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 곁에서
신경숙 지음 / 창비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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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매순간 헤어지며 살아간다.

하지만 매번 처음 겪는 일처럼 휘둘리고(p17) 쓸모없는 이야기일지라도 단절되지 않고 지속되기를 바라며(p123) 작별에 슬퍼한다.

하지만 우리가 유의해야 하는 것은 작별이란 영영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작별은 지금은 헤어지지만 언제고 다시 만날 수 있는 어떤 온기를 품고 있다고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온전하게 작별할 수 있다.

떠올리면 아프지 않고, 미소띠는 그것이 '온전한 작별'이 아닐지 이야기하는 신경숙 작가님의 <작별 곁에서>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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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 곁에서>는 세 편의 이야기가 묶인 연작 소설이었다.

「봉인된 시간」, 「배에 실린 것을 강은 알지 못한다」, 「작별 곁에서」 세편 모두 서간체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가님은 이 세통의 편지가 나를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주길 바래주셨는데, 요즘 내가 원하는 곳은 과연 어딜까하는 생각과 함께 완독 쯤엔 그 답을 찾길 원하며 한장 한장 책을 넘겼다.

소설에서는 모국을 향한 그리움을 담담하게 전하기도, 투병 중인 친구에게 간절히 재회를 호소하기도. 또 죽음이라는 영원한 작별을 견뎌내며 생의 의지를 되찾기도 한다.

처음에는 세 이야기가 다 분리된 이야기인 줄 알있는데 읽다보니 「봉인된 시간」의 수신자가 「배에 실린 것을 강은 알지 못한다」, 「작별 곁에서」 의 발신자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심지어 표제작인 「작별 곁에서」는 8년만에 작성된 「봉인된 시간」의 답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연쇄되는 이야기들로 각각 다 다른 종류의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는 점이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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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며 평소보다 꽤 많은 밑줄을 그었다.

편지이면서도 일기같기도 한 책 속의 문장들이 소설이라는 생각을 잊게 한 것 같다. 정말 남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듯한 기분으로 책에 즐거이 집중할 수 있었다.

1. 봉인된 시간

1979년 외교관으로 파견된 남편을 따라 두 아들과 함께 미국으로 향한 화자가 한해 동안 뉴욕에서 함께하며 위로가 되어준 '선생'에게 쓰는 편지. 10ㆍ26사건과 12ㆍ12사태등의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다뤘지만 미국에 파견된 엘리트 장교의 아내였다가 불법 체류자로 전락해 평생 고국을 그리워하는 여인, 모국어를 잃게 된 시인의 삶을 보다 자세히 느낄 수 있다.

모국과 작별한 시인의 편지는 먹먹하면서도 담담했다.

나를 잊었나? (p10)

선생이 전화를 받지 않을 뿐인데 서울 전체가 내 전화를 거부하는 것 같은 이 마음은 또 뭔지 모르겠네. (p12)

지난 일년동안 내가 들은 선생의 말은 내가 떠나온 서울의 말이었고 선생과의 만남은 내가 떠나온 서울과의 만남이었네. 중략. 선생은 곧 내게 서울이었다네. (p18)

나를 잊었느냐고 물어서 미안하네. 중략. 그런데도 왜 매번 나는 이렇게 처음 겪는 일처럼 휘둘릴까.(p17)

뉴욕을 떠나 한국으로 돌아간 후 전혀 연락이 닿질 않는 선생에게 시인은 편지로 작별의 그리움을 전한다.

내가 다시 고국땅을 밟게 될 때는 사회 분위기가 달라져 있기를 바랐지.환한 것을 수상하게 여기지 않고 그대로 환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내 나라가 되어 있기를. (p21)

이 말에 베이고 찔리고 잘려도 좋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티브이 앞에 오래 서 있었네. (p64)

우리 가족은 낯선 땅에서 난파선처럼 흔들렸네. (p43)

편지를 읽다보면 먼 나라에 정착해야 했던 시인의 삶과 슬픔이 구체적으로 그려진다. 그 중에서도 나는 늙은 독수리 이야기가 인상 깊었다. 시인에게는 뉴욕에 적응한 자신이 새로 태어난 독수리일까, 아니면 이제 새 날개가 돋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걸까. 그녀의 편지를 생각하면 이미 서너번은 부리와 날개를 갈아치웠을 수도 있겠지라는 생각도 든다.



2. 배에 실린 것을 강은 알지 못한다

독일에서 암투병 중인 친구에게 작별인사의 메일을 받은 화자가 그 친구에게 전하는 편지. '나'를 만나주지 않는 친구에게 보내는 간절함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이 화자는 「봉인된 시간」 속 선생이다.

몇년만에 느낀 감정인지 모른다. 누군가에게 내가 그쪽으로 가겠다는 말을 다시 하게 될줄을 몰랐다. 너에게서는 답신이 없었다. (p85)

암에 걸렸다고 생각하자. 내가 암에 걸렸다고. 그러니 견디자고. 견딜수밖에 없다고. 그런데...... 네가 암이라고? 나는 눈을 부릅떴다. (p90)

내가 안다고 해서 달라질게 없다고 해도 나는 알고 싶어, 라고 썼다. 아무 말도 안하면, 아무것도 모르니까, 있는 그대로 알려줘, 라고. 말하는 순간이라도 네가 나은 기분이 들 수 있을지 모르니 말을 해, 라고 했다. (p93)

언제 우리가 다시 볼 수 있을까 싶지만 널 보는 언젠가,라는 시간이 이유가 되어 오늘 잘 지낼 수 있겠지. 오늘도 기분 좋게 하루라는 강을 건너자. / 나는 그때 너에게 갈 수 있는 기회를 또 한번 놓쳤다. '언제 우리가 다시 볼 수 있을까 싶지만' 이라고 쓴 것은 보고 싶다는 다른 말이었을텐데. (p96)

친구를 만나기 위해 유럽까지 간 '나'. 하지만 친구는 만남을 원하지 않는다. 친구가 '나'에게 전한 널 보는 언젠가,라는 시간이 이유가 되어 오늘 잘 지낼 수 있겠지. 오늘도 기분 좋게 하루라는 강을 건너자 라는 문장이 너무 좋아서 천천히 몇번을 다시 읽어봤다.


배가 싣고 있는 것을 강은 알지 못한다, 라는 작품 제목에 비쳐져 그 의미를 곰곰이 되새기게 했다. 우리는 강 위에 떠 있는 수많의 배중의 하나에 불과하겠지. 강만이 아니라 너의 배에 무엇이 실렸는지 나는 모른다. 나의 배에 무엇이 실렸는지 너도 다 알진 못하겠지. 그래도 너는 베를린에서 나는 제주에서 같은 작가의 작품을 보며 동시에 서로를 생각했다. (p121)

내가 내 말의 구체적인 현장에 살지 않는다면 나에겐 계속 회상이나 추억 같은 것을 갉아먹고 살아가는 시간만 남은걸까?(p99)

나는 계속해서 너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은 욕망으로, 걷던 걸음을 멈추고, 읽던 책을 덮고, 웃던 웃음을 거둔다. - 쓸모없는 이야기일지라도 너와 나 사이에 단절되지 않고 계속 지속되기를 나는 바라지. (p123)

침대에 엎드린 채 오후 세시쯤에 너에게 전화를 건다. 통화가 되어 내가 갈까? 물으면 너는 오지 않는 게 좋겠다고 말한다. 나는 또 내일 전화할게,하고 전화를 끊는다. (p130)

모든 것이 잊히고 사라진 후에도 남는 것이 있을까? 그렇게 남은 것들은 무엇이 될까? (p142)

배에 어떤 것이 실려 있다하더라도 강물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저 목적지까지 배를 흘려보낼 뿐이다. '나'와 '친구'도 서로를 완벽히 알고 있지는 않지만, 또 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없을 수도 있지만 다른 곳에서 같은 작품을 보며 동시에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를 깨달은 '나'는 친구와의 온전한 작별을 준비한다.


3. 작별 곁에서

소중한 이들과의 작별 후 몇년간 은둔했던 화자가 <봉인된 시간>의 발신자에게 쓰는 답장. 편지를 쓰기 위해 작업실로 사용했던 제주의 집을 다시 찾고 집주인 '유정'과 함께 제주의 이곳저곳을 돌아보며 4.3의 아픈 흔적을 마주한다.

이제는 선생님이 저를 잊으셨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p167)

인생에서 처음 해보는 일이 사라지는 날은 없겠지요. - 그러니까 인간은 태어나서 죽기 일초 전까지 처음 앞에 서게 되는거네요. 선생님.(p168)

그때요, 선생님의 곁을 떠나 친구 곁을 떠나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또 집을 떠날 준비를 하느라 미처 선생님께 연락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p175)

말이란 묘한 힘이 있어서 계속 그 말을 주문처럼 되뇌면 그 말 비슷하게 된다고 했던 사람이 선생님이셨던가요? (p190)

화자는 친구와 딸의 죽음 이후 쉽사리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유정씨에게는 그런 구석이 있어요. 그런 구석이라고 밖에 설명이 안되는 그런 구석. (p214)

선생님께 내 딸의 얘기를 할수가 없어 팔년을 답장을 쓰지 못했는데 잘 모르는 유정씨에게 얘기하는 날이 오기도 할까요? (p232)

그리고 그런 구석을 가진 '유정'은 그녀에게 힘을 준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선한 마음의 이웃, 유정은 '나'에게 부서진 사람의 과거를 보듬으며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여전히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런 구석. '나'는 '유정'과 있을 때 쓰다듬을 받는 기분을 느낀다고 한다. 작가님은 누구나 유정 같은 사람 한 명쯤 곁에 두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야기를 쓰셨다고 하는데, 정말 세상에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좋은 기운을 전해주는 사람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유정과 대화 하며 생의 의지를 되찾는 화자의 모습이 남의 모습 같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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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이렇다 할 작별을 경험해본 적이 없으니 떠나보내는 것에 미숙할 내가 예상도 간다. 친구의 죽음이 나오는 「배에 실린 것을 강은 알지 못한다」는 괜한 상상을 덧붙히게 되어 벌써 많이 슬프기도 했다.

책을 읽으며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일기를 써야겠다는 것. 생각을 말로 풀면 절반이 사라지고, 말을 글로 풀면 또 그 절반이 사라진다. 내 생각을 있는 그대로 전할수만 있다면 좋을테지만 그럴 순 없으니 매일 글을 연습하고 연습해서 편지로도 충분히 마음을 잘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 세통의 편지처럼............

내 주변 '그런 구석'이 있는 수많은 유정에게 오늘도 감사하며,, 남은 하루도 환하게 잘 살아가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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