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나선으로 걷는다 - 남들보다 더디더라도 이 세계를 걷는 나만의 방식
한수희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는 나선으로 걷는다> 한수희

책 제목을 보고 참 많은 생각이들었다. 원도 아니고 나선으로 걷는다니. 커피 한잔 기울이며 잠깐 읽어볼까 한 책이었는데 깊숙히 빠져 어느 새 책 마지막장을 넘겼다. 아, 그래. 그렇지. 등등의 짧은 탄성과 공감이 책읽는 내내 이어졌다. 그저 내 뭉뚱그려진 생각들이 한수의 작가의 머리에서 정리되고 울림이 되어 나에게까지 전해졌다. 이렇게 울림있는 작가인가? 에세이를 그닥 잘 읽지 않은 나에겐 새로운 발견이었다. 하지만 책 좀 읽는다는 사람들은 한수의 작가를 글빨 쎈 작가로 추천하며, 매거진 <어라운드>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며 고정 팬층이 있는 작가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글빨이 장난아니다. 그녀가 삶을 대하는 자세를 써둔 <우리는 나선으로 걷는다>는 그녀의 삶 속 경험과 글이 녹여있는 에세이다.

한수희 작가가 삶을 대하는 첫 번째 자세, 담담할 것.

담담하다는 말은 참 나에겐 먹먹한 말이다. 삶을 살아가는데 담담하다는 너무나 어려운 일 아닌가. 내 아무리 담담히 살아가려해도 쉽지 않은 게 현실이었다. 그래서 담담히 살아간다는 건 나에겐 "눈물 꾹 참고 버텨. 눈물은 청승이야."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한수희 작가는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었다.

우리는 나선으로 걷는다. 책의 제목이자, 소제목이었다. 사실 나선으로 걷는다는게 무슨 뜻인지 몰랐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 나온 말이었다. 항상 같은 곳에서 하는 실패. 전혀 향상되지 않고 나를 절망시키는 실패에 대한 결과. 그 와중 먹어가는 나이까지. <리틀 포레스트> 속 엄마는 결국 딸을 두고 집을 나간다. 그런 딸에게 보낸 편지 속에 엄마는 스스로 자신의 삶이 나선이었다고 말한다.

엄마는 자신의 인생이 언제나 같은 지점에서 실패한 것 같았다고 적었다. 늘 원을 그리고 있는 것 같다고도 했다. 하지만 사실은 그건 원이 아니라 나선이었는지도 모른다고 엄마는 말했다.

또 다시 실패할 거라고, 그 실패에 대한 결과는 똑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나 스스로 조차 그런 생각에 나는 도대체 향상이란게 되지 않는 인간인걸까 싶을 때가 있다. 매일 같은 싸이클의 활동, 같은 활동 범위, 매일 만나는 지루한 사람들. 그 사이에 나는 어떻게 변화할 수 있나 고민했었다. 하지만 위 글을 읽고 다시 생각했다. 우리는 나선을 걷는 것이다. 나선의 각도가 넓은지 좁인지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지금 내 나선의 각도가 좁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처음과는 큰 차이점이 생긴다. 우리는 항상 같은 지점을 돌고 있는 쳇바퀴 돌리는 다람쥐가 아니라는 것이다.

가장 많이 공감하고 아팠던 이야기들이 가득 담겨 있던 '씩씩할 것'.

마치 옆집 언니가 등 톡톡 치며 해주는 말 같았다. 나에게 씩씩하다는 말은 왠지 기운을 복돋아주고 없던 힘조차 발휘하게 만들 것 같은 단어다. 항상 엄마가 내가 우울해하고 지치면 꼭 "씩씩"이라는 단어를 붙혀 나를 응원했다. 초등학생이 아니면 굳이 쓰지 않는 단어 "씩씩". 하지만 나에겐 왜이리 가장 효과가 좋은 말일까? 아직 내가 애라서?

내가 이 파트가 가장 공감이 많이 간 이유는 첫번째, 내 침대 밑 블랙홀 때문이었다. 침대 밑 블랙홀... 가끔 침대와 바닥 사이의 틈에 내가 모르는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이 있지 않나 생각하기도 하고, 그 틈에 끝없는 어둠이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래서 침대에 누우면 그 어둠이 나를 누르고 나를 데리고 가지 않나라는 생각에 잠 못드는 날도 있다. 계속 되는 어둠의 끝이 안 보여 무섭다. (그런 의미에서 침대 밑바닥을 공간의 활용으로 서랍장으로 만들어 쓰는 건 여러가지 의미로 좋다.)

한수희 작가는 20대 갑자기 배낭을 매고 인도로 떠났다. 무언가 다녀오면 변하지 않을까, 믿음이든 무엇이든 배워올 수 있지 않을까. 새로운 누군가로 내가 변하지 않을까, 나의 미래가 확실해지지 않을까 생각하며 갔던 인도 여행. 하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고, '나'는 바뀌지 않았고, 무언가 확실해지지도 않았다.

한수희 작가는 그때의 경험으로 말한다.

"20대가 바랄 수 있는 행복이란 결국 '확실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확실해질 것이란, 블랙홀에서 건져내줄 것이라는 믿음... 하지만 우리는 달라지지도, 바뀌지도, 확실해지지도 않았다. 한수희 작가는 그러면서 그 나이때는 당연한 것이라고,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위로한다. 그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블랙홀에서 나올 준비가 아닌, 블랙홀에서조차 씩씩하게 돌아다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침대에 누워 내가 어둠에 빠져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 못드는 날은 없을 것 같다.

우아할 것.

우아하다는 말이 주는 느낌을 뭐라 표현해야 할까. 고풍스럽지만 절대 과하지 않는, 절제 있는 모습이랄까? 내가 가장 지향하는 삶의 자세지만 난 일단 외모에서 우아함과 거리가 아주 멀다. 뉘앙스나 풍기는 우아한 매력을 C언어화 하면 null이라고 뜰지도... 그나마 내가 가지고 태어났을지도 모르는 미세먼지 입자 버금가는 우아함을 발굴하고 개발하기 위해 조금이나마 마인드라도 우아하게 가져야하지 않나 생각한다.

한수희 작가의 그 삶의 자세의 우아함은 내가 정말 지향하는 우아함이었다. 특히 어른의 슬픔 부분은 먹먹할 정도였다.

어른의 슬픔은 뭘까.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는 어린 라일라의 슬픔이만 나오지 않는다. 라일라는 물론 엄마와 아빠의 슬픔이도 나온다. 하지만 어린 라일라의 슬픔이와 엄마의 슬픔이는 확연히 달랐다. 엄마의 슬픔은 강인하고 통솔력 있어보인다. 한수희 작가는 말한다. '슬픔'은 성장한다. 어린 라일라의 소극적인 슬픔이가 아무것도 못하고 울기만 한 존재에서 슬픔도 필요하며, 기쁨과 슬픔이 함께할 때 우리가 성장한다고 말하고 있다. 슬픔과 우리는 같이 성장한다. 더이상 떼쓰지 않고, 힘들다고 지쳐 울어버리지 않는다. 오히려 강인하고 슬픔 속에서도 어떻게 자신을 위로해야하는지 알게 된다. 어른의 슬픔이란 그런거다.

"용기를 주렴. 바꿀 수 있는 걸 바꿀 수 있는 용기와 바꿀 수 없는 걸 받아들이는 마음의 평정을. 그리고 그 차이를 아는 현명함을 말이야."

그 슬픔을 받아들이며, 슬픔과 기쁨을 공존하게 할 수 있는 그 상태. 우리는 이제 어른이 되어간다.



어른이 된다는 건, 어쩌면 참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어른이 된다는 건 추운 겨울을 혼자 보내는 일이라고 한다. 참 고독하고 슬픈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혼자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가 도와줄 것이며, 많은 사람들이 응원할 것이다. 이미 어른이 된 사람들은 우리를 측은하게 보면서도 기특하게 바라볼 것이다. 그녀가 나에게 응원하는 사람이다. 내 옆은 아닐지언정 어딘가에 나와 같은 존재가 있음을 알려주는 사람이다. 그녀의 책이 내가 혼자가 아님을 가르쳐줘 기뻤다. 블랙홀에 나 혼자 갇힌게 아니라 안도했다. 내 옆에 누군가 있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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