은 새중앙에너지의 고정된 회식 장소였다.


‘수영’에게 거슬리는 것은 조미료 맛 뿐인 안주나 밍밍한 소맥 뿐이 아니었다. 불쌍한 천사장을 위한다는 그들의 태도도, 앞치마 사이로 보이는 천사장의 점도, 천사장의 자연스러운 스킨십도 모두 거슬렸다. 그래서 수영은 팀장직급을 달고서는 더이상 천의 얼굴에 일절 방문하지 않는다. 그렇게 수영의 팀을 서두로 사내 회식 분위기는 점차 변해가고, 확장 이전까지 한 천의 얼굴에는 파리가 날린다. 가끔은 천의얼굴에도 좀 가라는 김이사의 말에도 현팀장은 꿋꿋하다.

그리고 현팀장은 현부장이, 김이사는 김상무가 됐을 때 쯤 수영은 김상무의 천의 얼굴에 대한 애정을 다시금 생각해본다.


간만에 들른 천사장은 수영이 사원 시절 골뱅이소면에서 소면만 골라먹던걸 지켜보고 있었고, 여전히 기억했다.

그 많은 사원들의 이름을 외우고, 취향을 파악한다는 것은 보통 정성이 들어가는 일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젊은 수영에게 거슬리던 천사장의 가슴 사이 점은 어느새부터인지 앞치마로 가려져 보이지도 않았고, 천사장의 건강을 걱정하던 김상무의 말들과 함께 다니던 헬스장에 조건 없이 삼천만원을 후원한 할머니의 일이 겹쳐지며 사람에게는 응당 '그런 마음'이 있을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아, 혹시? 하는 내 마음들을 서너번이나 꺾어내는 소설 <공모>.

기대와 실망과 체념을 반복하는 동안 원래 다들 이렇게 살아가는 건가 싶었다.

천사장의 공모와 김상무의 공모와 세원의 공모.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꾸려질 공모들까지..

모든 공모들이 다 다른 뜻을 띄지만 이런 걸 다 의심하며 살긴 너무 피곤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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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따릉이를 타는 두 남자.

이 모습을 본다면, 그 누구든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 <라이딩크루>는 크루장인 '나'와 새 부원 '도헌'이 왜 위와 같은 짓을 하게 되었는지의 그 과정을 그린다.


남둘 여둘, 그리고 크루장 하나.

평화로운 라이딩 크루를 운영 중이었던 '나'에게 '허니우드'라는 이름으로 추가 크루원을 희망한다는 메세지가 온다. 긴생머리만 보고 크루 영입을 허가했건만, 새로 온 크루원은 긴생머리의 남자 '최도헌'이었다. 도헌,, 헌,, '허니우드'.

심지어 도헌은 키도 180이 넘는 훤칠한 미남이었고 허리까지 기른 생머리는 단번에 잘라 소아암 환자들에게 기부하는 멋진 남자였기에 여자 크루원들의 관심은 모두 그에게 쏠린다. 심지어는 재치와 센스까지 겸비한 도헌에게 딱 하나의 콤플렉스는 길쭉한 몸에 비해 어색하리만큼 짧뚱한 팔, 그 정도? 내게는 너무 완벽한 도헌의 모습도 왜인지 그의 팔만큼이나 어색하게 느껴졌다.

작가님은 도헌을 '로봇 물고기'라고 생각하고 소설을 쓰셨다는데, 어색하게 느낀 이유가 이 때문인가 싶기도 하다.


사건은 힘들기로 소문이 난 '아이유 고개'에서 벌어진다.

페이스 좋게 잘 달리던 도헌의 자전거가 사고로 넘어진다.

엎어진 도헌과 엎어진 자전거,

그리고 일정한 속도로 돌아가는 도헌의 자전거 바퀴.

도헌은 모터를 단 채로 자전거를 타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발끈한 크루장이 따지자 도헌은 나름대로 이목요연하게 자기 주장을 펼치고, 이를 듣고 있노라면 전부 맞는 말인가 싶기도 하다. 과열되는 분위기 속에서 나온 해결안이 다시 한번 정정당당한 승부를 펼치자는 것이었고, 이 정당한 대결 사이 불공평한 것들을 걷어내는 과정으로 탄생한 것이 바로 첫 장면의 홀딱 벗은 따릉이 승부였다.



크루장의 찌질함에 경악하다가도 다른 부원들이나 도헌도 다를바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또 나는 이들과 얼마나 다른가 싶기도 하고. 그럼에도 성찰보단 킥킥대며 읽을 수 있는 소설이어서 좋았다.

+ 자전거는 엎어졌지만, 여전히 돌아가는 바퀴의 모습 하나로 소설을 쓰신 작가님이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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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연휴임에도 와이비씨 인턴기자 '선진'은 채용을 앞두고 현장 조사를 나왔다.

장소는 쇼트트랙의 미래라 불리는 '백현호' 선수의 자택. 그 안은 이미 일찍이 도착한 대형 방송국들의 기자들로 꽉 차있었다. 그 안에서 작은 방송국 소속 선진은 다른 기자들과 호환되지 않는 육미리 카메라를 들고 나타난,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었다.


인터뷰 중 아무리 무시를 당해도 선진은 꼿꼿하다.

오히려 그들이 하는 소리를 '방백'으로 여기며 제 할 일을 했다.

이렇게 의연한 대처가 가능했던건 선진이 자라온 가정환경의 영향이 적지 않을 것이다. 선진에게는 첫 월급을 고대로 드리고도 새 핸드폰과 발렌타인 삼십년산 양주를 원하는 엄마 아빠와 입시와 직결된 중요한 숙제를 선진에게 그대로 맡기는 동생이 있다. 선진의 부모님은 연극의 주인공 역할인 요리사를 맡아 멋지게 해낸 선진에게 왜 공주 역을 하지 않았냐며 아쉬워하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선진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건 아니다.

백현호 선수의 어머니는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온 기자님들이 불편할까 좁은 집을 죄송해하지만, 백현호 선수의 아버지는 가족들이 잘만 살아오던 집을 남들 앞에서 반복해 깎아내리는 어머니의 행동을 못마땅해한다. 둘 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한 행동이었다고 생각한다.

사랑은 참 다양하게 표현된다지만 그 표현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의미가 덜해질지도 모른다. 서로의 뜻을 곧바로 알아차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서로에게 조금만 더 솔직하고 직관적으로 사랑을 표현하기만 한다면 다툼과 설움이 훨씬 줄어 들 수 있지 않을까?


선진에게는 원하던, 그녀가 그려오던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이 있었다.

잘난 나를 원하는 가족들보다는 내가 따뜻하게 쉬길 원하며 새 이불을 깔고, 전기장판을 미리 틀어두는 정도의 사랑.

조금 쉬고 싶을 때는 누군가 날 친절히 납치해줬으면, 팔이나 다리에 실금이라도 갔으면 하던 상상을 하던 선진이 사랑에 대해서는 그저 보송하고 따뜻한 이부자리, 이를 준비하는 부모님의 친절한 마음만을 상상한다. 나는 그게 조금 슬펐다.

성냥팔이 소녀 같은 선진에게 마지막만큼은 가장 두껍고 따뜻한 옷을 입혀주고 싶었다는 작가님 말씀을 듣고서야 나도 선진이가 따뜻하게 겨울을 잘 나길 바라고 있었다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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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과 신입생,

서른 둘 박미라.


'미라'언니는 온갖 스마트기기들을 펼쳐두고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바쁘게 필기하는 스마트한 듯, 안 스마트한 사람이다.

필명도 꼭 그렇다. 본명 박미라, 필명은 LALA☆ (별까지 미라 언니가 붙인거다 내가 멋대로 붙인 거 아님) 자신의 본명이 소설가로는 어울리지 않아 본인이 직접 지었다는데, 그렇다면 라라는 소설가와 어울리는 이름인가?

자신의 비싼 차에도 ' LALA☆' 스티커를 떡하니 붙이고 다니는 재력가 미라 언니. 원래는 IT 계열에서 일을 하다가 이른 나이에 성공 후 꿈을 찾아 국문과로 왔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이런 미라 언니를 두고 국문과에서는 '친미라파'와 '반미라파'로 나뉘지만 그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생각이 하나 있다.

미라 언니는 소설을 못 쓴다.


미라 언니는 소설 창작회에서 깍두기 같은 존재였다. 언니의 소설이라면 읽지 않고 합평에 오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그래도 언니는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어느덧 방학이 되고 하나 둘 방학 계획을 세우기 시작할 때, 미라 언니는 그리스로 한달간 "창작여행"을 떠나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그 창작 여행에서 [모두에게 별 하나]라는 중편 소설을 완성시켜오고, 그 소설은 교수와 학생들 모두를 놀래킨다.


세상에는 남의 성공을 100% 축하의 마음으로만 대할 수 있는 착한 사람들이 많을까?

종종 축하 속에 나 자신에 대한 불만과 성찰을 동봉하는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좋은 소설을 쓰는 것에 성공한 미라 언니를 보며 주인공이 느끼는 부러움, 시샘, 동경들이 내게도 전해지는 것 같았다.


소설은 뭣도 아니라는 '나'에게 미라 언니는 이게 참 귀하고, 중요하다고 했다. '나'처럼.

언니에게 '나'와 '소설'이 귀하고 중요하단걸까, '내'가 소설을 귀하게 생각하듯 언니도 마찬가지란걸까. 일단 나는 둘 다 일거란 생각을 하며 읽었다.

아무 기능 없이 존재하는 것이 그 존재의 전부인, 존재성 존재라는 것이 소설에서 언급된다. 나는 사람도 이 '존재성 존재'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있는걸로도 충분히 존재가 입증되는 것, 아무런 입출력 장치가 없는 것, 그게 전부인 것. 우리는 이런 존재일 뿐인데 자꾸만 그 기능을 입증하려 해서 힘들어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미라 언니 처럼 사랑하는 것을 향해 달려도, 설사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본인을 너무 자책하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닐까?

그냥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

나를 증명하려 하기에 너무 급급하지 않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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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잘잘 : 일 잘하고 잘 사는 삶의 기술
김명남 외 지음 / 창비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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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는 '식사의 안부'가 인사로 통용된다. "밥은 먹었어?"가 대표적인 예시겠지. 그리고 책의 57p에 따르면, 독일에서는 우리의 "밥 먹었어?"와 같은 인사로 "오늘 정리 잘 돼가?"가 있다고 한다. 자리의 정리, 일의 정리.. 무엇이든 간에 정리의 진행 상황이야 종종 물을 수 있다지만 '하루의 정리'가 잘 되어가냐는 말은 생소하게 다가왔다. 동시에 타인의 안부를 묻는 문장들 중 가장 다정한 물음이라고도 생각했다.

오늘 내 하루는 어떤가. 장마가 시작된 탓에 오늘 하루 운동은 건너뛰었지만 대신 밀린 잠을 보충했다. 개운한 몸으로 출근한 후에는 비 덕분에 한산한 가게에서 혼자 잡다한 생각들을 정리할 수 있었다. 또 한 번에 몰아잡아 복잡했던 약속들을 차근차근 배열해 한층 스케줄이 정돈됐다. 당장 남은 것은 마감과 퇴근과 집에서 해야 할 약간의 일. 별다를 거 없이 평범한 하루라고 생각했는데 나름 차곡히 잘 정리되고 있었다.

이렇게 일상 속 뿌듯함을 찾는 것. 이 뿌듯한 감정들이 모여 언젠가는 크나큰 성취가 될 거라 믿는다.


이런 성취와 일과 삶을 담은 일잘잘.

이 책에서는 '일잘'이 되기 위한 팁들을 무려 9인의 직업인들에게 들어볼 수 있었다.


책의 목차를 보면 알 수 있 듯 직업군이 꽤 다양하다.


그래서 책 한 번에 다 읽기 힘들어하는 사람들도 일단 관심 있는 분야부터 쏙쏙 골라 읽기 좋을 것 같다.


나 또한 소설류는 한 번에 읽길 선호하는 반면 에세이나 자기개발서들은 그렇지 않은 편인데, 일잘잘은 확실히 파트마다 호흡도 짧고 말하는 바들도 각자 확실해서 부담스럽지 않게 잘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일잘잘은 뉴스레터들을 엮어 발행한 책이다.

언니단 뉴스레터는 나도 20살 때부터 구독해두어서 발행된 책을 보고 반가움을 느꼈다.

그리고 책을 읽기 전 생각한 것은 정보만 쏙쏙 얻어가는 나의 모습이었는데,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느낀 것은 오히려 공감이었다. 마치 9명의 작가님들과 대화를 해본 것 같은 기분. 그래서 많은 생각을 하면서 읽을 수 있었다.


종류가 뭐든 간에 뭔가를 잘하는 사람은 부럽기 마련인데, 제목처럼 일도, 삶도 '잘'하는 법이 정말 책에 담겨 있었다. 또 정답을 던져주기보다 자신의 생각을 하게끔 만드는 점이 좋았던 것 같다.

앞으로 잘 살기 위해서 오늘도 잘 살아봐야지..

다들 잘 살아봅시다




그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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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 곁에서
신경숙 지음 / 창비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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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매순간 헤어지며 살아간다.

하지만 매번 처음 겪는 일처럼 휘둘리고(p17) 쓸모없는 이야기일지라도 단절되지 않고 지속되기를 바라며(p123) 작별에 슬퍼한다.

하지만 우리가 유의해야 하는 것은 작별이란 영영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작별은 지금은 헤어지지만 언제고 다시 만날 수 있는 어떤 온기를 품고 있다고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온전하게 작별할 수 있다.

떠올리면 아프지 않고, 미소띠는 그것이 '온전한 작별'이 아닐지 이야기하는 신경숙 작가님의 <작별 곁에서>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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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 곁에서>는 세 편의 이야기가 묶인 연작 소설이었다.

「봉인된 시간」, 「배에 실린 것을 강은 알지 못한다」, 「작별 곁에서」 세편 모두 서간체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가님은 이 세통의 편지가 나를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주길 바래주셨는데, 요즘 내가 원하는 곳은 과연 어딜까하는 생각과 함께 완독 쯤엔 그 답을 찾길 원하며 한장 한장 책을 넘겼다.

소설에서는 모국을 향한 그리움을 담담하게 전하기도, 투병 중인 친구에게 간절히 재회를 호소하기도. 또 죽음이라는 영원한 작별을 견뎌내며 생의 의지를 되찾기도 한다.

처음에는 세 이야기가 다 분리된 이야기인 줄 알있는데 읽다보니 「봉인된 시간」의 수신자가 「배에 실린 것을 강은 알지 못한다」, 「작별 곁에서」 의 발신자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심지어 표제작인 「작별 곁에서」는 8년만에 작성된 「봉인된 시간」의 답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연쇄되는 이야기들로 각각 다 다른 종류의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는 점이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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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며 평소보다 꽤 많은 밑줄을 그었다.

편지이면서도 일기같기도 한 책 속의 문장들이 소설이라는 생각을 잊게 한 것 같다. 정말 남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듯한 기분으로 책에 즐거이 집중할 수 있었다.

1. 봉인된 시간

1979년 외교관으로 파견된 남편을 따라 두 아들과 함께 미국으로 향한 화자가 한해 동안 뉴욕에서 함께하며 위로가 되어준 '선생'에게 쓰는 편지. 10ㆍ26사건과 12ㆍ12사태등의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다뤘지만 미국에 파견된 엘리트 장교의 아내였다가 불법 체류자로 전락해 평생 고국을 그리워하는 여인, 모국어를 잃게 된 시인의 삶을 보다 자세히 느낄 수 있다.

모국과 작별한 시인의 편지는 먹먹하면서도 담담했다.

나를 잊었나? (p10)

선생이 전화를 받지 않을 뿐인데 서울 전체가 내 전화를 거부하는 것 같은 이 마음은 또 뭔지 모르겠네. (p12)

지난 일년동안 내가 들은 선생의 말은 내가 떠나온 서울의 말이었고 선생과의 만남은 내가 떠나온 서울과의 만남이었네. 중략. 선생은 곧 내게 서울이었다네. (p18)

나를 잊었느냐고 물어서 미안하네. 중략. 그런데도 왜 매번 나는 이렇게 처음 겪는 일처럼 휘둘릴까.(p17)

뉴욕을 떠나 한국으로 돌아간 후 전혀 연락이 닿질 않는 선생에게 시인은 편지로 작별의 그리움을 전한다.

내가 다시 고국땅을 밟게 될 때는 사회 분위기가 달라져 있기를 바랐지.환한 것을 수상하게 여기지 않고 그대로 환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내 나라가 되어 있기를. (p21)

이 말에 베이고 찔리고 잘려도 좋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티브이 앞에 오래 서 있었네. (p64)

우리 가족은 낯선 땅에서 난파선처럼 흔들렸네. (p43)

편지를 읽다보면 먼 나라에 정착해야 했던 시인의 삶과 슬픔이 구체적으로 그려진다. 그 중에서도 나는 늙은 독수리 이야기가 인상 깊었다. 시인에게는 뉴욕에 적응한 자신이 새로 태어난 독수리일까, 아니면 이제 새 날개가 돋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걸까. 그녀의 편지를 생각하면 이미 서너번은 부리와 날개를 갈아치웠을 수도 있겠지라는 생각도 든다.



2. 배에 실린 것을 강은 알지 못한다

독일에서 암투병 중인 친구에게 작별인사의 메일을 받은 화자가 그 친구에게 전하는 편지. '나'를 만나주지 않는 친구에게 보내는 간절함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이 화자는 「봉인된 시간」 속 선생이다.

몇년만에 느낀 감정인지 모른다. 누군가에게 내가 그쪽으로 가겠다는 말을 다시 하게 될줄을 몰랐다. 너에게서는 답신이 없었다. (p85)

암에 걸렸다고 생각하자. 내가 암에 걸렸다고. 그러니 견디자고. 견딜수밖에 없다고. 그런데...... 네가 암이라고? 나는 눈을 부릅떴다. (p90)

내가 안다고 해서 달라질게 없다고 해도 나는 알고 싶어, 라고 썼다. 아무 말도 안하면, 아무것도 모르니까, 있는 그대로 알려줘, 라고. 말하는 순간이라도 네가 나은 기분이 들 수 있을지 모르니 말을 해, 라고 했다. (p93)

언제 우리가 다시 볼 수 있을까 싶지만 널 보는 언젠가,라는 시간이 이유가 되어 오늘 잘 지낼 수 있겠지. 오늘도 기분 좋게 하루라는 강을 건너자. / 나는 그때 너에게 갈 수 있는 기회를 또 한번 놓쳤다. '언제 우리가 다시 볼 수 있을까 싶지만' 이라고 쓴 것은 보고 싶다는 다른 말이었을텐데. (p96)

친구를 만나기 위해 유럽까지 간 '나'. 하지만 친구는 만남을 원하지 않는다. 친구가 '나'에게 전한 널 보는 언젠가,라는 시간이 이유가 되어 오늘 잘 지낼 수 있겠지. 오늘도 기분 좋게 하루라는 강을 건너자 라는 문장이 너무 좋아서 천천히 몇번을 다시 읽어봤다.


배가 싣고 있는 것을 강은 알지 못한다, 라는 작품 제목에 비쳐져 그 의미를 곰곰이 되새기게 했다. 우리는 강 위에 떠 있는 수많의 배중의 하나에 불과하겠지. 강만이 아니라 너의 배에 무엇이 실렸는지 나는 모른다. 나의 배에 무엇이 실렸는지 너도 다 알진 못하겠지. 그래도 너는 베를린에서 나는 제주에서 같은 작가의 작품을 보며 동시에 서로를 생각했다. (p121)

내가 내 말의 구체적인 현장에 살지 않는다면 나에겐 계속 회상이나 추억 같은 것을 갉아먹고 살아가는 시간만 남은걸까?(p99)

나는 계속해서 너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은 욕망으로, 걷던 걸음을 멈추고, 읽던 책을 덮고, 웃던 웃음을 거둔다. - 쓸모없는 이야기일지라도 너와 나 사이에 단절되지 않고 계속 지속되기를 나는 바라지. (p123)

침대에 엎드린 채 오후 세시쯤에 너에게 전화를 건다. 통화가 되어 내가 갈까? 물으면 너는 오지 않는 게 좋겠다고 말한다. 나는 또 내일 전화할게,하고 전화를 끊는다. (p130)

모든 것이 잊히고 사라진 후에도 남는 것이 있을까? 그렇게 남은 것들은 무엇이 될까? (p142)

배에 어떤 것이 실려 있다하더라도 강물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저 목적지까지 배를 흘려보낼 뿐이다. '나'와 '친구'도 서로를 완벽히 알고 있지는 않지만, 또 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없을 수도 있지만 다른 곳에서 같은 작품을 보며 동시에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를 깨달은 '나'는 친구와의 온전한 작별을 준비한다.


3. 작별 곁에서

소중한 이들과의 작별 후 몇년간 은둔했던 화자가 <봉인된 시간>의 발신자에게 쓰는 답장. 편지를 쓰기 위해 작업실로 사용했던 제주의 집을 다시 찾고 집주인 '유정'과 함께 제주의 이곳저곳을 돌아보며 4.3의 아픈 흔적을 마주한다.

이제는 선생님이 저를 잊으셨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p167)

인생에서 처음 해보는 일이 사라지는 날은 없겠지요. - 그러니까 인간은 태어나서 죽기 일초 전까지 처음 앞에 서게 되는거네요. 선생님.(p168)

그때요, 선생님의 곁을 떠나 친구 곁을 떠나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또 집을 떠날 준비를 하느라 미처 선생님께 연락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p175)

말이란 묘한 힘이 있어서 계속 그 말을 주문처럼 되뇌면 그 말 비슷하게 된다고 했던 사람이 선생님이셨던가요? (p190)

화자는 친구와 딸의 죽음 이후 쉽사리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유정씨에게는 그런 구석이 있어요. 그런 구석이라고 밖에 설명이 안되는 그런 구석. (p214)

선생님께 내 딸의 얘기를 할수가 없어 팔년을 답장을 쓰지 못했는데 잘 모르는 유정씨에게 얘기하는 날이 오기도 할까요? (p232)

그리고 그런 구석을 가진 '유정'은 그녀에게 힘을 준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선한 마음의 이웃, 유정은 '나'에게 부서진 사람의 과거를 보듬으며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여전히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런 구석. '나'는 '유정'과 있을 때 쓰다듬을 받는 기분을 느낀다고 한다. 작가님은 누구나 유정 같은 사람 한 명쯤 곁에 두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야기를 쓰셨다고 하는데, 정말 세상에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좋은 기운을 전해주는 사람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유정과 대화 하며 생의 의지를 되찾는 화자의 모습이 남의 모습 같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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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이렇다 할 작별을 경험해본 적이 없으니 떠나보내는 것에 미숙할 내가 예상도 간다. 친구의 죽음이 나오는 「배에 실린 것을 강은 알지 못한다」는 괜한 상상을 덧붙히게 되어 벌써 많이 슬프기도 했다.

책을 읽으며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일기를 써야겠다는 것. 생각을 말로 풀면 절반이 사라지고, 말을 글로 풀면 또 그 절반이 사라진다. 내 생각을 있는 그대로 전할수만 있다면 좋을테지만 그럴 순 없으니 매일 글을 연습하고 연습해서 편지로도 충분히 마음을 잘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 세통의 편지처럼............

내 주변 '그런 구석'이 있는 수많은 유정에게 오늘도 감사하며,, 남은 하루도 환하게 잘 살아가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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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에서 배워라 - 해나 개즈비의 코미디 여정
해나 개즈비 지음, 노지양 옮김 / 창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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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쟤 진짜 웃기는 놈이네..'

나만의 순도 100% 칭찬이다.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할 때면 이미 그 사람한테 빠졌을 경우가 다분했으니..


말마따나 세상에는 참 웃긴 사람들이 많다. 내 주변만 해도 재미있는 사람들이 참 많은데 이런 인복이 나를 또 유쾌한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도 같고!


사실 이런 즐거움이나 재미, 웃음은 의식적으로라도 늘 내 삶에 유지하려 하는 요소인데, 내가 웃기는 쉬워도 남을 웃게 해주기란 퍽 어려운 일이다. 아무래도 처한 상황이, 웃음의 기준이, 지켜야 할 선이 각자 다 다른 법이니까.


나는 항상 유해하지 않고도 유쾌한 사람이고 싶다

그리고 이번 달에는 이런 나와 비슷한 생각을 읽었다.

해나 개즈비의

<차이에서 배워라>

이 책은 두께가 상당하다.

약 550쪽의 분량을 이번 2주간 짬짬이 나눠 읽었다,

또, 이번엔 책을 읽기 전에 예습이 조금 필요했다.


해나 개즈비의 코미디 여정을 다룬 책인데 그녀의 스탠딩 코미디 한편도 보지 않고 책을 읽으면 그게 무슨 재미일까라는 생각으로.. <해나 개즈비 : 나의 이야기>, <해나 개즈비 : 나의 더글러스> 이 두 편을 독서 전 미리 봤다.

사실 엄청나게 박장대소하며 쇼를 보지는 못했다. 쇼에서는 생각보다도 더 다양한 이슈들이 오갔기 때문이다. 자폐, 동성애, 성폭력 트라우마, 그러고는 예술의 가치까지.. 당연한 소리지만 내가 개즈비와 완벽하게 같은 나라, 시대를 살지는 않았기에 100% 공감은 힘들었던 것 같다.

그래도 때로는 느슨하게, 때로는 긴장되게끔 쇼의 분위기를 노련하게 조절하는 개즈비 덕에 간간이 웃으며 즐겁게 관람했다.



나네트에서도, 차이에서 배워라에서도

보면 볼수록 이 짤이 생각나던 개즈비의 이야기들,

재밌게 산다기보단 뭣 같은 삶을 재밌게 이야기해준다는 거..

이것도 엄청난 능력이겠지.


이 책은 전반적으로 묵직하고 단단했다.

하지만 결코 재미없지 않았다는 것이 책의 포인트일 것이다.

'자폐와 ADHD를 가진 시골 출신 레즈비언'

개즈비는 소위 말해 비주류의 사람이다. 그녀의 시작은 태즈메이니아 출신의 뚱뚱하고 뭘 해도 어색한 레즈비언이었고 본인의 소수자성을 코미디의 소재로 삼으며 경력을 쌓아왔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해로운 농담은 그만두겠다고 말한다.

개즈비의 이런 변화는 단순한 생각 회로의 변화가 아니며,

이에 대한 심리와 상세한 묘사들이 바로 "차이에서 배워라"에 있다.


코미디 프로 속에서도, 널리 퍼진 밈에서도 종종 불편함을 느낀 소재들이 있었다.

하지만 불편을 느끼는 것을 조롱하는 지금 당장의 우리 사회에서는 그간 내가 왜 불편해하는지도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불편하면 자세를 고쳐 앉으라는 시대에 말문이 턱 막혀 사고를 멈췄었다. 이제라도 이 불편함의 이유를 책을 통해 느낄 수 있음에 감사하다.

누군가를 상처 입히는 일에 웃을 수 있는 것은 특권이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이런 특권을 누리고 싶지 않다. 상처를 헤집는 농담이 아닌 상처가 치유되는 건강한 농담들을 더 많이 보고 싶다.

이제는 정말 해로운 농담이 끝났으면 좋겠다.


여기부터는 책 속 한 줄

모아보니 팔천 줄 정도 되네요..

개인적으로, 말의 의미보다 말의 효과에 더 신경 쓰는 사람들은 무모한 마키아벨리적 세계관을 갖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P45

어렸을 때 꿈이 개였다니 황당하다며 비웃을 수도 있겠으나, 나는 현재 매우 성공적인 개로 성장했음을 밝히고 싶다.

P67

그 발의 자율성을 의심하지 않았던 나는 그때부터 이 '발꾸러기'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고, 점차 그것이 언니에게서 떨어져 나온 일부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나는 그녀에게 모든 걸 이야기했다. 이 세상 어떤 사람에게 한 것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이 발꾸러기에게 했다.

P153

나는 당시로서는 엄마도 최선을 다했다고 진심으로 믿는다. 엄마의 최선이 충분했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그래도 최선은 최선이고, 우리가 요구할 수 있는 건 그뿐일 때도 있다.

P213

나는 용기란 현명한 판단이 더는 어려울 때 분출되는 감정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P318

뚱보 농담은 나의 주식이었다. 부끄러운 일이다. 이런 종류의 주식이란 기본적으로 수치심을 잔뜩 넣은 샌드위치이며, 수치심은 그다지 영양가 높고 조화로운 식재료가 아니다.

P342

어떤 사람들은 코미디란 상처에 시간을 더하면 완성되는 것이라고 한다.

P348

제발, 자폐증이 있는 사람들이 특별하리라는 기대를 버리자. 평균적인 능력을 가질 권리도 인간의 기본권이다.

P418

나는 우리 모두가 마음의 장님이라 생각한다.

P419

그러나 다시 한번 선택이란 단어를 고려해 주시길 바랍니다. 에어컨을 제공해 주는 것과 추운 곳에 내버려 두는 것은 다르잖아요.

P450

내가 개그 욕심 때문에 대본에 넣는 이 대사들은 나의 온 기억과 충돌했다. 실제로 그 순간은 전혀 웃기지 않았지만 유머로 각색되었을 뿐이다. 관객들을 불편해하지 않기 위해 내 칙칙한 트라우마 부분은 가지치기를 해버렸고 그러면서 내 모든 아픔도 고통 벽장 안에 쑤셔 넣어버렸다.

P474

그는 매체를 정복하려고 하지 않았다. 매체와 대화를 하려고 했다.

P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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