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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이야기 공부법
김환희 지음 / 창비 / 2019년 2월
평점 :
비교문학자였던 작가가 우연한 계기로 옛이야기를 접하고, 그 속에서 치유 받으면서 옛이야기를 공부했던 과정들,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한 안내서다. 인터넷이나, 논문들을 통한 공부 방법도 자세히 서술한다. 더불어 우리 설화와 다른 나라의 설화를 비교 분석하면서 우리 설화의 우수한 서사성에 주목한다.
또한, 임석재 선생의 <한국구전설화>를 소개하면서, 이야기의 원형을 들여다보면서 한국인이 누구인가를 밝혀내고자 하는 염원을 소개한다.
작가는 옛이야기를 공부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옛이야기 중에서 내 마음속에 오랫동안 남는 이야기 하나를 붙잡고 시작하기를 권한다. 그래야 지난한 공부를 이어갈 수 있으므로.
작가는 ‘상문고 사태’를 겪으면서 ‘아기장수’ 설화에 천착한다. 현실에 순응하여 정의로운 아이들의 날개를 잘라 버린 아기장수의 어머니와 같은 어른이 될까 두려웠다고 고백한다. 이 사회는 아직도 아기장수가 필요한 사회다.
옛이야기는 역동성, 확장성, 유연성을 지닌다.
우리의 ‘구렁덩덩 신선비’는 외국의 ‘큐피드와 푸시케’, ‘미녀와 야수’, ‘뱀과 포도 재배자의 딸’, ‘마법사 피오란테경’ 등과 비교할 수 있다. 남편 탐색담 속의 괴물 남편은 여성의 심층에 자리 잡은 남성성으로 본다. 아니무스인 셈인다.
‘구렁덩덩 신선비’는 전반부 나약한 셋째딸이 언니들 꾐에 넘어가 허물을 불태우지만, 남편을 찾기 위한 여정을 지나면서 조금씩 강인한 인물로 변모하여 남편을 되찾는다.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물, 불, 빨래, 복주께, 호랑이 눈썹 등의 모티브가 외국의 설화와 어떻게 대비되는지 설명한다. 서구에서는 호랑이 대신 늑대가 나타나기도 한다. 서구에서는 낯선 세계에 사는 괴물의 집에서 머리털, 깃털, 비늘 따위를 가져온 인물들은 모두 남성이지만, 신선비에서는 여성이다.
‘물’을 통한 치유력은 ‘손 없는 색시’나 ‘눈 먼 동생’에서처럼 다른 설화에서도 나타난다.
‘유럽의 뱀 신랑 색시와 한국의 바리공주가 무쇠 신을 신고 떠난 이계 여행’에서는 ‘바리공주’ 설화의 우수성을 확인한다.
‘마랴 공주와 모캐’의 지하여행에서는 지옥에서의 구원을 애원하는 영혼들을 돕지 않는다. 큐피드와 프시케. 바리데기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바리공주는 ‘가엾고 측은해하며 부모 효양 늦어지나 죄인을 제도하리라,’며 억만지옥의 문을 열고 죄지은 영혼들을 극락으로 인도한다.
흔히 알고 있는 ‘바리데기’와 ‘바리공주’는 다른 얘기다. 바리데기는 전라도, 경상도, 동해의 무녀들에게서 전승된다. 바리공주는 주로 경기, 충남의 강신무들에게서 전승된다. 바리공주는 여성의 한을 승화시키는 과정이며, 온전한 나를 이루는 과정이다. 치유자의 원형으로서 서사도 뛰어나다.
옛이야기에서 왜 착한 아이들이 시련을 겪을까. 착한아이 증후군은 어린 시절 주양육자부터 버림받을까 두려워하는 유기 공포에 대한 방어기제로 본다. 이들은 아픔과 시련을 통해 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지혜를 얻는다.
옛이야기속 주인공들은 대부분 편모가정의 자녀이거나 고아다. 또한, 양친이 있어도 버림받는다. 이들은 세상으로 나가 조력자의 도움으로 어려움을 극복한다.
조력자(혹은 동물)에게 복종한다는 것은 인간 심층의 자기 목소리, 가장 본질적이고 본능적인 내면의 목소리에 복종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 목소리는 자아의 불행을 직감하고 도움을 주려는 내면의 목소리다. 이는 주인공이 온전한 자기실현을 위해 끌어낸 '나'의 내면적인 힘을 나타낸다.
이 책은, 우리 옛이야기들이 온전히 우리만의 것이 아니고, 비슷한 설화들이 세계 곳곳에 분포함을 보여준다. 실크로드를 통해 문화와 문명의 교류가 이어졌듯이, 그 속에 이야기의 교류도 이어졌을 것이라고 본다. 남방문화도 해류를 따라 제주도를 거쳐갔다. 제주도의 설화에 남방문화의 흔적이 보이는 이유다. 안데르센도 순수한 덴마크 이야기가 아니고 아라비안 이야기가 들어가 있고, 우리의 많은 것은 불교와 실크로드 영향이 있을 수 있다고 본다.
인류가 제일 처음으로 발달시킨 오락(?)이 이야기이고, 그 이야기는 수천 년에 걸쳐 전파되고 다듬어지면서, 각 나라의 특색에 맞게, 그 나라 정서에 맞게 토착화되었을 것이다. 옛이야기를 단순한 이야기가 아닌 모든 서사의 원형으로써 그 속에서 인간 원형을 탐색할 수 있는 광맥임을 알겠다.
책을 읽지 않는 아이가 있었다. 모두가 재미있다는 책도, 심지어 만화책도 읽지 않던 아이에게 <옛이야기> 책을 주었더니 책에 푹 빠져 읽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옛이야기는 그 자체로 온전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