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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풍경 - 김형경 심리여행 에세이, 개정판
김형경 지음 / 사람풍경 / 2012년 3월
평점 :
나의 내면을 찾아 떠나는 여행
6년 전, 서른을 목전에 둔 그 해 여름, 일주일 동안 홀로 제주도를 여행한 적이 있다.
그 여행을 앞두고 내 마음은 인생의 그 어느 때보다 비장하고 진지하고 심각했다. 왜냐고? 스물아홉이었으니까. 이번 여행만큼은 뭔가 의미 있고 평생 잊지 못할 추억들을 만들어 오고 싶었다. 왜냐고? 스물아홉이었으니까.
‘최대한 가벼운 짐에, 최소한의 비용으로 제주도를 만끽하자’가 여행목표였다. 여행 가방에 겉옷과 속옷과 양말은 한 두 벌만 집어넣었다. 선크림 따위, 선글라스 따위 불필요한 짐들은 과감히 제외! 그래도 책 한 권은 꼭 챙겨가고 싶었다. 일주일을 홀로 다니는데 친구 대신으로라도 책은 꼭 필요했다.
너무 길지도 너무 짧지도 않은 책. 너무 심각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가볍지도 않은 책. 적당히 재미있으면서도 적당히 수준을 갖춘 책. ‘홀로 떠나 나를 살펴보는 여행’이라는 주제와도 제법 어울리는 책. 그런 책이 딱 한 권 필요했다. 두 권, 세 권도 아니고 딱 한 권!
부산에서 떠나는 페리도 예약했고, 제주에서의 여정 계획도 다 마무리되었다. 그런데 여행을 이틀 앞두고도 아직 갖고 갈 책을 고르지 못했다. 낭패였다.
아는 친구(국문과 출신의 책 좀 읽는다는 친구였다)에게 반은 자랑이 섞인 고민을 늘어놓았다. ‘내가 모레 제주도로 여행을 떠나는데 다른 건 다 준비가 끝났다. 하지만 아직 갖고 갈 책을 고르지 못했다 이런 이런 책이 필요한데 적당한 책이 있다면 네가 추천 좀 해다오’라고 했더니, 그 친구가 잠시 생각을 하더니,
‘그럼, 김형경의 <사람풍경>이 좋겠네’ 라며 이 책을 권했다. 물론 이런 얘기를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에이, 빌어먹을 놈아. 누군 이 더운 여름날 똥 빠지게 죽어라고 일만 하고 있는데, 누구는 제주도 놀러간다고 책이나 골라달라 그러고. 니 내 약 올리라고 그러제!’
그 친구의 추천은 그야말로 ‘신의 한수’였다.
저자인 김형경의 원래 직업(원래 직업이라는 말이 좀 우습긴 하지만)은 시인이며 소설가이다. 작품으로는 <외출>, <세월>,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 등이 있는데, 소설과 더불어 <천 개의 공감>, <사람풍경> 등의 다양한 심리에세이로 더 유명한 작가이기도 하다.
그녀는 20대 중반부터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 책을 읽기 시작했다고 한다. 평범한 독자로서 이해하기 어려운 전문개념을 만날 때면, ‘인간의 마음을 쉽고 재미있게, 그러면서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게 설명해주는 책’은 없을까 꿈꾸며 본인이 심리학 관련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 첫 번째 책이 바로 <사람풍경>이다.
대부분의 남성이 그러하듯이 나 역시 심리학이나 상담 분야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가볍게 여기고 심리학 서적을 읽는 이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을 정도였다. ‘오이디푸스’니 ‘무의식’이니 하는 ‘콤플렉스’니 하는 이들이 마치 사기꾼처럼 느껴지곤 했으니까.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나 라는 인간은 왜 이런 성격을 지니게 되었을까?’, ‘왜 나는 이런 상황에서 늘 좌절하고 분노하는 것일까?’ ‘나의 내면에 자리 잡은 부정적 감정들은 어디서부터 기인한 것일까’와 같은 존재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면서 무작정 심리학 서적들을 붙들기 시작했다. 그 즈음 읽었던 이 책은 그야말로 시기적절한 책이었던 셈이다.
이 책은 심리학책이기에 앞서 여행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행지의 맛집이나 소개하고 가격대별 숙소나 안내하는 그런 여행기와는 다른 책이다. 시간대별로 정리되지도 않았고, 비슷한 장소끼리 묶이지도 않았다. 작가는 뉴질랜드의 오클랜드, 이탈리아 로마, 독일 뮌헨,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등을 여행하면서 느낀 경험들을 바탕으로 사람의 여러 가지 감정들을 자연스레 연결시키고 소개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바티칸 베드로 성당에서 관리인에게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서 불같이 일어난 분노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고, 비와 안개와 습기가 가득 찬 파리에서 겪은 우울에 대해서 설명한다. 중국에서 발생한 사스에 대한 사람들의 비이성적인 태도에서 인간의 근원적인 불안에 대해서 고민하고, 로뎅 미술관에서 그의 여인이었던 카미유 클로델의 삶에 의문이 생기게 되면서 콤플렉스라는 감정을 떠올린다. 그 외에도 사랑, 공포, 의존, 중독, 질투, 시기심, 투사, 회피, 자기애, 친절 등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여러 가지 마음에 대해서 정신분석학의 학문적 배경과 함께 설명한다. 그 중에서 기억에 남는 몇 단락을 옮겨본다.
오래도록 나 역시 결핍감을 추진력으로 하여 살아왔을 것이다. 그 결핍감을 메우려는 욕망을 마음의 동력 장치로 삼아 현실적인 무엇인가를 성취해왔다. 질투는 나의 힘, 분노는 나의 에너지, 콤플렉스는 나의 추진력… 다 맞는 말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 나르시시즘적 자기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한 욕구, 일상의 어려움이나 심리적 고통으로부터 멀리 떠나고자 하는 방어의식… 그 모든 것이 뒤섞여 내 삶을 이끌어 온 게 틀림없다. 삶이 막다른 곳에 부딪친 이유도 거기 있었을 것이다(p.288)
작가의 삶을 끌어온 추진력이 결핍감, 질투, 분노, 콤플렉스, 방어의식이었듯이 지금까지 내 인생을 지탱해온 감정들도 그런 것이리라. 어느 한 가지만 삐죽이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모든 감정들이 뒤섞여 내 마음 속에 자리 잡았을 것이다. 때로는 내 인생을 휘청거리게도 했을 것이고, 가끔은 사랑하는 이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도 주었을 것이다. 그것이 좋은 감정이든 부정적인 감정이든, 어쨌든 내 마음 속에 존재하고 내가 평생 안고 가야 할 것들이라면 소중히 다루고 끊임없이 공부해야 할 것이다.
"남에게 보이는 관심을 반만 줄여도 생이 한결 편안해질 것이다." 역시 게슈탈트의 말이다. 우리가 '남에게 보이는 관심'이란 대체로 방어의식이거나 시기심이거나 의존성이거나 투사의 감정 중 하나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p.140)
‘완전’ 동의한다. 제발 좀 남의 인생에 관심 좀 줄였으면 좋겠다. 그 관심 본인한테 좀 쏟아 부었으면 좋겠다. 그 사람이 가족이든, 친구든, 연인이든, 직장 상사든, 선생이든…
이제 나는 내가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며, 아름답기도 하고 추하기도 하며, 정의롭기도 하고 비겁하기도 하며, 이기적이기도 하고 이타적이기도 하며… 그런 얼룩덜룩하고 울퉁불퉁한 존재로서 존엄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임을 알게 되었다. 그런 나를 사랑할 수 있게 되면서 타인의 그런 점들도 끌어안을 수 있게 된 점이 더욱 만족스럽다.(p.195)
현재 내 마음 상태를 정확히 인식하고, 내가 부족하기도 하지만 괜찮은 존재임을 인식하자. 내 존재를 전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이는 나 자신 밖에 없다.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자만이 타인을 사랑할 수 있고, 타인에게 관대하고 너그러워질 수 있다.
다른 사람에게가 아니라 나 스스로한테 하는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