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가 싣고 있는 것을 강은 알지 못한다, 라는 작품 제목에 비쳐져 그 의미를 곰곰이 되새기게 했다. 우리는 강 위에 떠 있는 수많의 배중의 하나에 불과하겠지. 강만이 아니라 너의 배에 무엇이 실렸는지 나는 모른다. 나의 배에 무엇이 실렸는지 너도 다 알진 못하겠지. 그래도 너는 베를린에서 나는 제주에서 같은 작가의 작품을 보며 동시에 서로를 생각했다. (p121)
내가 내 말의 구체적인 현장에 살지 않는다면 나에겐 계속 회상이나 추억 같은 것을 갉아먹고 살아가는 시간만 남은걸까?(p99)
나는 계속해서 너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은 욕망으로, 걷던 걸음을 멈추고, 읽던 책을 덮고, 웃던 웃음을 거둔다. - 쓸모없는 이야기일지라도 너와 나 사이에 단절되지 않고 계속 지속되기를 나는 바라지. (p123)
침대에 엎드린 채 오후 세시쯤에 너에게 전화를 건다. 통화가 되어 내가 갈까? 물으면 너는 오지 않는 게 좋겠다고 말한다. 나는 또 내일 전화할게,하고 전화를 끊는다. (p130)
모든 것이 잊히고 사라진 후에도 남는 것이 있을까? 그렇게 남은 것들은 무엇이 될까? (p142)
배에 어떤 것이 실려 있다하더라도 강물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저 목적지까지 배를 흘려보낼 뿐이다. '나'와 '친구'도 서로를 완벽히 알고 있지는 않지만, 또 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없을 수도 있지만 다른 곳에서 같은 작품을 보며 동시에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를 깨달은 '나'는 친구와의 온전한 작별을 준비한다.
3. 작별 곁에서
소중한 이들과의 작별 후 몇년간 은둔했던 화자가 <봉인된 시간>의 발신자에게 쓰는 답장. 편지를 쓰기 위해 작업실로 사용했던 제주의 집을 다시 찾고 집주인 '유정'과 함께 제주의 이곳저곳을 돌아보며 4.3의 아픈 흔적을 마주한다.
이제는 선생님이 저를 잊으셨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p167)
인생에서 처음 해보는 일이 사라지는 날은 없겠지요. - 그러니까 인간은 태어나서 죽기 일초 전까지 처음 앞에 서게 되는거네요. 선생님.(p168)
그때요, 선생님의 곁을 떠나 친구 곁을 떠나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또 집을 떠날 준비를 하느라 미처 선생님께 연락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p175)
말이란 묘한 힘이 있어서 계속 그 말을 주문처럼 되뇌면 그 말 비슷하게 된다고 했던 사람이 선생님이셨던가요? (p190)
화자는 친구와 딸의 죽음 이후 쉽사리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유정씨에게는 그런 구석이 있어요. 그런 구석이라고 밖에 설명이 안되는 그런 구석. (p214)
선생님께 내 딸의 얘기를 할수가 없어 팔년을 답장을 쓰지 못했는데 잘 모르는 유정씨에게 얘기하는 날이 오기도 할까요? (p232)
그리고 그런 구석을 가진 '유정'은 그녀에게 힘을 준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선한 마음의 이웃, 유정은 '나'에게 부서진 사람의 과거를 보듬으며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여전히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런 구석. '나'는 '유정'과 있을 때 쓰다듬을 받는 기분을 느낀다고 한다. 작가님은 누구나 유정 같은 사람 한 명쯤 곁에 두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야기를 쓰셨다고 하는데, 정말 세상에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좋은 기운을 전해주는 사람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유정과 대화 하며 생의 의지를 되찾는 화자의 모습이 남의 모습 같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