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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수업 - 말랑하고 정의로운 영혼을 위한 ㅣ 푸른들녘 인문교양 25
신주영 지음 / 들녘 / 2018년 12월
평점 :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하테 욕을 하고
- 김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중에서
신주영 변호사의 [헌법 수업]을 읽으면서 김수영의 이 시가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고등학생 시절 김수영의 이 시를 좋아했다. 사춘기 특유의 위악적 자학감 때문이 아니었는지. 자신의 소시민성을 반성하는 대목이 왠지 모르게 좋았다. 그런데 그때 ‘왕궁의 음탕’이란 말이 뭔지는 몰랐던 것 같다. 서른을 훨씬 넘은 나이에야 알았다. 수백의 처녀를 궁궐에 가둬놓고, 오로지 왕만이 처녀성을 파괴할 권리를 갖는 그 비인간성, 폭력적 음탕함을 말이다. 사실 조선을 비롯한 봉건사회는 보편인권이란 개념이 없었다. 노비란 이유로, 양반이 아닌 상민이란 이유로 의무만 있고, 권리는 거의 없는 인민이 절반을 넘었다. 양반 지배층은 온갖 신분상의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아름다운 운영은 왜 자결했을까’란 헌법 교양서에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제목의 꼭지가 보인다.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이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궁녀 중 한 사람인 운영이란 여인이 겪은 비운의 사랑 이야기다. 안평의 궁을 드나들던 젊은 김선비란 이와 몰래 사랑을 나누던 운영은 둘 사이를 의심한 안평대군의 추궁 끝에 자결하고 만다. 개인이 자유롭게 사랑하고, 결혼할 권리가 없던 봉건시절의 이야기다. ‘인간의 존엄과 가치’, ‘자기 결정권’ 등 우리 헌법이 명시하고 있는 인간의 권리가 없던 시절의 이야기다.
이 책에는 역사 속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위종의 드라마틱한 삶을 보여준다. 이위종은 이준 열사의 이야기로 잘 알려진 헤이그 밀사 사건의 3인 밀사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당시로서는 극히 드물게 미국의 소학교를 다녔고, 프랑스 육사를 나와 러시아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하다 러시아 귀족 아가씨와 결혼했다. 결혼을 위해 유교를 버리고 러시아 정교로 개종도 했다. 헤이그에서의 외교활동이 실패로 끝난 뒤 연해주에서 의병투쟁도 하고 러시아 제국군의 장교로 1차세계 대전에 참전하기 했다. 나중에는 볼세비키 혁명군 부대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그의 최후가 어떤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왠만한 영화를 능가할 그의 드라마틱한 삶을 추동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조국의 독립이었다. 왜? 주권을 가진 독립국가의 일원이 될 때서야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권리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 때문이었다.
국민의 기본권 억압을 지난 두 정권 아래 경험했던 국민은 ‘헌법적 가치’란 의미를 체화했다. 이 책은 물과 공기처럼 없어서는 안 되지만 있는 게 너무도 당연해 그 소중함을 느끼기 힘든, 인간의 기본 권리가 명문화된 헌법적 가치를 소설과, 영화, 역사 스토리를 도구로 쉽고도 재미있게 알려준다.
‘알기 쉬운 헌법이야기’, 혹은‘ 청소년을 위한 헌법이야기’라 할 이 책이 좀 아쉽다면 [말랑하고 정의로운 영혼을 위한 헌법수업]이란 책 제목 영 말랑해보이지 않고 난삽한 느낌을 준다는 점이다. 그리고 목차가 좀 복잡하다. 체계적이면서도 명확한 목차 구성이 아쉽다. 체계적이면서도 흥미를 줄 수 있는 카피 만들기가 필요하다. 또 하나. ‘갑오경장’의 불처저한 개혁이 1930년대 후반의 초강압적 일제통치를 가져왔다는 대목(152쪽)은 좀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