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코의 미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쓴다'는 개념을 인지한 채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그대.
나는 그대가 남겨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에 익숙한, 어딘지 쓸쓸한 그늘을 감추지 않은 채 맑게 웃어 보이는 애어른 같은 소녀.
직장을 다니는 홀어머니와, 그녀의 엄마 혹은 아빠와 함께 자라난-
언제인지 모르게 굳은 심지를 가지게 된 여자.


소설에서 공통적으로 읽혔던 건 당신과 꼭 닮은 여자아이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나와도 퍽 많이 닮았습니다.

 


그래서일 겁니다.
이 소설이 마냥 좋다는 말로 설명되지 않는 것은.
오히려 마음 어느 한 구석이 지독히 아팠던 흔적을 우연히 발견하거나, 한없는 그리움에 삼켜지는 기분입니다.
선명한 감정에 비해 무엇이 아프고 무엇이 그리운지는 흐릿합니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집이 참 좋습니다.
누구에게나 있는 연약한 부위의 깊은 상처에 당신은 손을 대고 가만히 있어주는 것 뿐인데 온기를 나눠받는 기분입니다.


마음에 날아와 박힌 문장들은 뿌리를 내립니다.
여기, 제멋대로 자리 잡은 문장들을 옮겨 봅니다.

 

 

 

<쇼코의 미소>

가족은 언제나 가장 낯선 사람들 같았다.

p.14



어떤 연애는 우정 같고, 어떤 우정은 연애 같다. 쇼코를 생각하면 그애가 나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을까봐 두려웠었다.

p.24



죽음에 이르러서야 겨우 부끄러움을 죽여가며 나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걸 사내답지 않다고 여기며 깔보던 시대에 태어난 사람이었다. 가끔씩 그런 통제에도 불구하고 비어져나왔던 사랑의 흔적들이 있었다.

p.47

<신짜오, 신짜오>


어차피 당신들은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라는 마음이 그날 밤, 아줌마와 우리 사이를 안전하게 갈라놓았다. 그건 서로를 미워하고 싶지도, 서로로 인해 더는 다치고 싶지도 않은 어른들의 평범한 선택이었다.

p.82



"미안해."

나도 모르게 그 말을 하고 나서야 나는 내가 오래도록 그애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어했다는 걸 깨달았다. 투이의 커다란 눈이 한 번 깜빡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가지에서 눈덩이가 떨어져 머리 위에서 부서졌다.

"아무것도 몰랐던 거, 미안해." 나는 천천히 말했다.

p.86

<언니, 나의 작은, 순애언니>

죽은 몸이라도 만져보고 싶었어요. 기진한 사형수의 부인이 겨우겨우 말을 이었다. 엄마는 그 자리에 오래 있지 못하고 밖으로 나왔다.

p.108



가장 중요한 사람들은 의외로 생의 초반에 나타났다. 어느 시점이 되니 어린 시절에는 비교적 쉽게 진입할 수 있었던 관계의 첫 장조차도 제대로 넘기지 못했다.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생의 한 시점에서 마음의 빗장을 닫아걸었다. 그리고 그 빗장 바깥에서 서로에게 절대로 상처를 입히지 않을 사람들을 만나 같이 계를 하고 부부 동반 여행을 가고 등산을 햇다. 스무 살 때로는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말을 주고받으면서. 그때는 뭘 모르지 않았느냐고 이야기하면서.

pp.115-116

<한지와 영주>

나는 그 침묵 속에서 내가 얼마나 그 시간에 집착하고 있는지 알았다. 그 시간은 영원해야 했다. 다른 시간들처럼 함부로 흘러가버려서 과거 속에 폐기되어서는 안 됐다.

p.150



침묵은 나의 헐벗은 마음을 정직하게 보게 했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 누군가와 깊이 결합하여 분리되고 싶지 않은 마음, 잊고 싶은 마음, 잊고 싶지 않은 마음, 잊히고 싶은 마음, 잊히고 싶지 않은 마음, 온전히 이해받으면서도 해부되고 싶지 않은 마음, 상처받고 싶지 않은 마음, 상처받아도 사랑하고 싶은 마음, 무엇보다도 한지를 보고 싶다는 마음을.

p.174

<먼 곳에서 온 노래>

"소은. 어린애들은요, 어른이 한 말을 다 진짜로 믿고 받아들여요. 평생 동안 그 말과 함께 살아가는 거지요.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아버지가 내게 말했어요. 너는 쓸모없는 계집애야. 덩치만 큰 계집애. 눈에 띄고 싶지 않았는데도 자꾸만 몸이 커졌습니다. 웅크리면 조금이라도 작아 보일까 해서 구부정하게 다녔지만 소용없었어요. 사라지고만 싶었습니다. 러시아 남자가 청혼했을 때, 도망치듯 그와 결혼해서 여기로 온 건 그런 이유였지요. 그가 나를 무시하고 이유 없이 욕을 해도 그 사람을 떠날 수가 없었어요. 아무것도 아닌 나와 결혼까지 해 준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나봅니다."

p.193



나는 나의 가장 추한 얼굴까지도 거부하지 않는 선배의 마음을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애초부터 사랑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인간이었으니까.

p.20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