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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의 생각 > 오역을 어떻게 볼 것인가? (댓글:7, 추천:12)
2006-02-12 21:01

 

 

 

 

주말 자투리 시간에 박상익 교수의 <번역은 반역인가>(푸른역사, 2006)를 읽었다. 4/5쯤 읽었는데, 번역 문제라는 '뜨거운 감자'에 대해서는 나중에 보다 진지하게 다룰 생각이다. 어쨌거나 저자의 과감하고 열성적인 문제제기가 반가웠고 다루어지고 있는 사안의 새삼스러움에 착잡했다. 번역 문제에 '감'이 없는 교수들이나 관료들께서 많이 읽어주었으면 싶다. 하지만, 젊은 인문학도들이 이 책을 읽는 건 말리고 싶다(우리의 '착잡한' 현실에 도전욕보다는 환멸감을 먼저 느끼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이다).

문득 번역 문제의 한 파트인 오역의 문제에 대해서 이전에 써둔 게 생각이 나 여기에 옮겨둔다. 재작년 5월에 쓴 것인데, 모스크바에서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새물결, 2001)을 우연한 계기가 읽다가 눈에 띈 오역들을 지적하게 됐고, 거기에 대해서 두 가지 ‘인상적인’ 반응이 있었다. 하나는 (전혀 예기치 못했던) 역자의 반응이었고, 다른 하나는 한 독자의 반응이었다. 개별적인 사례이지만, 일반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듯하여 이 자리에서 '재탕'해둔다. 당시에도 적었지만, 상당히 ‘공격적인’ 비판에 대해서 (반)공개적으로 해명을 한다는 것이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텐데, 내가 제기했던 의문들에 대해 성의 있는 답변을 주신 역자께 다시금 감사드린다. 

(나의 의문에 대한) 역자의 해명은 (1)(공동번역이 아닌가 하는 의혹에 대해) 3년간에 걸친 단독번역이라는 것과 (2)(작품명 등의 혼동/혼란에 대해서) 편집과정에서 빚어진 실수들이 포함돼 있다는 것, (3)(그럼에도) 모든 오역에 대한 책임은 역자에게 있다는 것, (4)(희박해 보이긴 하지만) 재판을 낼 경우, 오역들이 수정될 수 있도록 출판사측에 건의하겠다는 것, (5)(책의 나머지 장들에 대해서도) 계속적인 지적을 바란다는 것 등으로 요약된다(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의 ‘기억’에 따른 것이다).

먼저, (1)에 대해서는 역자의 ‘고투’ 대해서 사의를 표한다. 아마도 눈치 빠르게 이 책의 판권을 입수한 출판사측에서(현재 국내 출판계에서 지젝은 그 ‘난해성’과 무관하게 ‘상종가’이다. 다시 말해서, 그의 모든 책이 앞으로 번역/소개될 수 있다!) <삐딱하게 보기>의 역자를 번역의 적임자로 낙점했던 듯싶다. 소위 지젝 전문가가 있는 상황도 아니었으므로 그건 자연스런 선택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게 2001년 하반기에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 내가 가졌던 생각이기도 하다(그건 ‘번역이 그다지 나쁘진 않겠구나.’라는 안도감을 내포한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지젝의 책으로선 비교적 쉽다는 ‘영화책’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얘기일 뿐이고(해서 어떤 경우에도 지젝의 책이 촘스키의 책처럼 팔리거나 읽히길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이라크’에 대한 책이라 하더라도), 거의 ‘고공비행’ 수준의 이론적 담론을 제대로 포착해서 격추하기란, 즉 제대로 소화해서 번역하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사실 지젝을 읽는 즐거움은 그러한 난해한 이론/담론들의 ‘액츄얼리티’를 맛볼 수 있다는 데 있지만. 하여간에 비록 오역들을 지적하긴 했어도, 그런 이유 때문에 나라도 이 번역에 선뜻 나서지는 못했을 것이다.

부르디외 전공자의 부르디외 번역이 상식 이하라거나(그래도 부르디외 연구서를 낸다!) 크리스테바 전문가의 크리스테바 번역이 기대 이하라는 것이 우리의 번역 현실이다(그래도 크리스테바 연구서를 낸다!).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앉아 있어도 대충 ‘존경’받을 교수들이 굳이 번역이란 ‘고투’에 나선 데 대해서 비난만 할 수는 없다(물론 이런 경우 못 믿을 건 번역서들보다도 그 ‘놀라운’ 연구서들이지만).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전공자’나 ‘전문가’란 타이틀의 ‘허명’에 대한 부수적인 깨달음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굳이 그러한 오역들에 대해서 ‘인내’하지 못하고, 속된/헛된 ‘분별’에 나서는 것은 대략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첫째는 저작권 보호법이 걸려 있기에, 한번 출간된 인문 번역서가 재번역/재출간되기를 기대한다는 것이 상당히 무망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한번 오물을 뒤집어쓰게 되면 다시 손써볼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이건 역자들로서도 안타까운 일일 것이다). 저작권이 적용되지 않는 고전의 경우라면 사정이 다르다. 나이브하게 말해서, 엉터리 번역서들이 난무해도 된다(나는 이 책들의 오역에 대해서는 크게 문제삼지 않는다). 거기에 들인 사회적 비용이 아깝긴 하지만, 다시 제대로 번역하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문 ‘이론서’들이 그런 기회를 잡을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다. 지젝의 <향락의 전이> 국역본은 정말 그런 희박한 가능성을 붙잡았지만(그런 사례로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도 들 수 있다) 내차버린 경우이다(역자도 번역만 하지 않는다면 정신분석 ‘전문가’로서 충분히 존경받을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는).   

둘째는 인문학 자체/전체를 희화화하기 때문이다. 인문학의 기본은 말(로고스)에 대한 사랑(필로스)이며 존중이다. 그 유구한 언어적 전승 속에서 거장들의 내면적 고뇌와 사유의 높이가 언어에 의해, 혹은 언어 자체로서 우리에게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하지만, 오역에서 우리는 이러한 ‘경이’는커녕, 짜증(‘고뇌’ 대신에)과 장벽(‘높이’ 대신에)만을 경험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것은 말에 대한 사랑과 존중을 헌신짝처럼 내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대상언어뿐만 아니라, 우리말에 대한 사랑과 존중도.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것은 이따금 이런 염치없는 오역서들을 통해서 젊은 대학생들이 ‘인문학에 대한 이미지’를 갖게 된다는 점이다. 물론, 그런 경우 그들은 인문학을 포기하거나(“그 책 너무 어렵던데요. 제가 머리가 나쁜가봐요.”) 무시하게 된다(“인문학? 맨날 괜히 밥 먹고 알지도 못할 소리나 해대는 거 아닌가요?”). 서로 짝패인 이 포기/무시가 이들의 탓인가? 인문학을 배우고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이런 반응들을 접할 때마다 안타깝고 화가 난다. 그리고 전의를 다지게 된다. 앉아서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으므로. 말로는 인문학을 한다는 인문학의 배덕자들에게…

다시 <히치콕>의 경우. 내가 앞에서 얘기한 것은 오역의 일반론이지 이 책이 오물의 범벅이라고 얘기하는 건 결코 아니다. 역자의 해명 이전에도 나는 이 책이 ‘읽을 만한’ 책의 범주에는 든다고 분명히 밝혔다. 그리고 다른 책들에 비해서 특별히 오역이 많은 것은 아니란 점도.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다른 번역본(‘러시아어본’이나 ‘영어본’)을 참조하지 않는다면, 이 책을 읽어나가기 힘들었을 것이다. 분류하자면, 그런 도움 없이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번역이 ‘좋은 번역’이고, 그런 도움과 함께 읽을 수 있는 책이 ‘읽을 만한’ 번역이며, 차라리 안 읽는 게 더 이해에, 그리고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는 번역이 ‘나쁜 번역’이다. 물론 나쁜 번역의 경우에도 반면교사로서, 오역의 교보재로서 충분히 활용될 수 있는 여지는 있다.

어쨌든, 아무리 ‘적임자’에다가 ‘경험자’라 하더라도 ‘영화학’을 전공한다는 이유만으로 지젝의 ‘영화책’을 누워서 떡 먹기로 번역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건 철학 전공자, 심지어 정신분석 전공자였더라도 마찬가지였을지 모른다. 작년 내한 강연 때의 번역문들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인데, 그 번역문들이 올 가을쯤에 어떤 모양새로 출간될지 나는 (벼르면서) 기다리고 있다(복사된 유인물에서의 오역과 정식으로 출간된 책의 오역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물론 곧 쏟아져 나올 ‘지젝들’에 대해서도 나는 기대와 우려를 함께 가지고 있다.

다시 돌아가서, 요컨대, 지젝의 책을 번역하면서 일부 오역을 한다는 것은 역자 개인의 ‘역량’에서만 비롯되는 문제가 결코 아니다. 그건, 현단계 우리 인문학 수준, 조금 좁혀서 인문서 번역 수준의 문제이고(지젝을 번역할 만한 지적 토양과 ‘언어’가 아직 우리에겐 잘 준비돼 있지 않다), 우리 출판계의 총체적인 번역 여건과 (출판)역량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말해서, 우리 인문학계와 출판계는 좋은 번역을 위해서 얼마나 투자하고 있을까? 번역에 대한 학계의 무관심은 이미 ‘관행’이 되어 있으므로 길게 늘어놓을 것도 없고(북매거진 <텍스트>의 지적을 옮기자면, “(우리 학계는) 다른 지식인의 논문이나 외국 문헌을 베끼는 ‘표절’은 예사이고, 응당 책임져야 할 ‘번역’도 나 몰라라 하면서 숨겨둔 무공비급인양 ‘원전’을 활용한다.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는 데 힘써야 할 학회는 조폭처럼 치열하게 지역(나와바리)을 관리하고 소속원을 비판하면 떼거리로 몰려가 비판자를 공격한다. 그러다보니 자기 지역을 침범하지 않는 이상 상대방에 대해 침묵하는 ‘기묘한 공존’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더 안타까운 점은 이런 부패가 소위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번역자들을 ‘등쳐먹고’ 사는 출판계는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있을까?

<히치콕> 번역을 예로 들어보자면, 이 책이 재판을 찍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략 3,000부를 찍었다고 할 때, 역자의 몫으로 돌아가는 번역 인세(대박이 안 날 만한 책들은 다 인세이다)는 17,800원(도서정가)*0.07%(인세)*3,000(부수)=3,738,000원이다. 물론 이건 내 추측이고, 실제와는 약간 차이가 있겠지만(*실제로는 훨씬 적은 액수의 번역료를 받았다고 한다), 개정판이 나올 가능성은 별로 없다는 역자의 예상을 고려하면, 그 차이는 크지 않을 거라고 본다. 그러니까, 대략 400만원 이하의 번역료를 보수로 받는 셈이다. 그러니까, 한 달 정도에 이 책의 번역을 해치울 수만 있다면, 그럭저럭 ‘수지’를 맞출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내가 보기에 이 책의 견적은 최소한 하루에 10시간씩 두 달 꼬박이다. 그것도 영화학과 근대철학, 그리고 정신분석학에 대한 ‘예비학습’이 얼마간 되어 있다는 전제하에서. 그리고 물론 번역 중에라도 구할 수 있는 히치콕의 영화들은 다 구해서 보는 편이 오히려 시간을 절약하도록 해줄 것이다(물론 이 비용은 역자 부담이다). 그렇게, 두 달 동안을 이 책에 전념할 때 받을 수 있는 보수가 한 달에 200만원이 안된다(대개의 인문서 번역 형편이 그렇다). 당신이라면 이 ‘자원봉사’ 수준의 번역을 하겠는가?

 

 

 



따라서, 3년에 걸쳐 <히치콕>의 번역이 이루어졌다는 역자의 고백을 그의 게으름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역자후기에 따르면, 이 번역은 “아내와 엄마로서, 선생이자 학생으로서 거의 분열적으로 살아가는 옮긴이”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남편과 아빠로서, 선생이자 연구생으로서의 분열적인 삶을 정상인양 살아온” 나는 5년 전에 맡은 번역도 아직 끝내지 못하고 있으므로 ‘게으름’으로만 치자면 내가 한 수 더 위이지만, 거듭 말해서, 그건 ‘게으름’만의 문제가 아니다. ‘여건’의 문제이다. 아주 실제적으로 말해서, <히치콕> 같은 경우 적어도 6개월간 매월 200만원 정도의 수입이 보장될 경우에나 번역에 전념할 수 있고, 제대로 된 번역이 나올 수 있다(*물론 학술진흥재단 등에서 번역지원 사업을 벌이고는 있지만, 박상익 교수의 지적대로 1년간 지원총액이 강남의 아파트 한 채 값 정도에 머문다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하긴 월터 카우프만의 <인문학의 미래>는 대표적인 우리말 오역서의 하나이다!).

가령, 한국학술진흥재단에서 박사연구자들을 위한 프로젝트를 공모하는바, 채택될 경우 매월 200만원씩 1년간 지원을 받는다. 그리고 그 지원에 대한 의무는 등재학술지에 한 편의 논문을 발표하는 것이다. 나는 우리 인문학계에서 제대로 된 <히치콕> 번역(400쪽)보다 더 많은 피와 땀을 요구하는 ‘논문’(30쪽)이 년간 과연 몇 편이나 될지 의심스럽다. 그러니 (논문을 쓰는 대신에) 누가 (바보같이!) 번역을 하는가? 번역이나 하고 있는가? 이러한 여건 때문에 ‘악순환’이 생기는바, 번역에 대한 사회적 (상징계의!) 무관심과 ‘부적절한’ 보수 때문에 번역의 질이 떨어지고, 번역의 질이 떨어지기 때문에 번역에 대해 신뢰가 형성되지 않으며(책을 사보질 않는다), 신뢰가 없기 때문에 번역에 대한 사회적 무관심과 냉대가 정당화되는 것이다(그래서 책을 많이 찍지 않는다). 그러니, 다시 번역자에게 제대로 돌아갈 몫이 없는 것이고. 해서 또 ‘저렴한’ 보수에 맞춘 때우기식 번역이 양산될 수밖에… 이 악순환의 고리를 어디에서 끊어야 하나?

내 생각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한 가지 방법은 여건이 좋아지길 기다리는 것이다(여건이 문제라고 했으니까). 기다리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번역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고조되고(아예 번역학과가 생기고, 번역가가 최고 유망직종이 되는 등) 번역자에 대한 대우가 달라질지(그래서 번역자들이 다 외제차를 타고 다닐지) 누가 알겠는가?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고, 아마 아무도 관심을 안 가질 만한 일이다. 어쨌거나 ‘그런 무관심을 딛고’ 여전히 고도(Godot)를 기다려 볼 수는 있으리라.

그리고, 다른 한 가지 방법은 번역자들이 알아서(아쉬운 사람이 우물 파듯이) ‘어려운 여건을 딛고’ 번역의 질을 좀 높이는 것이다(이런 걸 ‘살신성인’이라고 한다). 그래서, ‘경이로운’ 번역서들을 턱턱 내놓음으로써, 독자의 발길을 되돌림과 동시에 번역을 무시하던 이들의 코를 좀 납작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 전에 번역자 조합을 만든다는 전제하에서) ‘번역자 조합’의 조합원 결의를 통해서 일제히 ‘파업’에 돌입하는 것이다(나 또한 번역을 했고, 또 하고 있으므로 그 조합원의 자격을 갖고 있다). 번역자 인권과 제대로 된 보수를 보장받기 위해서. 번역자 시국선언과 양심선언이 뒤따르고, 한 번역자가 한강에 투신하는 등등…

어느 쪽이 더 리얼하고, 덜 리얼한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기겠다. 물론 가장 좋은 건, 두 가지가 상호 상승작용하는 것이다. 가령, 번역자들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 얼마나 고투하고 있는지가 TV에 방영되고, 거기에 연이어 사회적 관심이 갑자기 증폭되면서 번역자들을 위한 성금(지원금)이 물밀듯이 기탁되고 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그 기폭제가 번역자들의 ‘고투’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현단계 부실 번역의 책임을 사회적 여건의 탓으로 돌리면서도 번역자들의 책임 또한 강조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동료 번역자들의 노고에 경의와 동정을 표하면서도, 우리 스스로를 더 채찍질하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달리는 말끼리 서로 더 채찍질을 하는 것은 더 잘 달려보자는 뜻이지, 가긴 어딜 가냐는 뜻이 아니다.

그리고 (2)에 대해서. <히치콕>의 경우에 동일한 영화명이 다르게 번역된다든가 하는 실수는 역자의 실수였다 하더라도 편집/교정 과정에서 다 체크되어야 하는 문제이다. 편집/교정자가 눈대중으로 책을 읽는 사람을 뜻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도 ‘여건’의 탓이 크다. 편집/교정자들이 극빈층의 보수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니까(그들의 ‘직업적’ 매저키스트 성향은 사회심리학적 분석대상이다). 그러니까, 그들로서는 두 눈 부릅뜨고 책을 볼 만한 여건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편집/교정자들에게도 다른 방도는 없어 보인다. 눈 빠지게 일하면서 빨리 그들만의 조합을 만드는 수밖에.

 

 

 



가령, <히치콕>의 46쪽에서 <히치콕의 스트레인저>로 출시돼 있다는 은 전부 <스트레인저>로 옮겨지고 있는 다른 대목들과는 달리 <열차 속의 이방인>으로 번역돼 있다(사실 이게 더 맘에 들지만). 이런 사례들 때문에, 나는 복수의 역자가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했었는데, 그건 알고보니 ‘분열적인’ 역자 한 명의 ‘오점’ 혹은 ‘얼룩’이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역자가 이런 영화명을 비롯한 고유명사들을 번역과정에서는 그냥 원어로 놔두었었는데, 나중에 (자료조사 등을 한 다음) 알아서 처리해야 할 편집진에서 제대로 일처리를 하지 않은 것. 그리고 다른 가능성은, 역자가 불우한 여건 속에서 정신없이 번역하느라 이렇게 저렇게 옮긴 것을 편집진에서 제대로 체크하지 못한 것.

사실, 이런 사례는 굉장히 사소한 것이지만(잘된 번역에서라면, ‘즐거운’ 옥에 티에 불과하다), 번역이 꼬이게 되면 그에 대한 신뢰를 무섭게 잠식해가는 계기가 된다. ‘의혹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하는 것이다(요컨대 역자나 교정자가 독자만큼도 책을 세심하게 읽지 않은 것이 되기 때문에). 물론, 편집/교정자들이 박봉에 ‘고투’하고 있다는 건 이미 언급한 대로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실수’가 면책되는 것은 아니다. 아니, 이건 책임 이전에 ‘자존심’의 문제이다. 내가 읽고 이해할 수 없는 책, 완벽하다고 내가 자신할 수 없는 책을 내지 않겠다는 것. 그게 ‘자존심’이다. 물론 이런 자존심을 격려하고 북돋아주는 것이 출판사의 사장과 편집장 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의 하나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3), (4)에 대해서는 특별히 덧붙일 말이 없다. 안면도 없는 역자를 난데없이 난처하게 만들었으니까 한편으론 내가 미안할 따름이다. 바라건대, 개정판을 찍었으면 하지만(그러자면 역설적이게도 많이 읽혀야 한다!), 많이 팔린다는 ‘지젝’이 그럴 형편이 아니라면…

결자해지, 매듭은 묶은 사람이 풀어야 한다고,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서라도 책의 나머지 장들에 대한 ‘독해’는 계속될 것이다(*실제로 계속됐었다). 다만, 다른 사정들도 있기 때문에, 그것이 언제 마무리될지는 아직 장담할 수 없다. 이것이 (5)에 대한 나의 응답이다. 물론 한두 장씩 읽으면서, 영화를 보지 않고 이 책을 읽는 것이 얼마나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인지 실감하고 있지만…



그리고 두번째로, 한 독자의 반응. 그것은 (1)(오역에 대한 지적들을) 관심 있게 읽고 있다는 것, (2) (하지만 번역을 기피하는 풍조 속에서) 자칫 ‘인신공격’적일 수도 있는 지나친 비판은 ‘역효과’를 낼 수도 있다는 것으로 정리될 수 있다(*박상익 교수도 이런 문제는 조용히/넌지시 처리하는 게 더 효과적이라고 충고한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짤막하게 나의 의견을 밝혔지만, 보다 상세한 의견 개진이 필요한 것 같아서 따로 자리를 마련한다.

번역/오역을 ‘응시’하는 나의 자리는 이중적이다. 그것은 (1) 같은 번역자, 즉 동업자로서의 자리와 (2) 일반 독자로서의 자리이다. 그리고 이 자리들에 따라서, 이미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공식적인’ 명분에도 불구하고, 번역/오역에 대한 태도는 상당히 달라진다. 내가 분열적인가? 언젠가 밝혔지만, 나는 (별로 안 팔린 책이지만) 번역서를 낸 바 있고(러시아 소설이다), 또 현재 번역중인 책이 있으며(러시아 소설이다), 앞으로도 기회가 닿는다면(여건도 좋아져야겠지만!) 얼마든지 다른 종류의 인문서 번역에도 참여할 예정이다(서너 권 정도 검토중에 있다). 또 이전에 번역 스터디에도 여러 번 참여한바 있으며(가다머와 리쾨르, 에코, 굿맨 등의 번역이었는데, 완역/출간되지는 않았다), 교정이나 잡스런 번역에도 적잖게 동원되었었다(바흐친, 로트만 등). 요컨대, 나는 이 분야의 문외한이 아니다. 해서, “(그렇게 잘났으면) 옆에서 비판만 하지 말고, 직접 나서보지 그러느냐”는 식의 간혹 ‘뒤로 듣는’ 비아냥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나는 뒷짐지고 옆에만 있는 것이 아니므로).

<에크리>(라캉)와 <피네간의 경야>(조이스), <구조적 안정성과 형태발생>(르네 톰) 등의 ‘숭고한’ 책들을 번역하는 일만 아니라면(그건 나의 능력에 부치는 일이다, 마치 박상륭의 <칠조어론>을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일처럼. 대신에 ‘교정’해 볼 생각은 있다. 그럴 만한 능력은 있다고 생각하므로), 여건이 허락하는 한, 나는 어떤 번역에도 도전해볼 의사를 갖고 있다(번역이란 언어를 통한 존재의 전이라는 ‘사건’이다. 그러한 ‘전이’에, ‘사건’에 어찌 무관심할 수 있을까?). 어쨌든, 이러한 ‘번역자’의 입장에서라면, 가급적 ‘동료’의 ‘실수’ 등에 대해서는 눈감아주는 것이 ‘의리’이다. 그리고 그것이 나 자신을 위해서도 유리하다. 동료 의사의 실수를 의사들이 눈감아주고, 동료 변호사의 비리를 변호사들이 눈감아주는 것처럼. 적당히. 좋은 게 좋은 거니까! 그리고, 실수는 누구나 하는 거니까. 그만한 일로 낯을 붉히는 건 서로에게 유익하지 않으니까. 나도 ‘한국인’으로서 그 정도의 ‘상식’은 갖고 있다.

그런데, 그게 ‘번역자’가 아닌 ‘독자’의 자리로 오게 되면, 전혀 문제의 양상이 달라진다. 번역자는 같은 업종의 ‘공급자’로서의 동일한 이해관계를 갖지만(간혹 불일치할 수도 있다), ‘독자’로서의 나는 ‘소비자’로서 ‘공급자’인 번역자와는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는다(물론 일치한다면 더 좋겠지만). 이건 기본적으로 기브 앤 테이크의 관계, 주고 받는 관계이다. 독자로서 내가 읽는 책은, 누구한테 기증 받은 책이 아니라, 내 돈 주고 산 책이다(이 책에 대한 과도한 지출 때문에 나는 더러 수모도 당한다!). 그리고 그 돈은 어디 가서 주워온 돈이 아니다(김훈의 <밥벌이의 지겨움>을 보라)!

때문에, 내 돈 주고 산 책이 엉터리라거나 불성실하다면 그건 관용의 윤리로 접근할 수 있는 문제가 결코 아니다(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다!). 그건 ‘공급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일종의 ‘사기’니까. 내가 지젝을 샀는데(나는 지젝을 좋아한다!), 뜯어 읽어보니까 지젝이 들어 있는 게 아니라, 무슨 ‘수작’이 들어 있다면(그래서 ‘지젝’을 망쳐놓았다면) 관대한 당신은 그냥 그럴 수도 있는 거라며 넘어가는가? 당신이 비싼 돈을 주고 이브닝 드레스를 샀는데, 알고 보니까 남대문 시장에서도 파는 ‘짜가’였다면, 그런데 반품도 안된다면, 그래도 당신은 울며 겨자먹기로 그냥 넘어가는가? 있는 건 돈밖에 없으므로? 그냥 모르고 입고 다니는데, 그걸 굳이 ‘짜가’라고 옆에서 찔러주는 친구가 있다면, 그런 ‘못된 친구’와는 차라리 절교할지언정 그걸 만들어 판 사람에게 무슨 잘못이 있나, 모르고 산 내가 잘못이지, 라고 생각하는가?

해서 사정은 복잡한 듯하면서도 아주 단순하다. 물론 번역서의 경우, 최종적인 책임은 번역자(피고용인)가 아닌 출판업자(고용주)에게 있다. 하지만, 역자 후기 등에 ‘사장님’에 대한 감사가 곧잘 언급되더라도, 책의 표지에는 저자와 함께 역자의 이름이 박힌다. 그건, 적어도 책의 만듦새는 출판사에서 책임지지만, 내용만큼은 역자가 책임을 감수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공급자(번역자)-소비자(독자) 간에는 일종의 거래가 성립되는 것이고, 이 거래에는 아주 기본적인 윤리가 개입한다. 제값을 치르고, 제값의 내용(읽을 거리)을 공급받는다는 것. 그리고 만약, 서로에게 제값이 아니었다는 게 밝혀지면, 이건 상대방에 대한 ‘기만’이자 ‘모욕’이다(당신은 그냥 대충 이 정도 수준에서 읽고 떨어져라? 나도 어려운 책이니까 그냥 구경이나 하고 말지 그래?). 오역에 대한 나의 지적/비판은 그런 기만/모욕에 대한 대응이고, 응전이다.



오역에 대한 그간의 지적이 지나치게 신랄해서 간혹 ‘인신공격’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한 독자의 반응 때문에 하게 됐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의 발단이 ‘공격을 위한 공격’이 아니라 ‘방어적인 차원’의 공격이라는 점이며(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 또 그런 부실한 책들을 읽게 될 것이다), “이렇게 번역하다니, 당신 바보 아니냐?”는 식의 어조는 내가 받은 ‘모욕’(이렇게 번역해도 바보들이 뭘 알겠어?)과 금전적 손실(수입만을 따지자면, 나는 빈곤층에 속하는 시간강사이다. 소위 '화이트 프롤레타리아'이다)에 대한 대응으로서는 그래도 소심한 편에 속한다는 점이다(이 생각을 하면 다시금 분노가 솟구친다. <킬 빌>을 다시 봐야겠다!). 고작 카페 한두 곳과 인터넷 서점 한 곳에 ‘의견’을 올리는 게 내가 하는 일의 전부 아닌가?

그로 인한 역효과?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역효과는 ‘인신공격’을 받은 번역자들이 ‘은퇴’하는 것이 아니라, 더 열성적으로 ‘현역’에서 활동하는 것이다. 즉 부실 번역들을 계속 양산해내는 것이다(게으른 자들에게 축복을!). 그런데, 그것은 동시에 나의 지적/비판의 정당성을 더 확증해 줄 것이기 때문에(“욕먹을 만하군!”) 그들의 전략이 궁극적으로 성공할 거 같지 않다. 그러니 내가 그 역효과에 대해서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닌 듯하다. 물론 잘못된 역자를 만난 몇 권의 책들이 더 희생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안타깝지만. 그리고 만약에, 그들이 자존심을 회복해서 더 좋은 번역서로 ‘컴백’한다면, 그건 크게 환영할 만한 일이며 이건 ‘역효과’가 아니라 ‘효과’이다.

나는 단지 (애서가로서!) 내가 사랑해마지 않는 ‘책’에 대해서 근심할 따름이며, 그에 대해서만 말할 따름이다. 내가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이유도 없이 욕할 이유는 전혀 없다. 나는 모든 오역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와 함께 제대로 된 번역에 대한 나의 의견을 밝혔다(그리고 그에 대한 반박 중 수용할 수 있는 부분들에 대해서는 수용하기도 했다). 물론 (나를 포함해서) 번역자도 실수를 한다. 그런데, 그건 번역자 자신이 가장 잘 알아야 정상이다(독자의 입장에 서서 한번만 읽어보면 알 수 있으니까). 번역자 자신이 그 책을 가장 깊이 있게 읽기 때문이고, 또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대충 둘러대고, 틀어막고, 얼버무리고, 살짝 빼고 한 내용들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번역자 자신일 수밖에 없다. 그걸 모른다면, 번역자로서는 수준 이하이고, 자격 미달이다(이런 번역자들에겐 ‘인신공격’도 부족하다).

거꾸로, 어느 정도의 수준과 자격을 갖춘 번역자에게서라면 문제가 되는 것은 그의 ‘역량’이라기보다는 ‘성의’이다(‘여건’이란 건 이 ‘성의’를 끌어내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요컨대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이다. 긍정문이 부정문으로 바뀐다거나 문맥상 전혀 맞지 않는 내용이 이어진다거나 고유명사 표기를 헷갈리게 한다거나 우리말 문법에 맞지도 않는 문장을 쓴다거나(통사론적으로나 의미론적으로) 하는 따위들은 대개 고등교육을 받은 번역자들로서는 능히 피해갈 수 있는 것들이다.

따라서, 내가 비판하는 것은 그의 무능력이 아니라 고집스런 불성실과 아집, 그리고 부정직이다. 대충 얼버무리고, 황당한 걸 갖다붙이고, 자신이 이해가 안 돼도 넘어가는 태도 말이다. 내가 문제삼는 것은 그런 노력하지 않는 태도, 거만하고 방만한 태도이다. 독자가 무서운 줄 안다면, 그런 식으로 함부로, 대충 번역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자신도 이해가 안되는 책을 번역해서 출간하는 만용을 부리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나쁜 번역서’들을 두고 하는 얘기이다). 그게 독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다.

 

따라서, 한 독자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독자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은 부실한 번역서들에 대해서까지 “왜 그렇게 하셨어요? 감히 말씀드리거니와, 저라면 이렇게 옮겨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한번 봐주시겠어요?…”라는 식으로 예의를 갖출 생각을 나는 갖고 있지 않다. 사실, 그런 똘레랑스(불간섭의 관용주의)야말로 지젝 자신이 경멸해 마지 않는 태도이다(그가 가장 맘에 들어하는 영화 중의 하나가 <파이트클럽>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회피하거나 얼버무리지 않고, 외상적 실재와, 혹은 적대(나는 상냥하게 말하지 않는다!)와 직접 대면하는 것이다(이른바 ‘실재의 윤리학’이다). 오역의 실상과 직접 대면함으로써만, 그런 자극과 충격을 정면으로 응시함으로써만, ‘나의 번역’은 개선될 수 있다. 창피하다거나, ‘인신공격’이라거나 하는 것은 부차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야기가 길어졌다. 이 참에 오역의 문제에 대한 나의 의견을 확실히 밝혀두고자 해서 이런 글을 쓰게 됐다. 결론은 독자에 대한 번역자의 예의란 것인데, 사실 거기에 덧붙여 ‘책에 대한 예의’ 또한 나로선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여기선 더 부연하지 않겠다. 다만, “복사된 유인물에서의 오역과 정식으로 출간된 책의 오역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라는 말에서 그러한 생각을 유추해볼 수 있을 것이다. 부실한 번역의 엉터리 책들은 도색잡지보다도 부도덕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기본적으로 책은 고급 누드집만큼이나 아름답고 숭고한 것이며, 그러해야 한다.



끝으로, 나쁜 번역서들만 판치는 건 아니라는 점을 밝혀두기 위해서, (드물긴 하지만) 좋은 번역서들에 대한 옹호도 곁들인다. 내가 직접 읽은 한정된 범위 내에서 말하자면 <데리다와 예일학파>(문학동네)나 <니체-데리다, 데리다-니체>(책세상) 같은 건 좋은 번역서였다(후자는 내가 갖고 있던 영역본을 불필요하게 만들었다). 역자들은 모두, ‘관행적으로’ 존경받는 교수들이 아니라 박사과정에서 ‘어렵게’ 공부하는 사람들이다. 이 책들에서도 약간 미심쩍은 곳(동의하지 않는 곳)이나 오타 등을 발견할 수 있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옥에 티에 불과하다. 해서, 나는 이들 번역자들의 이름을 기억해 두고 있으며, 그들의 또 다른 번역서들까지도 주목하고 있다. 다른 번역서들에서도 그러한 역자들이 속속 나오기를 기대한다…

06. 02. 12.



마이페이퍼 링크 주소 : http://www.aladin.co.kr/blog/mypaper/818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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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지젝이 추천하는 라캉 필독서

저녁을 조금 일찍 먹고 돌아오니 책상에 작은 소포가 놓여있다. 물론 책이다(오늘도 세 개를 받았다). 아마존에서 온 걸 뜯어보니 얼마전에 소개한 바 있는 지젝의 <라캉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2007)가 들어 있다(*들은 바로는 국역본이 곧 나온다고 한다).

이미지보다 별로 크지 않은 '포켓북'이다(한동안 전철에서 읽을 책이 정해졌다!). 지난 3일에 주문을 했으니까 보름 정도 걸린 셈이다. 책값보다 배송비가 더 비싸니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경우이지만(합계 21.9불이다), '지젝'이라서 참아두기로 했다(이 시리즈의 최신간은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이며 나는 도서관에 구입신청을 했다).  

Этика психоанализа. Семинары. Книга 7. (1959-60)

이런 입문서들이 대개 그렇듯이 색인 앞에 붙은 마지막 장은 추천도서 목록이다. 라캉에 대해서라면 물론 <에크리>와 <세미나>를 읽어야 한다. 지젝의 권고는 반드시 둘다 읽어야 한다는 것인데, 어느 하나만 읽어서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을 거라는 게 지젝의 설명이다. 그러니까 둘을 겹쳐서, 잇대서 읽어야 하다. 사위인 밀레르가 편집하고 있는 라캉의 <세미나>는 국내에 단 한권도 출간돼 있지 않지만 불어로는 절반 이상이 출간됐으며 영어로는 1-2년의 터울을 두고 계속 번역되고 있다. 러시아어로 가장 최근에 나온 건 <세미나7: 정신분석의 윤리>(2006)이다.

 

 

 

 

지젝의 설명에 따르면 예컨대 이 <세미나7>과 <에크리>에 실려 있는 '칸트와 함께 사드를' 같은 글을 같이 읽어야 한다는 것(물론 우리로선 그런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 <세미나>건 <에크리>건 번역돼 있지 않으니까. 몇 편의 글이 <욕망이론>(문예출판사, 1994)으로 번역돼 있으나 불어본 <에크리> 이상으로 읽기 어렵다(이루어지지 않는 게 욕망이라지만 라캉 읽기에 대한 욕망만큼 이를 실증해주는 게 또 있을까?). 거기에 비하면 지젝은 얼마나 경쾌하며 이해하기 쉬운 것인지!

이어서 지젝이 제시하는 최고의 2차 문헌들(지젝은 이하의 책들을 화끈하게 'the best'라고 소개한다). 몇 권은 그래도 국내에 소개돼 있어서 나의 손끝이 가볍다. 제일 먼저, 가장 짧은 최고의 입문서는 숀 호머의 <라캉 읽기>(은행나무, 2006). 그리고 라캉 임상에 관한 최고의 입문서는 브루스 핑크의 <라캉의 정신의학>(민음사, 2002)과 다리언 리더의 <왜 여자들은 부치는 편지보다 더 많은 편지를 쓰는가?>(1996). 목록에서 내가 안 갖고 있는 유일한 책이다(몇 달전에 도서관에 주문해놓았지만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다리언 리더는 국내에 소개된 <라캉>(김영사, 2002)의 저자이다.

 

 

 

 

라캉과 철학에 대한 에세이는 조안 콥젝의 <나의 욕망을 읽어봐>(1994)와 알렌카 주판치치의 <실재의 윤리>(도서출판b, 2004). 콥젝의 책은 아직 번역되지 않았지만 <여자가 없다고 상상해봐>와 함께 근간 예정인 것으로 안다(콥젝의 글은 <성관계는 없다>에서 읽어볼 수 있다).  

그리고 사회문화적 현상에 대한 최고의 라캉주의적 독해는 에릭 샌트너의 <나만의 사적인 독일>(1996)과 믈라덴 돌라르의 <단지 목소리뿐>(2006). 돌라르는 알다시피 지젝의 단짝으로 지젝과 함께 슬로베니아의 이론정신분석학회 최초의 멤버 2인 중 한 사람이다. 

거기에 아직까지는 라캉에 관한 최고의 전기로 꼽히는 루디네스코의 <자크 라캉>(새물결, 2000). 이만한 분량으로는 유일한 전기가 아닌가 싶기도 한데, 지젝에 따르면 몇몇 논란이 될 만한 해석에도 불구하고 가장 방대한 전기적 자료를 제공해주는 책이라고.   

마지막으로 라캉에 관한 최고의 웹사이트, 는 여전히 www.lacan.com 이다.

07. 01. 19.

P.S. 지젝 스스로가 자신에 대해 말하는 건 겸연쩍은 일이었겠지만, 내가 꼽는 최고의 라캉 입문서는 물론 지젝의 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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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아직도 러시아 문학인가?

재작년 6월 모스크바 통신문에 '몰락 이후: 아직도 러시아 문학인가?'란 글을 띄운 적이 있다. 다시 정리해서 '창고'에 넣어놓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스탈린시대 러시아에 관한 자료들을 읽다가 눈에 띄길래 이미지 버전으로 정리해둔다. 본문에 밝혀져 있지만, 초고는 2000년 봄에 작성된 것이다. (*)표시하에 덧붙인 코멘트들은 2004년의 것들과 이번의 것들이 혼재돼 있다. 어차피 같이 늙어가는 처지이므로 그 정도는 굳이 가려놓지 않았다.

자료파일을 뒤적이다가 몇 년 전에 쓴 글이 있어서 여기에 옮겨둔다. 아마도 2000년 봄에 작성된 듯하다. 한 ‘행사’에서 ‘학술’발표 요청을 받고 쓴 것이지만, 전혀 ‘학술적’이지 않으며, 청중 몇 명 없는 발표장에서 그냥 읽어 내려갔던 글이다. 이후 글의 일부를 한두 곳에서 더 읽은 적이 있는데, 개인적으론 자신을 둘러보는 ‘자료’로서의 의미도 갖고 있고, 몇몇 대목은 아직도 유효하기에 보존해 두고자 한다. 글의 말미에 적었듯이, ‘몰락 이후’에 대해서 좀더 부피/규모 있는 이야기를 하고픈 욕망과 해야 할 의무를 나는 느끼지만, 지금 당장은 여건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모스크바 체류 기간 동안에 한번쯤 생각을 다시 정리해볼 기회가 있을 것으로 믿는다. 그럼, 한번 더 읽어나가도록 하겠다(참고로, 발표문의 각주를 본문에 삽입하면서 약간의 수정을 가했다. 그리고 새로 붙인 ‘군말’에는 *를 달았다).



 

 

 

먼저, 이 글에 대한 몇 가지 기대를 접어둘 것을 부탁하고 싶다. 나는 소위 ‘몰락 이후’ 러시아문학의 최신 동향에 대해 알지 못하며(*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 최신 동향이란 건 주로 ‘포스트모더니즘’을 가리키는데, 이와 관련된 책 몇 권을 샀지만, 아직 읽어볼 여유를 갖지 못하고 있다), 러시아문학의 현재적 의의에 대해 강변할 생각도 가지고 있지 않다. “아직도 러시아문학인가?”라는 물음은 얼마 전부터 내가 주변의 동료들이나 나 자신에게 던지는 물음이며, 그에 대하여 내가 마련한 ‘대답’은 지극히 사적인 고백의 형식을 띠고 있다.

나는 주로 지난 80년대에서 현재에 이르는 한 일이십 년의 세월을 회고하면서 사회주의의 몰락이 가져온 파장의 몇 대목을 짚어보려고 한다. 이를 통해서, 나는 제목에서 제기한 문제의식과 그에 대한 응전의 ‘행태’가 러시아문학을 바라보는 한 가지 유효한 시선으로서 평가 받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럼 이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사용하기로 하겠다.

젊은 날, “나이가 좀 어리기 때문에 내가 믿을 수 있는 것은 극히 한정되어 있다... 늙은 사람들이 머리 속에 집어 넣어준 돌자갈 같은 관념들을 바닷물 속에 비스듬히 쏟아버린 후로는 늘 멍청해서 거리를 걸어다닌다.”(이제하)는 문구를 모토처럼 되뇌고 다녔다. 그때 나는 30세 이후의 삶이란 왠지 부도덕하게 여겨졌고(이반 카라마조프도 그런 생각을 한다), 따라서 30세 이후의 ‘여생’에 딱히 무얼 해보리란 계획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요즘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그리고 물론 그 대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때 나는 다만 멍청했던 것이고, 아무런 믿는 구석이 없다는 것이 은근한 자랑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행복했던 것은 아니다.

 

 

 



‘행복한 삶’(사실 이건 모순 형용 아닌가? 마치 ‘도덕적 자본주의’란 말처럼. 삶의 결핍과 고통 속에 놓여 있을 때에만 비로소 우리는 삶을 ‘의식’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바꿔 말하자면, ‘행복한 삶’이란 삶에 대한 아무런 의식도 갖고 있지 않은 삶이다. 자먀찐(E. Zamyatin)의 분류를 빌자면, ‘행복한 삶’은 ‘살아있고-죽어있는(alive-dead)’ 삶이다. 반대로 ‘살아있고-살아있는(alive-alive)’ 삶이란 모순과 고통, 실수로 뒤범벅이 된 삶이다!)이란 곧 “장례절차만이 남아있는 삶”이라고 떠들어대곤 했으니 행복과 그다지 인연이 없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겠다(*자먀찐의 에세이에 나오는 내용인데, <우리들>의 국역본 개정판에는 이전판에 실려 있던 이 에세이가 빠져 있다).

(*)나는 삶의 목적이 ‘행복’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이해는 하지만 신뢰하지는 않는다. 참고로, 행복한 사람은 삶을 ‘의식’하지 않는다. 즉, 당신이 행복을 ‘의식’하는 순간, 행복은 당신과 함께 있지 않다. ‘의식’은 언제나 병과 죽음으로 우리를 이끌며, 행복을 잠식하기 때문이다. 정현종의 시구를 빌자면, “의식의 끝은 언제나 죽음이었네.” 좀 현학적으로 말하자면, 행복은 의식의 대상으로서 현전하지 않으며, 언제나 기대되거나 회고될 뿐이다.

또 그때는 시대를 탓할 만도 했다. 그리고 십수 년의 세월이 흘렀다. 공화국이 바뀌었고, 정권이 교체되었으며, 디지털 혁명이 진행중이고, 사람들이 떼로 죽거나 말거나 세계 인구가 60억을 넘어섰다. 어제로써 20년이 된 5.18 또한 점차 빛 바랜 기억이 되어 가고 있는 듯하다(*2000년 5월 19일 시점에서 이 글을 읽고 있는 것이겠다). 이렇듯 다들 바뀌는 틈에 나도 좀 바뀐 행세를 해야 했다(디오게네스의 일화? 이 ‘통아저씨’ 디오게네스가 하루는 보아하니 주변의 시민들이 전쟁준비로 모두들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자 이 디오게네스, 열심히 자기 통을 굴리고 다닌다. 선량한 시민으로서의 디오게네스, 남들이 하는 건 그도 한다).

이젠 나이가 어린것도 아니기 때문에 마냥 멍청한 표정을 지을 수도 없어서 나는 제법 아는 체도 하고 다닌다. 대략 이런 것들이 내가 그동안 멀쩡한 정신상태를 유지하면서 ‘겪은바’인데, 아직은 그것에 적당한 이름을 붙이지 못하겠다. 그래서 그냥 ‘세월’이라고 불러본다. 그 세월에 대한 이야기에 ‘몰락 이후’란 제목을 붙인 것은 그것이 세상을 보는 나의 기본적인 시각이면서도 동시에 나의 삶이기 때문이다(*물론 ‘몰락 이후’라는 건 동구권 붕괴 이후의 국제정세를 가리키는 ‘사회과학적’ 용어이기도 하다).

‘아직도’라는 건 이 글의 주제와 장르를 암시하는 바, 이어질 이야기의 주제는 ‘미련’이며, 장르는 ‘타령’이다. 러시아 문학에 대한 객담에 황지우, 장정일 두 시인/작가의 이야기를 끼워넣은 것은, 내가 보기에 그들이 각각 지난 우리의 80년대와 90년대를 대표할 만한 ‘반체제’ 작가들이기 때문이다(좀스런 문학을 싫어하는 나는 ‘반체제작가’들을 좋아한다. *‘순체제작가들’이란 게 있다면).

시적 규범의 해체를 통한 ‘파괴의 양식화’(“나는 양식을 파괴한다. 아니 파괴를 양식화한다.”라고 황지우는 말한다. 왜냐고? 기존 권력-질서(그가 ‘끔찍한 모더니티’라 부르는 것)에서 건질 만한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개인-시민에 대한 공권력의 부정하고 무자비한 폭력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목록은 얼마 되지 않는다)와 ‘포르노그라피적 상상력’을 통한 ‘신버지’(신+아버지)에의 모욕(종교적 권위와 국가 권력은 ‘상징적 아버지’로서 장정일에게서 동일한 의미연관을 가지며 따라서 줄기찬 공격대상이 된다. 장정일 문학을 이끌어가는 힘은 모든 ‘아버지’에 대한 증오이며 적의이다.)은 지난 세월의 먼지를 털고 한번쯤 되새겨 볼 만한 문학적 성취에 속한다고 나는 믿는다.

#새들은 세상을 뜬다지만…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1983)의 젊은 시인 황지우의 시 한편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아 세월은 잘 간다./ 눈먼 세월. 잘 간다./ 나는 손 한번 못 댄 세월. 잘 간다./ 아직 오지 않은 사고와 사건과 사태와 우발과 자발과 불발의 세월. 속으로./ 잘 간다.”('活路를 찾아서') 80년 광주의 무참한 기억으로부터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이 없던 세대에게서, 그리고 시인에게서 과연 활로란 무엇이었던가? 그저 세월이 아니었을까? “나갔다. 들어온다. 잠잔다. 일어난다./ 변보고. 이빨 닦고. 세수한다. 오늘도 또. 나가본다.”의 세월, 그 백치 같은 ‘무참한’, 일상의 단조로움 속에서만 기억의 무참함은 다스려질 수 있었는지 모른다. 아니 그래야만 했는지도. 적어도 미치지 않기 위해서는 말이다.

하긴 그 세월의 관성이란 얼마나 끈덕지며 무서운 것인가! “나는 아침에 일어나 이빨 닦고 세수하고 식탁에 앉았다./ (아니다. 사실은 아침에 늦게 일어나 식탁에 앉았더니/ 아내가 먼저 이 닦고 세수하고 와서 앉으라고 해서/ 나는 이빨 닦고 세수하고 와서 식탁에 앉았다.)/ 다시 데워서 뜨거워진 국이 내 앞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아침부터 길게 하품을 하였다.”('살찐 소파에 대한 日記')라고 이젠 살찐 중년의 시인은 적고 있다.(<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1998)

생각건대, 태초에 세월이 있었고, 하품이 있었다. 이 세상의 유구함을 만들어내는 데는 이 세월의 하품, 혹은 하품의 세월을 당해낼 자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시인과 더불어 말한다. “나, 이번 生은 베렸어/(...) 그래, 내 삶이 내 맘대로 안 돼!”(<거울에 비친 괘종 시계>) 한번 ‘베린’ 생은 눈먼 세월의 품안에서 가고 또 잘 갈 것이다. 고작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걸 눈뜨고 보아주는 일이다. ‘흐린 酒店’에라도 걸터앉아서 말이다. 이 한세상 떼어 매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갈 수 있었던 건 언제나 새들뿐이었다.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렬 삼렬 횡대로” 날아가는 새들뿐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낄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세상 떼어매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날아가는 새들의 대열에 끼지 못하는 우리는 그저 주저앉을 뿐이다. 하여, 우리는 ‘닭’이고 ‘닭대가리’이다. 무얼 더 궁리해볼 것도 없이 우리의 운명은 그걸로 싸다. 이걸 ‘몰락’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렇다고 낙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몰락(Untergang)의 길은 언제나 이행(Ubergang)의 길이기도 했으니까(<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인생은 유전하는 것이고, 이 몰락을 양식으로 삼아 세월은 또 다른 유구함을 빚어낼 것이다.

#양계장

 

 

 



“한세상 떼어 매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 꿈을 잃어버린 세상은, 그런 꿈들이 모두 ‘닭장차’에 실려가 버린 사회는 오갈 데 없이 양계장이다(한 사회학자는 ‘사회의 맥도널드화’로 우리 시대를 규정하는데, 이 경우는 ‘오리장’쯤이 될까?). 혹 도스토예프스키의 ‘닭장-유토피아’를 떠올리는가? “양계장의 닭들은 멍할 거야. 좆같다고 느낄 거야. 너무 바보같이 살아서 자기가 알인지 닭인지도 모를 거야. 자기만 그런 줄 알고 옆을 둘러보면, 혼자만 그런 게 아니라 바보 같은 놈들이 수천 수만 마리나 줄지어 서 있는 거야. 하나같이 바겐세일로 산 싸구려 모피 코트를 입고서. 잠을 재우지 않고 알만 낳게 하려고 형광등을 줄지어 빼곡하게 켜놓은 양계장의 좁다란 닭장 속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서 있어야 하는 닭들은 자기가 뭐하는 놈인지 진짜 모른다.”(<보트 하우스>)

이 닭들이 꿈꾸는 ‘부르주아 유토피아’를 장정일은 ‘보트 하우스’라고 부른다. 얼음을 재운 콜라를 마시며 비치 파라솔 그늘 아래 긴 의자에 드러누워(혹은 자빠져) 쉬는 보트족!(‘보트 피플’이 아니다!) 문제는 “얼음이 있으면 콜라가 없고 콜라가 있으면 얼음이 떨어지곤 하는 것이 인생”이라는 데 있다고 작가는 엄살을 떨지만, 얼음과 콜라 대신에 ‘자유’와 ‘평등’이란 말을 대입해 본다면, 고개를 끄덕일 만하다.

 

 

 



그래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고” 혁명은 고독한 것이라고('푸른 하늘을', 1960), 일찍이 양계장 주인이었던 시인은 노고지리처럼 노래했던 것일까? 그 시인, 김수영은 또 이렇게 적었다: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그 방을 생각하며') 이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 내겐 또한 “낄낄대면서/ 깔쭉대”는 소리로 들린다. 그것은 바로 피의 소리였고 혁명의 소리였다.



지난 60년대에 그 혁명의 소리가 ‘헛소리’가 되는 데는 불과 몇 개월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지난 80년대의 힘찬 함성(“깔쭉대는 소리”)이 90년대에 “폼으로 갖다놓고 읽지도 않은/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모스크바 프로그레스 출판사) 양장본 3권이/ 가로로 쓰러져 있듯이”(*이 <자본론>은 요즘 상당히 비싼 책이다) 푹석 ‘주저앉는’ 소리로 바뀌는 데에는 십여 년의 세월밖에 필요치 않았다.

그리고 1917년 광활한 러시아를 붉은 보자기로 싸서 이 세상 밖 어딘가에 있는 ‘있지도 않은 곳’(유토피아)으로 떼어 매고 날아가고자 했던 러시아 혁명이 털 빠진 미운 오리 새끼 마냥 폭삭 양계장에 떨어지는 데에도 고작 70여 년이 걸렸을 따름이다. 이로써 머리를 굴려 세상을 뒤바꿔보려는 합리적/계산적 이성의 기획은 세계에 대한 총체적 인식에의 열망과 함께 파산을 고한다. 우리 머리로는 안되는 것이고(*‘머리’로는 안되기 때문에 요즘 나오는 것이 ‘욕망의 기획’이다. ‘좆같다는 느낌’으로 세상을 바꿔보려는.), 해봐야 ‘닭짓’인 것. 이걸 몰락이라 부를 수 있을까?

#人神 혹은 슈퍼닭



사회주의(공산주의)는 신들에 의한, 신들을 위한, 신들만의 공화국이었다. 아니 신들의 공화국이고자 했다. 어디 레닌과 스탈린뿐이었겠는가? 사회주의 러시아가 섬기던 신들, 혹은 신적인 인간들. 가령, 7톤의 할당량 대신에 102톤의 석탄을 캐어 낸, 1935년의 전설적인 노동 영웅 스타하노프는 또 다른 ‘강철 인간’, 즉 스탈린이었다. 소비에트 러시아가 요구한 것은 ‘닭들’이 아니라, 이 신적인(혹은 神格의) ‘기계들’이었다. 이러한 신적 존재들에 대한 열망은 러시아 민족/민중의 깊은 종교적 열망을 담은 것이기도 하다.

 

 

 

 

아무튼 그들은 신적인, 그래서 비인간적인 존재를 열망하였고, 신격에 못 미치는 인간들, 즉 ‘벌레들’을 강제 수용소로 내모는 데 주저하지도, 인색하지도 않았다. 요컨대 새로운 세상, 새로운 시대는 ‘인간-닭’의 멸종과 더불어, ‘슈퍼닭’ 혹은 人神(Man-God)들의 도래와 더불어 개시될 어떤 것이었다. 여기에 휴머니즘이 끼어들 자리가 어디에 있겠는가? 값싼, 게다가 통속적인 센티멘탈리즘이 끼어들 여지가 어디에 있겠는가?

하지만 인간이란 종의 사회주의적 종자개량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일은 꼬이기 시작한다. 저명한 반체제작가인 V. 보이노비치의 소설(<이반 촌킨의 모험>)에서 소비에트의 한 아마추어 생물학자는 감자 뿌리에 토마토 열매를 맺는 종자 개량 프로젝트에 ‘사회주의로의 길’이란 이름을 붙이고 매진하지만, 그가 절반의 성공 끝에 얻어낸 것은 ‘토마토 뿌리에 감자 줄기’였다. 문제는 이것이 비아냥거림만이 아니라 현실이었다는 데 있었다. 얼마나 더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만 한단 말인가?(*한 인간의 삶은 완전한 사회주의의 도래를 기다리기에는 너무 짧다!)

그 기다림 속에서 ‘완전한 사회주의’, 즉 공산주의는 점차 고도(Godot)를 닮아갔고, 소비에트 사회는 점차 부조리한 사회로 변모해 갔다. 그러는 사이에 간혹 ‘수용소군도’의 생활이 폭로되고,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에 대한 요구가 제기됐다. 그것이 몰락의 징후였던가? 아니면 값싸고 통속적인 인간적 자질(그것도 자질이라고 한다면)이란 것이 떨쳐내야 할 부르주아적 속성이 아니라, 끝내 떨쳐낼 수 없는 인간 본성의 일부였던 것일까?

아무튼 언제부턴가 소비에트 러시아는 몰락하기 시작했다. 신들은 권태를 이겨내지 못했고, 人神들의 금욕은 ‘당근’의 생산량을 늘리는 데 실패했다. 사회주의는 유토피아 공산주의로 가는 과도기적 이행이면서 동시에 몰락이었던 것이다. 몰락, 그것은 다시 ‘인간-닭’들에게로 되돌아가는 여정에 붙여진 이름이다. 몰락하는 자로서가 아니면 살 줄을 모르는 자들, 그들이 바로 ‘우리-닭’들이다. 몰락, 그것이 우리-닭들의 운명이다: “양계장의 닭들은 멍할 거야. 좆같다고 느낄 거야. 너무 바보같이 살아서 자기가 알인지 닭인지도 모를 거야...”

#안나 까레니나

 

 

 



그렇게 시작되는 <보트 하우스>는 작가가 “소설가로서의 나의 희망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읽는 속도와 똑같은 속도로 한 권의 장편소설을, 단숨에 써버리는 것”이라며 써내려간 소설이다. <죄와 벌>을 패러디하고 있는 이 소설에서 “서울 소재의 사립대학교의 졸업반”인 한 여주인공 애라는 ‘고르비 영감’이 주인으로 있는 신촌의 화엄전당포를 찾는다. 그녀는 “숨가쁘게 넘겨온 고학 생활의 마지막 1년을 견디지 못하고 휴학에 들어갔”는데, “작년 이맘때만 해도 그녀의 장래는 그리 어둡지 않았다. 그녀가 다니는 대학은 우리 나라에서 서너 손가락 안에 드는 명문인데다가, 학과의 지명도는 떨어지지만 앞으로 활발하게 진행될 러시아와의 교역을 생각하면 졸업 후에 괜찮은 직장을 고를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IMF를 맞이하여 그녀가 맡고 있던 과외가 모조리 떨어져 나갔고, 휴학은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다. 그리하여 결국 고물딱지 사진기를 어깨에 둘러매고 전당포를 순례하게 된 것. 그녀가 다니는 노문과에는 네 남자 친구가 있었는데, “음악을 좋아하는 차이코프스키. 영화를 좋아하는 타르코프스키. 문학을 좋아하는 도스토예프스키. 미술을 좋아하는 칸딘스키.”가 그들이었다. 이 “네 명의 ‘스키’는 단돈 5만원을 주고 산 폐차 직전의 차를 타고 4년 동안 함께 단짝이 되어” 어울려 다녔는데, “강북에서 프롤레타리아의 피를 빨아, 강남에 부르주아의 천국을 만든 거”라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고 한 건을 계획한다.

“‘스키’들이 정한 곳은 압구정동에 있는 외제품 전문 백화점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거기에 당도했을 때는 거리에는 차량과 인파가 붐볐고 백화점은 아직까지 영업중이었다. 유럽식 외관을 하고 있는 외제품 전문 백화점의 대리석 벽에 넷이 나란히 오줌을 누기 위해서는 유치장행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에코와 푸코 그리고 바흐친을 이리 저리 섞고 아전인수식으로 변조하여 장래의 문화평론가로 행세하게 될 노어노문학과의 네 ‘스키’들은 전혀 그런 대가를 치를 생각이 없었다. 길거리에 방뇨를 하는 것은 꺼림칙하지 않지만 파출소에 붙들려 들어가 경을 치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맥주와 보드카까지 섞어 마신 ‘스키’들은 보무도 당당하게 백화점 현관으로 걸어 들어가서 도우미의 안내를 받아 현관에서 가장 가까운 화장실을 찾아 들어가 시원하게 오줌을 눈다. 그러면서 “너무나 자연스레, 생리적으로, 체제 친화적이 되었다.” 이들과 같이 차를 타고 동행하던 애라는 히스테리를 부리며 차에서 내려 인도로 뛰어가는데, 그런 “까닭을 이 멍청한 ‘스키’들은 조금도 알지 못했지만, 어떤 현상도 자신들이 분석하지 못할 게 없다고 믿는 이 시건방진 ‘스키’들은 그 가운데 한 명의 ‘스키’가 중얼거리는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흠, 알 수가 없는 여자군. 안나 까레니나야.”



이어지는 얘기에서, 여대생 라스콜리니코프, 애라는 자신을 탐하는 고르비 영감을 남근 모양의 수석으로 내리치고 몇 푼 훔쳐내어 도망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죽지 않고 되살아난 고르비 영감은 초능력자였고, 애라는 그의 성적 포로가 된다(그게 그녀의 '벌'이다). 그리고는 장정일적인, 거짓말 같은 황당한 포르노그라피가 이어진다. 이것은 어중이떠중이 사회주의자 ‘스키’들에 대한 비아냥거림이면서 동시에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종교적 화해에 대한 포르노적 희화화일 것이다(장정일은 사회주의 유토피아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종교적 유토피아 모두에 회의적이다. 그가 가장 믿는 것은, 그의 소년시절과 관련 깊지만, 매를 때리고 맞는 감각의 확실성이다. SM, 그 고통의 체험 속에서 그는 구원의 빛을 본다)...

#나 다시 돌아갈래!

“낙양성 십리 허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은 영웅호걸이 몇몇이냐 절세 가인이 그 누구냐 우리네 인생 한 번 가면 저기 저 모양이 될 터인데 에라 만수, 에라 대신이여” 작가는 주인공들의 이름을 이 노래에서 따온다. 허만수(고르비 영감)와 김대신(빼갈), 그리고 애라. 에라, 우리도 한번 가면 저기 저 모양이 될 터이다. 그것을 나는 앞에서 ‘세월’이라고 적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이 ‘여자들’ 말고 또 있다면 그것은 ‘세월’이다. 그리고 ‘운명의 힘’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바로 이 ‘세월의 힘’이다. 아, 무정의 세월이여, 몰락의 세월이여...

그리하여 다시 양계장. 세월이 주인인 이 이 양계장에선 언제나 ‘모피를 두른 닭’과 ‘털 빠진 닭’ 들이 서로의 문화적/상징적 폭력(대학이라고 해서 크게 예외는 아니다. 다만 그런 문화적/상징적 폭력(P. 부르디외)에 대해 반성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계기를 대학이란 공간은 마련해 줄 따름이다. 지금 이 자리도 마찬가지의 뜻을 갖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는 건 아니며 삶의 퇴폐와 부패가 명패를 바꿔차는 것도 아니다), 즉 ‘쪼기’와 발길질을 교환하며 다투고 있을 따름이지만, 간혹 우리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회한에 젖어들 때도 있는 법이다.

 

 

 

 

2000년 벽두부터 “나 다시 돌아갈래!”(<박하사탕>)라고 절규할 때도 있는 법이다. 아, 언제였던가(80년대 중․후반의 정서? 영화 <겨울나그네>에서 “나 다시 시작하고 싶어!”라는 민우(강석우)의 대사, 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 강석경의 <숲속의 방>, 그리고 주윤발 주연의 <영웅본색>. 덧붙여 이대근, 원미경 주연 <변강쇠>류의 코믹 에로영화들)!...



소비에트 러시아가 아직 ‘페레스트로이카’란 달빛 세레나데를 부르고 있을 때 나는 대학에 들어왔다. 우리는 고르비 아저씨의 <페레스트로이카>를 탐독하면서, 사회주의의 몰락과 해체보다는 ‘강화된’ 사회주의의 장래를 믿고 싶어했다.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남한의 제 5공화국(그것도 ‘공화국’이라고 한다면)이 그렇게 빨리 붕괴될 줄 몰랐으며, ‘마지막 제국’인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에 대한 예견들을 미심쩍어했다(*경영학자 피터 드러커가 <새로운 현실>이란 책에서 그런 예견을 했었다).

 

 

 

 

하지만 2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갔을 때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복학하기가 무섭게 사회주의 러시아는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갔다. <러시아혁명사>를 맘잡고 한번 읽어보기도 전에, 러시아 혁명은 그렇게 파산해 버렸다. 정말 여기엔 한 푼의 에누리도 없었다! 그리하여 들이닥친 몰락 이후. 몰락 이후의 생존? 이 몰락과 파산의 잿더미 속에서, 그래도 뭔가 값나가는 것이 없을까 뒤적거려보는 이들도 나는 더러 보았는데, 그들은 ‘낭만주의자’이거나 ‘넝마주의자’이다.

아마도 80년대는 ‘총체성’의 원조, 루카치의 년대로 기록될 수 있으리라. 나는 열아홉 살에 강의실에서, 과사무실에서, 루카치란 이름이 읊어지는 걸 들었고, 학술 심포에 가서 루카치와 브레히트의 논쟁이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지성사적 논쟁이라는 걸 ‘학습’했다. 비록 루카치주의자들(‘스키’들)을 나는 좋아하지 않았지만, “러시아 문학은 오직 1917년의 시점에서만 파악될 수 있다.”는 그의 단언은 감동적이었다.

 

 

 

 

1917년 이전의 러시아 문학은 모두 그리로 수렴되고, 1917년 이후의 문학은 모두 그로부터 발산한다는 것. 이것은 말 그대로 문학사의 ABC였다. 문학사란 역사적 준거시점으로부터의 회고이며 전망인 것이기에. 그 밖에 내가 아는 문학사란 잘난 작가들과 못난 작가들의 ‘가족 로맨스’뿐이다(*가령, 해롤드 블룸의 <영향에의 불안>을 보라).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90년대는 ‘대화성’의 비조, 바흐친의 년대로 기록될 수 있을까? 적어도 몰락 이후에 루카치의 굵고 쉰 목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에 역사의 종언론과 대화주의만이 다성악처럼 울려퍼졌다.

 

 

 

 

도대체 1989년, 혹은 1991년 이후의 러시아 문학이란 무엇이란 말인가(오 러시아여, 너는 어디로 가려느냐)? 1917년의 시점은 이미 유효기간을 상실했고, 1991년이 시점은 아직 전망을 얻고 있지 못한 처지에서 우리는 갈 곳을 잃고 헤매는 외로운 까마귀 신세가 되어 버렸다. 분명 뜨긴 떠야만 할 텐데, 떼어 맬 세상조차 오리무중일뿐더러, 떼어 매고 가야 할 세상밖이 존재하는지도 의심스럽다. 그리하여 몰락 이후에 우리는 망연자실 막연히 존재하고 있을 따름. 그러는 사이 우리의 삶은 어느새 ‘전당포 주인’들에게 접수 당한 듯하다. 그 덕분에 우리의 여생은 많이 좀스럽게 돼 버렸다.

# 믿음이 없는 새

 

 

 



몰락이라고? 무엇이 변해 버렸는가? 사실 변한 건 없는지도 모른다. 오히려 더 나빠졌을 뿐.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다(사실 나는 이 나라 바깥 구경을 해본 적이 거의 없다. 그런 내가 몰락 이후 러시아의 현실에 대해서 말한다는 건 어폐가 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몰락 이후 러시아와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요즘 구경하고 있다). “사회주의 붕괴와 신자유주의 물결을 탄 자본과 권력의 반격은 민족과 사회에 헌신하고자 하는 인간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줌으로써 도덕공동체를 해체시켰고, 모든 사람이 자신과 가족의 문제에만 신경을 쓰면서 ‘사회가 없는 듯이’ 행동하는 ‘규범부재’, 편법과 편의, 파렴치한 세상을 만들었다.”(김동춘, <근대의 그늘>)는 진단이 전혀 낯설지 않듯이 말이다.



“너무 짧은 기간에 지나치게 부유해지고, 지난 1000년 동안 보다 최근 30년 동안에 더 많은 변화를 겪은” 나라, 혹은 ‘거품 공화국’에 살면서 멀쩡한 정신상태를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러시아에 대한 믿음도, 문학에 대한 믿음도 턱없이 부족한 터에, “아직도 러시아 문학인가?”를 묻는 것은 그런 오락가락하는 정신상태에서이다. “믿음이 없는 새는/ 어떤 몸짓의 날개를 치며 날아야 하는가를.”(김춘수) 간구해 보지만, 어떡할 것인가, 우린 ‘닭’인 것을!...

#편집증이냐 분열증이냐



 

 

 

중언부언 몰락의 회고 속에서, 회고의 불가피한 끄트머리에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두 가지이다. 먼저, 편집증 환자의 길.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다”라는 게 이들의 구호이다. 러시아문학에 손발을 들여놓은 이상, 손을 씻을 수도 없고, 발을 뺄 수도 없다는 것. 예컨대, 마약을 거래하는 건달들의 두목으로 등장하는 ‘빼갈’은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들먹이며 ‘넘버3’ 류의 일장 연설을 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말야. 노인은 고기의 살점을 모두 빼앗길 걸 알면서도 상어떼와의 대결을 포기하지 않은 거야. 녹초가 되어 부두에 배를 매었을 때는 앙상한 뼈만 남아 있었어. 하지만 노인은 아무 미련없이 끄덕끄덕 자기 오두막으로 기어들어가 모든 걸 잊어버린 채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잠을 자는 거야. 그리고 꿈속에서 노인은 또 다시 사자 꿈을 꾸는 거야. 이 소설을 통해서 헤밍웨이가 뭘 말하려고 했는지 알아? 전부가 아니면 무다! 생이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거다! 헤밍웨이는 그런 메시지를 던졌던 거야. 또 바로 그게 나의 좌우명이기도 하고 말이야. 그러니까 내가 왜, 손씻는다. 발을 뺀다하는 놈들을 절대 용서하지 않는지 알겠지? 나는 세상에서 그런 놈들이 김일성이보다 더 미워. 진정한 프로는 끝까지 가는 거야. 진짜 복권에 미친놈은 오늘 복권에 1등 당첨이 되어도 그 다음날 또 길거리에 나가서 복권을 사는 거야...”



“그러니 비치 파라솔 밑에 누워서 얼음 재운 콜라 따위나 홀짝이고 있고 싶지 않은 거지. 씨팔, 보트가 있으면 타고 나가야지 왜 창고에 처박아 두고 보기만 하느냐 이거야. 노를 저어 갈 힘이 있으면 배를 타고 고기를 잡으러 나가는 거지 무슨 보트 하우스 타령이야. 헤밍웨이를 봐. 사냥도 낚시도 타자기를 누를 힘도 없으니까 총을 입에 물고 탕, 해버리잖아. 죽기 전에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는 거야. 이제 써지지 않는다, 이제 써지지 않는다. 그리고는, 탕! 이게 프로야.”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해체로 인하여 많은 ‘스키’들이 잠적하거나 침묵했지만, 입에 총을 물고 “탕!”했다는 소식은 들어보지 못했다. 그저 모두들 보무도 당당하게 공공화장실을 찾아 들어가 시원하게 오줌 한번 갈기고 너무도 자연스레, 생리적으로, 주식에 재미를 붙이고, 벤처로 떼돈을 벌면서 자본주의에 적응해 갔다. 비록 러시아 문학이 앙상한 뼈다귀만 남더라도 끝까지 갈 만한, 갈 데까지 갈 만한 ‘노인들’이 얼마나 남아 있을까?

 

 

 



편집증 환자의 길, 즉 프로의 길이 아니라면? 분열증 환자의 길이 있다. 장정일의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1994)는 한 여인을 사랑했으나, 그 사랑을 이루지 못해 그녀의 언니와 결혼, 처제와 형부라는 가족 관계를 맺음으로써 영원히 헤어지지 않으려고 한 사내 ‘나’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이 정신분열증적인 주인공 ‘나’는 회사의 부장으로 승진하지만 삶의 비상구를 찾기 위해 스티로폴을 타고 강물을 따라 어디론가 떠내려 간다. 그것이 소설의 결말이다. 이 스티로폴이 상징하는 표류의 이미지가 내게는 몰락 이후 러시아의 운명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운명인 것으로 읽힌다(*우리는 ‘스티로폴 피플’이다).

 

 

 



‘러시아의 최초의 철학자’ 차아다예프는 명민하게도 러시아의 운명을 ‘사생아의 운명’으로 규정한 바 있다(<철학서한>). 키예프-러시아, 모스크바-러시아, 타타르-러시아, 표트르의 러시아, 소비에트-러시아, 그리고 옐친과 푸틴의 포스트소비에트-러시아에 이르기까지 러시아의 아버지-찾기와 아버지-되기는 험난한 여정을 헤쳐왔다. 러시아(문학)에서 모태(母胎)로서의 ‘어머지-대지’와 정체(政體)로서의 ‘아버지-이념’ 간의 관계는 흥미로운 연구주제이다.

(*)지난 6월 7일, 그러니까 푸슈킨의 205주년 생일 다음날이 차아다예프의 탄생 210주년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즈베스찌야>의 한 칼럼에서 지적된 대로 러시아에서도 거의 잊혀져 가는 존재인 듯하다. 6월 1일은 작곡가 글린카의 생일이었는데, 이 세 사람, 차아다예프-푸슈킨-글린카는 동세대 이념의 스펙트럼을 잘 보여주는 트리플이다. 진보-중도-보수. 물론 <철학서한> 파문 때문에, 황제에 의하며 정신병원에 감금된 ‘광인’ 차아다예프의 이념적 입장은 때로 모호하며 수수께끼이지만.



분명 몰락 이후에도 삶은 계속된다. 그리고 아마도 문학 또한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그 문학은 이전과는 조금 다른 문학이 될는지도 모른다. 사실 19세기 중반에 탄생한 러시아 근대문학이 20세기 후반에 죽음을 고했다고 해서 크게 놀랄 일은 아닌 듯싶다. 예술사가 보여준 바, 모든 예술은 역사의 품안에서 성장하여 나이테를 늘려가다가 역사의 껍데기 안쪽에서 소멸해 가는 것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죽음 이후의 문학은 유산(遺産)으로서 박물관과 도서관, 그리고 대학 강의실에서 소수 관리자들에 의해 방부처리되어 보존될 것이다. 그리하여 앞으로 문학에 대한 사랑은 점점 더 네크로필리아(necrophilia)를 닮아갈 것이다(Poor Yorik!).

해서, 몰락 이후에도 계속되는 문학이란 별의 몰락/사멸에서와 마찬가지로 거리에 의한 시간차에 기댄 것이기 쉽다.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했지만, 그 부고(訃告)가 우리에게 날아드는 데 막간의 시간이 소요되고 있을 따름이며(20세기 중반에 가장 큰 화제를 뿌린 러시아(출신) 작가와 작품이라면, 나보코프의 <롤리타>(1955),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1957),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1962) 등을 들 수 있을 텐데, 이 세 작품은 모두 각기 다른 방식으로 현실 혹은 정치와 맞서며 러시아 문학의 죽음/단절과 부활/연속성을 증언하고 있다), 그럼에도 “木馬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를 씁쓸하게 한다.

몰락 이후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떠나는” 우리, 센티멘탈-쟈니의 ‘떠남’은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다 하여도,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스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나의 사랑, 나의 적의

“이제 나는 안다. 해변가에서 반바지와 소매없는 티 셔츠를 입은 채 파라솔 아래 펴놓은 긴 비치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얼음 재운 콜라를 마시는 순수한 날이 내게 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이 글들을 쓰게 하는 것은 내 적의라는 것을.”(장정일과 마광수의 차이는 바로 이 적의의 있고 없음의 차이다.) 러시아문학에 대한 나의 ‘사랑’은 그에 대한 ‘적의’와 이젠 구별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 적의를 밑천 삼아 내친 김에 이제껏 “손 한번 못 댄 세월”에 언젠가는 손을 봐주고 싶다. 그 세월의 무덤 속에서도 간혹 겨드랑이가 가려운 걸 나는 참지 못할 테니까...

이젠 마치기로 하자. 언젠가 ‘몰락 이후’에 대해, 역사의 ‘부록’에 대해, 나의 ‘여생’에 대해 그에 걸맞는 부피와 규모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와 여건이 마련되기를 희망한다. 데끼리!

04. 06. 23.



P.S. 이 글을 정리한 날은 김선일씨 살해 소식으로 아침부터 기분이 침울해 있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가 아직도 ‘야만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이겠다. 이 전지구적 ‘야만의 시대’를 어떻게 손봐야 할지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어제(24일) 모스크바영화제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상영되었던 ‘두 공산주의자’ 감독의 한국영화 <자본당선언: 만국의 노동자여 축적하라>는 아주 단순하게(그래서 상투적으로), 모든 것을 자본주의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너무 ‘손쉬운 의식’이라고 생각한다. 아래는 모스크바의 크레믈린궁 앞에 서 있는 마르크스 동상. 단대에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구호가 새겨져 있다.



자본주의의 안락(coziness)을 고려하지 않는 비판은 자본주의에 대한 맹목적인 예찬만큼이나 공허하다. 자본주의의 안락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자본주의가 가장 ‘천박한’ 경제시스템이긴 하지만, 그것은 ‘천박한’ 인간의 본성과 요구에 잘 부응하는 시스템이다(돈에 의한 차별이 신분이나 인종에 의한 차별보다 더 천박하거나 야만적인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는 한편의 인간들을 야만적으로 착취하지만 다른 한편의 인간들에겐 최고의 안락한 ‘서비스’를 제공한다(서비스=착취). 거꾸로 말하면, (이론적으로) ‘착취 없는 사회’는 (실질적으로) ‘서비스 없는 사회’이기도 하다(*이 서비스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자리에서 다룬 바 있다). 과거 소비에트 사회주의에서처럼(러시아에서 ‘서비스’란 개념은 자본주의화 이후에 들어온 것이며,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아직 익숙하지 않다).

서비스 대신에 들어서는 것은 ‘무표정한 의무’(=기계들)이거나 ‘자발적인 헌신’(=천사들)이다. 그래서 우리의 선택지는 세 가지이다. (1)천박한 (인간들의) 사회 (2)기계들의 사회 (3)천사들의 사회. 물론 당신이 인간이라면, ‘인간적’으로 가장 나쁜 사회는 ‘천박한 사회’이다. 하지만, 당신이 기계도 아니고 천사도 아니라면, 당신이 기대할 수 있는 건, 최악이지만 그래도 좀 ‘덜 나쁜 사회’를 만들어보는 것이다. ‘더 좋은 사회’? 그건 ‘기계들의 사회’나 ‘천사들의 사회’이다. 당신이 더 좋은 사회를 기대한다면, 인간과 기계들의 전쟁에서(<터미네이터>)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할지 분명해질 것이다. 휴머니즘은 가장 ‘인간적인’ 이즘이지만, 동시에 가장 ‘천박한’ 이즘이다…

04. 0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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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mannerist > 알라딘 음반 매장.

서양고전음악 분야 MD를 뽑는다고 하더니 좀 변하긴 했다. 잡상 되는대로 몇 자.

1. 미켈란젤리의 박스셋 예약을 알라딘에서도 받고 있다. 한달 전쯤 매너놈이 아르헤리치의 accord 차이콥스키/슈만 피협 음반과 같이 HMV에 주문했던게 얼마 안 되는 시차를 두고 널리 풀리는 모양새를 보는 매너, 속 쓰릴까 안 쓰릴까?

대답은 전혀. 환율 탓이 절반, 일본에서 워낙에 싸게 풀린 탓이 절반 해서 배송비까지 생각하더라도 그리 손해보는 장사가 아니었다. 더구나, 아르헤리치의 차이콥스키 accord차이콥스키 피협 음반까지 손에 넣었는데. 그정도야 뭐.

언젠가 매너가 몇 자 적은 적이 있지만, 1집의 경우 미켈란젤리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과감히 투자하시길. 슈만의 카르나발 한 장만으로 본전 뽑고도 남는다. 음질이 조금 걸리긴 하지만, 공연실황 몰래 녹음한듯한 먼 음감도 미켈란젤리의 냉철한 완벽주의를 흐리게 하진 못한다. 특히나, 스케르쵸 2번 등을 담은 두번째 CD가 압권인데, 음과 음 사이의 잔향까지 완벽히 콘트롤하는 데는 눈물이 날 지경이다. 이 연주 듣고, 아르헤리치의 열정도, 키신의 다이나믹도, 아쉬케나지의 따스함도 한쪽 구석으로 치워버렸다. 풍월당에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가 연주한 쇼팽의 스케르쵸 전곡 CD를 예약해놓긴 했는데, 과연 미켈란젤리의 차갑게 빛나는 완벽주의를 뛰어넘을 수 있을까.

 

2. 수입음반 = 서양고전음반??

메탈이나 뉴에이지, 월드뮤직쪽으로는 앞으로 안 다룰 생각일까? 수입음반을 클릭하면 그대로 클래식 수입으로 직행하니까. 뭐 지금 고쳐가는 과정이니 차차 나아지겠지만.

그나저나. 레이블별로 분류하는 것도 모자라 월별로 분류해서 옆줄에 띄우고 있다. 앞으로 매달 별의 별 레이블에서 음반 쏟아져 내릴텐데, 다른 음반매장처럼 게시판 체계로 가지 않고 옆줄로 빼 냈다. 예전의 클래식 음반 카테고리와 겹치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앞으로 더 음반 쏟아지면 감당하기 힘들텐데.

3. 검색상의 문제.

이번에 미켈란젤리 박스셋을 낸 레이블 이름은 document. 근데 이 단어로 음반 검색하면 뜨지 않는다. 이상해서 찾아보니 레이블 이름이 제작사인 document로 되어있는 게 아니라 수입사인 C&L로 되어있다. 뭐. 알라딘만의 분류 기법으로, 수입상에 따라 제작사를 분류한다면 그려려니 하겠지만, 글쎄... 그리 좋은 방법같지는 않다.

4. 여전히 미흡한 접근성 & 가시성.

아직까지 음반 코너 메인은 심심하기 그지없다. 새로나온 음반, 베스트 음반 꼽아놓고 옆에 이런저런 광고문구와 마이페이퍼, 리뷰 등의 관련 토크토크 뜨는게 전부다. 이래가지고선 '나 이거 살거야'하고 들어오는 사람 말고 '뭐 살거 있나?'하고 들어온 사람 그리 쉽게 낚진 못하지 싶다. 강력한 유인 동기가 없다는 말 되겠다. 맛가기 전 yes24처럼 사람들 낚기 좋은 리뷰 앞에다가 땡겨놓든가, 좀 적극적인 홍보/소개 문구를 좀 가져다 놓든가 하는 센스가 여전히 부족하지 싶다. 새로나온 음반 여섯개 덩그러니 놓지만 말고, 적극적으로 이게 어떠니 저쩌니, 그라모폰에서 어쨌니 저쨌니 하는 소개말이라도 쓰는게, 보는 사람 재미도 있고 지갑 경계선 위에 선 사람 낚기도 좋지 않으려나.

 

뭐. yes24의 음반 코너가 맛 가더니 알라딘 음반 코너가 정신 차리고 있다. 이것만은 아주 좋은 현상이다.

 

넋두리_앞으로도 사람 낚는 리뷰 생각나는대로 써서, 일년에 백장도 안 팔리는 음반 백한장, 백두장 팔리는데 기여하면 수입음반 유통이 조금은 원활해질려나. 뭐. 상관관계 그다지 없을 확률 99.99%지만. 이정도 허위의식이야 컨트롤 가능할만큼만 키워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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