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2.14 -17 책 일기
최근 얼마동안 내가 힘들게 했던 생각이 ‘나는 책을 왜 읽나. 이걸 어디 써먹나. 말도 행동 도 없는데 이걸 읽어서 뭐하나.’였다. 책 읽고 거기서 파생되는 이런 저런 것들 모두가 나에게 지극히 개인적이었는데 어느 순간 그게 아니었다. <미스 함무라비>에서 시작됐을 수도 있고, <순이 삼촌>이 불을 질렀을 수도 있다. 아니면 내가 마음에 여유가 생겨서, 아니면 그저 그냥 남들 사는 거에 관심이 생긴 것 뿐일 수도 있고. 어쨌든 어느 날 <불편한 미술관>을 읽는데, 그 책은 답이 없는 불편한 질문들이 가득가득한 책인데도 불구하고 빠르게 읽었다. 그래서 책을 덮고 나서 굉장히 불편했는데 그건 그 질문들이 아니라 나를 향한 것이었다. 인권에 대해서, 인종문제에 대해서, 풍자와 혐오에 대해서, 페미니즘에 대해서, 부의 불평등에 대해서 어느 하나 가타부타 말을 하지를 못하겠는데 여간 답답하고 불편한 게 아니었다.
수잔 손택의 <타인의 고통>으로 고민에 종지부를 찍었다. ‘내가 읽지 않은 책이 많은 것 뿐이구나. 빈 수레가 요란하지.’ 이 책은 참 특별하다. 전쟁과 폭력, 그리고 사진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이 책을 설명하기보다는, ‘세계’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 했다면 읽어봐야할 책이라고 소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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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서는 표지가 고야의 동판화다.
/ 프랑스 군인들이 그림에서 그려진 것과 정확히 똑같은 잔악 행위를 스페인에서 저지르지 않았다(그러니까 그들의 희생자가 정확히 그런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았으며, 나무 옆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다)고 해서 <전쟁의 참화>가 지닌 품격이 손상될 일은 결코 없다. 고야의 이미지들은 일종의 종합이다. 그 이미지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들이 발생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한 장의 사진이나 영상 필름은 카메라의 렌즈 앞에 놓인 것을 정확하게 재현해야 한다. 사진은 뭔가를 환기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사진이 손으로 만든 이미지와는 달리, 뭔가를 증명해 준다고 여겨질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지만 무엇을 증명하는가? ... 사진에 관한 한, 모든 사람들은 전혀 융통성이 없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Everyone is a literalist when it comes to photographs. /
92쪽 3장까지 읽었다. 감수성을 휘두르지 말자 다짐했다. 북한 귀순병사의 기생충 사진 공개와 이후의 논란들이 떠올랐고 다시금 생각해보기도. 연휴가 끝날 때까지 그림도 마저 그리고 책도 다 읽을 수 있으면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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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4장을 읽었다. 세 장 정도가 (104-107쪽) 이해가 잘 안 되서 원서를 많이 참고해야 했다. 이해하고 감탄하는 데에 오래 걸렸다. 나는 이 세 장을 전쟁(war-making)과 사진 (picture-taking)이 왜 동일한 것(“shooting”)인지에 대해 차곡차곡 설명하는(쌓아가는) 것으로 읽었다.
/ 오늘날 미국이 전쟁을 일으킬 때 흔히 사용하는 방식은 이 모델이 확장된 형태이다. 정부의 통제와 자기 검열 때문에 전쟁 현장에 제한적으로만 접근할 수밖에 없는 텔레비전은 전쟁을 일련의 이미지로 다룬다. 전쟁 자체가 될 수 있는 한 멀리 떨어진 채, 가령 곧바로 중계되는 정보와 시각화 기술을 기초로 해 본토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표적을 고를 수 있는 폭격 등을 통해서 수행된다. 미국은 플로리다의 탬파에 위치한 중앙본부에서 2001년 말부터 2002년 초까지 아프가니스탄에서 매일 벌어진 폭격 작전을 지휘했다. 이 작전의 목표는 적군의 공격으로 아군이 사망할 여지를 최소한으로 줄이면서, 될 수 있는 한 충분할 만큼 적군을 사살하는 것이었다. 운송수단 상의 사고나 ‘아군에 대한 오발’로 죽은 미국과 동맹국의 병사들은 (이 완곡어법이 뜻하는 바대로) 사상자 수에 포함되기도 했고, 안 되기도 했다.
The preferred current American way of war-making has expanded on this model. Television, whose access to the scene is limited by government controls and by self-censorship, serves up the war as images. The war itself is waged as much as possible at a distance, through bombing, whose targets can be chosen, on the basis of instantly relayed information and visualizing technology, from continents away. ... /
마지막 문장의 ‘아군에 대한 오발 Friendly Fire’이 굉장히 서늘했다.
/ 감식력의 수준을 떨어뜨리는 상업적 열의로 가득 찬 문화가 이렇듯 훌륭한 감식력을 신기할 정도로 고집스럽게 추구하려 드는 것 자체가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바로 이런 고집 때문에 꼭 집어서 말할 수 없는 공공의 질서와 도리를 둘러싼 갖가 지 근심걱정과 관심사의 핵심이 흐려지게 되는 것이라는 점을 이해한다면, 상황이 이렇게 된 것도 이해가 갈 만한 일이다. 그리고 또 다른 점에서 볼 때, 이 사실은 애도하는 방법을 둘러싼 전통적인 관습을 공식화하거나 지켜낼 수 없는 [대중매체들의] 무능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보여줄 수 있는 것과 보여줘서는 안 되는 것—이 쟁점만큼 대중들을 들끓게 만드는 쟁점도 별로 없다.
This novel insistence on good taste in a culture saturated with commercial incentives to lower standards of taste may be puzzling. But it makes sense if understood as obscuring a host of concerns and anxieties about public order and public morale that cannot be named, as well as pointing to the inability otherwise to formulate or defend traditional conventions of how to mourn. ... /
‘좋은 감식력(good taste)’은 얼마나 허탈하고 웃긴 단어인지. 같은 말로는 ‘억압’, ‘본질 흐리기’, ‘능력 없음’등이 있다.
/ 주목할 만한 점은 양쪽이 모두 다 이 3분 30초 가량의 끔찍한 비디오를 일종의 스너프 필름처럼 취급했다는 사실이다. 이 비디오에 일련의 고발을 담은 몽타주(예컨대 아리엘 샤론 이 조지 W.부시와 백악관에서 나란히 앉아있는 이미지, 팔레스타인 어린아이들이 이스라엘 의 습격으로 죽임을 당하는 이미지, 팔레스타인 어린아이들이 이스라엘의 습격으로 죽임을 당하는 이미지)가 들어 있는 장면도 있었다는 사실, 이 장면이 통렬하기 그지없는 정치적 비판이었으며 무시무시한 위협과 일련의 명확한 요구로 끝을 맺고 있다는 사실을 이 논쟁 과정에서 알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모든 일이 말해주는 바는 펄을 살해한 세력들의 악의와 비타협적 태도에 맞서려면 (만약 참을 수만 있다면) 이런 고통을 끝까지 견뎌내는 것도 가치가 있다는 식의 사고방식이다. 자신의 적이 마치 먹이를 살해한 뒤 먹이의 머리채를 들어 모든 이들이 볼 수 있게 만드는 그런 야만인 같은 존재라고 여기기란 늘 쉬운 법이다.
Notably, both sides treated the three and a half minutes of horror only as a snuff film. Nobody could have learned from the debate that the video had other footage, a montage of stock accusations, that it was a political diatribe and ended with dire threats and a list of specific demands—all of which might suggest that it was worth suffering through (if you could bear it) to confront better the particular viciousness and intransigence of the forces that murdered Pearl. It is easier to think of the enemy as just a savage who kills, then holds up the head of his prey for all to see. /
4장에서 제일 인상 깊었던 부분.
<타인의 고통>은 발췌하기가 어렵다. 사진 찍듯이 읽을 수가 없고 모든 문장을 차곡차곡 쌓아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