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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고네 범우문고 267
소포클레스 지음, 황문수 옮김 / 범우사 / 2009년 12월
평점 :
품절


▶▶ 안티고네를 좋아하는 근쉬 ◀◀

에테오클레스 – 약속을 어기고 왕권을 넘기지 않음
폴리네이케스 – 약속을 여겨 분을 내고 아르고스로 건너가 테베시를 공격함


둘의 전쟁을 통해 갈등이 극대화되었지만 승패는 나지 않고 지루하게 오래 계속되자 둘의 결투를 통해 전쟁의 승패를 가리자고 함. 둘의 결투는 서로 서로의 목을 찌름으로 동시에 둘이 죽게 되는 결과를 낳음. 그리고 두 도시의 전면적이 시작되었고 폴리네이케스의 아르고스가 지게 되어 퇴각하게 된다. 전쟁의 끝난 전쟁터에는 무수한 시체들만 남게 되고 그 시체 중엔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의 시체도 있다.

테베는 에테오클레스가 죽자 어부지리로 이오카스테의 남동생 크레온이 왕이 된다. 크레온은 시신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에티오클레스만 성대하게 장사를 치러주지만, 테베 입장에서 반역자인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은 수습하지 말고 방치하고 포고령을 내린다. 안티고네는 이 배경에서 소설이 시작된다.

안티고네는 크레온의 명령을 어기고 새벽에 오빠의 시신을 수습한다.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그저 흙만 덮어 주었는데 이를 크레온이 알고 노하여 안티고네를 동굴에 가둔다. 음식만 조금 넣어주고 사실상 생매장을 한 셈이다. 안티고네는 동굴 안에서 목을 매어 자살을 한다. 안티고네를 사모했던 크레온의 아들 하이몬은 안티고네의 죽음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칼로 자기 베를 찔러 자살하게 된다. 거기서 죽음은 끝나지 않고 또 다른 죽음이 이어진다. 크레온의 아내이고 하이몬의 어머니인 에우류디케도 침대에서 자살한다. 그리스 비극은 이렇게 처절한 죽음이 난무한다.

2500년 전의 작품인 안티고네는 지금도 계속 공연된다. 왜?

그리스 고전은 선악 구분이 없다. 아이언맨, 트렌스포머 같은 영화는 선악이 명확하다. 재미있게 보지만 남는게 없다. 인생을 살다보면 순도 100% 천사도 없고 100% 악마도 없다. 이것이 뒤 섞여 있는 것이 인간이고 인생이다. 내가 크레온이라면 안티고네라면 어떤 선택을 할까? 이것이 고전을 읽는 포인트가 된다.


▶▶ 내가 크레온이라면?

테베(스)의 왕이라면 테베를 배신하고 적극 아르고스의 왕이 되어 쳐들어온 폴리네이케스를 어떻게 하겠는가? 죽음 이후에 죽음의 가치를 다르게 처리함으로 국가가 유지되는 것이 아닌가! 크레온의 이 생각은 통치자로서 너무 상식적이고 당연한 생각이 아닌가? 적국 그것도 배반자의 시체를 개와 새들이 먹는 것을 국민들이 보고서 반역의 대가가 이렇게 크구나! 이런 판단을 하게끔 하는 것이 통치자의 당연한 귀결이다. 크레온의 의도는 건강하고 부강하며 튼튼한 나라의 기초는 여기서 온다고 본 것이다.


▶▶ 내가 안티고네라면?

두 사람 모두 안티고네의 오빠이다. 정치적으로는 영웅이고 반역자이지만 인간적, 가족적으로 보면 오라비인 것이다. 전쟁 직후의 왕의 명령 앞에 왕명을 어기고 오라비의 시신을 수습하는 안티고네의 모습은 ‘깡’ 그 자체이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이라는 책에서 안티고네는 국가라는 큰 그림을 보지 못하고 오빠라는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여 있는 존재로 이해한다. 크레온은 인간이라는 사사로운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이성과 합리성에 따라 대의를 걷는 존재로 여긴다. 안티고네는 여자, 사사로운 감정, 사법 영역의 존재의 대표이고, 크레온은 남자, 공법을 생각하는 공법 영역의 존재로 본다. 부정적인 면에서의 자연법과 이성적인 법에서는 법을 남녀라는 구도에서 보게 하고, 전체라는 관점에서 남자라는 관점으로 가야한다는 것이 헤겔의 생각인 것이다.

어떤 사람은 크레온은 행위, 결과에 초점을 맞춰 생각했다면 안티고네는 이 사람은 내게 어떤 존재인가 하는 존재의 차원에서 바라봤다. 존재의 차원이라는 것이 사사로운 것이다. 행동, 결과를 가지고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그것이 현대의 법 체계가 아닌가! 관계에 의해서 법이 좌우된다면 사회가 어떻게 되겠는가!!

안티고네는 자신의 행동이 신의 원리 즉 신법에 가깝다고 생각하고 있다. 공법 vs 사법의 구도가 아니라 공법 vs 신법의 구도가 나오는 것이다. 신법은 무엇인가? 死者는 장례를 치러야 하데스에게로 갈 수 있었다. 사람이 죽으면 영혼을 인도하는 헤르메스가 지하세계의 경계지점까지 데리고 간다. 그러면 죽은 자들을 실어 나르는 뱃사공 Charon은 아케론 강부터 스틱스 강까지 태워 하데스에게로 갈 수 있다고 믿었다.

다시 안티고네를 넘어와서. 영혼은 누구의 영역으로 가는 것이냐?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 신의 영역으로 가는 것이다. 크레온은 어떤 오류를 범하느냐 하면 인간의 법, 왕의 권한으로 자신이 만든 법, 그 이후에 백성을 가르친다는 좋은 명분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 명분이 상위 법, 즉 신법을 침해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구도 속에서 보면 크레온이 사법이 되는 것이다. 신의 법을 이해하지 못하고 내려와 있어서 내게 있는 법, 율법일 수 있는 것을 지킬 때 바리새인(지금 종북이라고 말하는 측과 비슷한 논리를 가진 1세기 이스라엘 진영)이 되는 것이다.

이럴 때 안티고네가 이야기 한다. “증오는 제 천성에 맞지 않아요. 오직 사랑만이 제 천성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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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6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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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내가 이방인이라면 나는 괜찮을까?

 

이것이 까뮈의 고민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내가 가정과 학교, 사회에서 이방인으로 있다면 나는 살인이 없이 사회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살인을 피하기 위해 적당히 타협하고 부조리함도 슬그머니 칠해가면서 그래도 살아가야 하니까, 사는게 다 그렇고 그렇치 모~~’ 라면 자위하고 살고 있는건 아닌가? 실존을 희생하고 사회 속에서 (긍정적으로 말하자면) 만수산 드렁칡처럼 살아가는 것이 세상사는 이치가 아닐까? 까뮈는 담배연기 속에서 이런 쓰디쓴 표정으로 잉크를 묻혀 갔으리라 상상했다.

 

작가는 이렇게 살아가는 모습을 사장이로 관선 변호사로 또한 검사로 재판관으로 그렸다고 보았다. 가장 강력한 캐릭터로는 사제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뫼르소! 너의 모습을 죽이며 만수산에서 얽혀 사는 것이 좋지 않겠니? 회개해라.” 이것은 그가 믿는 신의 형상을 부정하라는 강요이다. 신이 부여한 자유의지를 묵살하라는 말과 다름 아니다.

 

뫼르소는 과거(1)에 그렇게 하지 않을 이유가 없어서 남들이 말하는데로 따라 살았지만 이제 죽음을 직면하면서는 타자보자 자아를 지켜야 했다. 또한 재판에서 느끼는 부조리함을 이해할 수도 없었다. 이 두 난관에서 뫼르소는 회피하지 않고 타협하지도 않고 단단하게 자신을 드러낸다. 죽음이라는 것으로... 적어도 자신은 원인불상의 이유로 살인은 했지만 그것을 빌미로 나의 실존을 손상가게 할 순 없다. 죽음을 선택함으로 나의 실존을 증명하리라. 너희 이방인들은 나를 욕하겠지만 당당히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죽는 순교자(마르튀스)를 기억하라고 말하는 듯 보였다.

 

조윤선의 영장이 기각됐다는 소리, 최순실의 이 재판은 민주적이 아니라는 염병하는 소리, 박근혜의 인권탄압이라는 소리, 이명박의 그건 나에게 물어볼게 아니라는 소릴 들으면서 이방인의 사제보다 훨씬 어처구니없는 소릴 해대는 저들이 우리나라의 공무원이었고 지도자였다는 것에 자괴감을 느낍니다. 돈과 권력이라는 가치가 자기 실존보다 우선된 사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똑똑히 목격한 증인(마르튀스)으로서 내 자녀와 이야기할 소재가 생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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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털리 부인의 연인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5
D.H. 로렌스 지음, 이인규 옮김 / 민음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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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소설 읽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 이름과 관계가 잘 기억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래와 같은 짓을 해야 소설이 눈에 들어 온다. 이게 도대체 뭐하는 짓인지… 쯧!! 이렇게 하지 않으면 소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두뇌구조는 뭔지 자괴감에 빠지게 됐었다. 그래서 소설은 내게 낯선 장르였나 보다.

영화나 드라마도 기본적으로는 이런 관계 구도 속에서 벌어지는 이벤트들이라 같은 맥락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소설과 다른 점은 얼굴과 목소리를 기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수월하게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닥 좋아하지 못했다. 이 말은 싫다는 말은 아니고 힘들어 했다는 뜻이다. 영화나 드라마에 감동도 많이 받아 봤다는 점을 밝힌다^^;;;


엠마누엘 부인, 아~~ 아니 채털리 부인이면 빨리 그 이벤트가 벌어져야 하는데 이상한 이야기만 한참 하면서 몇장이 지나가고, 정작 사실상 주인공 격인 멜러즈는 100p에 와서야 겨우(?) 등장한다. 그리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멜러즈와 썸씽이 생긴다. 뭐 이리 재미없어, 뜸도 한참 들이네… 등등 이런저런 실망 아닌 실망을 하면서 이 책을 읽어 나갔다.


심지어 그 이벤트도 내가 생각했던 이벤트의 묘사는 아니었다. 야설로 불리는 글을 한편만 읽어보면 그 차이는 명확히 알 수 있다. 이미 (2012년) 고인이 된 실비아 크리스텔 누님의 영화(1974년)는 보지도 못했지만 - 어렸을 적엔 내가 볼 수 있는 영화 등급이 아니었기에 (진심) (지금까지도) 못봤음!!! -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들었기에 채털리 부인의 연인이라는 책은 그런 기대로 가득했었고, 그 안개를 걷어내는데 40년 이상이 흐른 것 같다. 성애묘사로서의 문학과 음란으로만 충만한 저급한 문장의 나열과는 너무 명확하게 다르다는 것을 일반 대중에게 알게 해준 작품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발견한 맥락은 멘붕이다.

특히 멜러즈의 경우, 이런저런 이유로 세상과 단절하고 숲속으로 들어와 혼자 살고 있는데 한 여인과 연결되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멘붕을 겪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내가 멜러즈로 이입하며 읽었었는데 정말 괴로웠을 것 같았다. 와이프에게 학을 띠며 속세와 단절하며 살고 있고 다시는 세상과 커넥션 없이 살리라 하고 지냈는데 어느새 실비아가…. 아니 코니가 자기 마음 속에 와 있고 그녀와 이미 섹스를 하고 있는 모습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바라던 그림이 아니었을 것이다. 게다가 코니는 채털리가 아니던가… 자신의 주인 채털리의 아내인 채털리…

나는 세상에 환멸을 느꼈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을 당했으며, 이 세상은 믿을 만한 곳이 못돼… 나를 이런 곳에 나를 둘 수 없어, 난 깨끗하게 이곳 숲 속에서 단절과 홀로서기로 독야청청하며 여생을 살꺼야. 자연은 나를 버리지 않고, 나도 자연이 좋아… 이게 내 인생이야, 난 자연인이다~~~ 이러면서 윤택이나 이승윤을 기다렸을 것 같은 그런 사람이 멜러즈로 보였다.

그러나 현실은 코니가 내 숲으로 왔고, 내 집 안으로, 내 마음 속으로 깊숙히 들어와 버렸다.

멘!!
붕!!


클리퍼드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 보려고 했는데 역시 비슷하다고 느꼈다. 마이클리스라면 혹시 모를까 내 아내가 멜러즈랑??? 하찮은 개 돼지와 비슷한 부류인 저 상것 사냥터지기랑??? 여자들이 (ex) boyfriend가 만나는 여친이 나보다 확실하게 못하다고 판단될 때 느끼는 그런 감정과 비스무리한 느낌이 아닐까 싶다. 결과적으로 멘붕의 감정을 느꼈으리라...

나는 화성이 고향이어서 금성이 고향인 여자를 알 수 없지만... 코니도 멘붕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어떨까 싶었다. 코니 자신은 지식인 부모를 둔 전형적인 프로레타리아 계급의 여성이다. 비록 귀족(부르주아) 계층은 아니었지만 귀족들이 갖지 못한 지적 풍요를 가진, 귀족만은 못해도 남부럽지 않은 부와 여유를 가진 사람으로서 남편 유고시 자신이 선택한 차선이 멜러즈라는 것은 … 쫌 … 납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시선이겠지만 가장 중요한 코니 자신에게도 충격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렇듯 이 책은 멘붕이 1~2권을 흐르고 있고 1장부터 19장까지 흐르고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내가 본 관점이 무엇이냐 하면... 과연 멘붕을 이끈 요인이 무엇인가? 그게 성(sex)이 아닌가? 로렌스가 이런 관점에서 성을 중요한 테마로 음란(?)하게 글을 써 갔다고 생각했다.
미천하나마 성에 대해 책을 읽어가고 독학해 가는 입장에서 이 책은 내가 읽어야 할 리스트 안에 있었던 책이었고 그래서 2번째 읽은 유일한 소설이었다. 이 책은 성에 대한 20세기적 입장과 지식 정도의 책이며, 로렌스의 코니를 통해 읽은 여성의 심리와 성에 대한 입장과 태도 역시 20세기적이다, 성의 환희에 대한 묘사도 결국 20세기적이라고 보였다. 딱, 그만큼이었다. 20세기 성장주도적인 산업세계에서 정약용 같은 학자가 존경받지만 21세기에서는 다산 콜센터로 그 역할을 다 한 것처럼, 성에 대한 이해와 묘사는 거기까지 였었다. 나쁘다는 뜻, 부족하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다만 "지금은" 다른 패러다임으로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성(sex)이라는 것은 사실상 인간 행동의 근본적 이유와 내밀한 원인이 된다.

이 말에 수많은 반박이 따른다는 것을 안다. 특히 여성들에게서…
그러나 여성들이 모르는 것이 있다. 여성도 남성도 똑같은 human이고 animal이라는 것을.

이 말을 납득시키려면 사실상 불가능할 거라는 것을 알기에 길게 쓰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짧게 풀면 이렇다. 사람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종교적 철학적 환상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사상사의 처음부터 사람에게만 영이 있다는 논리가 득세한다. 그리하여 영과 육 or 영,혼,육 이렇게 2분법, 3분법으로 구분해서 이해하게 된 논리 가운데서 영적인 부분을 강조(스토아학파)하면서 생긴 환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마치 영을 추구하는 존재로서 인간을 이해하고 그런 인간이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2~3천년 동안 가르쳐 왔다. 무려 2~3천년 동안이나….

그러나 요즘 과학과 모든 인문학 등에서는 사람의 동물됨 즉 '육(에피큐로스학파)'을 더 강조한다. 이 말에 상당히 길고 긴 논리와 실험결과의 데이터들과 뇌과학과 실례들을 첨부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1500페이지 이상의 책이 되기에 할 수 없다. 다만 사람을 이해하는 패러다임이 완전 달라졌다는 것이고 그런 관점에서 육이 강조되고 즐기는 YOLO족이 "다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욜로 패러다임은 가치보다 지금의 쾌락(이 말은 굉장히 좋은 말이다. 저급한 오해는 금물)이 내일의 행복보다 가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지금 참고 인내하기 보다는 행동하며 행동에서 오는 기쁨을 즐기는 쪽으로 전환되었다는 말이다. 참고로 여기서 육을 성으로 이해해도 큰 무리가 없다. 육에서 얻는 기쁨 중 가장 큰 것이 성이기 때문이다. - 다만 성이 전부는 아니다. 다른 것도 있지만 성이 없는 육은 없는 것이다. 그런 존재를 천사(육은 없고 영만 있는 존재)라고 한다.

다시 책으로 돌아와서 연결하자면, 코니와 그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2~3천년 동안 교육받아온 그 패러다임 속에서 살다가 성(sex)을 통해 욜로 아니 carpe diem적 삶을 경험하니 이게 참 인생이구나, 그럼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고, 살아온 인생은 모지?? 하는 혼돈 속에 빠지게 된 것이라고 보았다. 약간의 입장의 차이는 있겠지만 멜러즈도 클리퍼드도 심지어 코니도 성을 통해 (준비되지 못한) paradigm shift를 경험했다. 그 경험은 기존의 패러다임 속에서는 거부되는 것이지만 절대로 과거로 되돌아가지 못할 something이었기에 결국 작별하게 된다는 것이 이 책의 결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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