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문학과지성 시인선 172
유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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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명절이 싫다

-유하 시집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달의 몰락 / 유하

 

나는 명절이 싫다 한가위라는 이름 아래

집안 어른들이 모이고, 자연스레

김씨 집안의 종손인 나에게 눈길이 모여지면

이젠 한 가정을 이뤄 자식 낳고 살아야 되는 것 아니냐고

네가 지금 사는 게 정말 사는 거냐고

너처럼 살다가는 폐인 될 수도 있다고

모두들 한마디씩 거든다 난 정상인들 틈에서

순식간에 비정상인으로 전락한다

아니 그 전락을 홀로 즐기고 있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른다 물론 난 충분히 외롭다

하지만 난 편입의 안락과 즐거움 대신

일탈의 고독을 택했다 난 집 밖으로 나간다

난 집이라는 굴레가, 모든 예절의 진지함이,

그들이 원하는 사람 노릇이, 버겁다

난 그런 나의 쓸모없음을 사랑한다

그 쓸모없음에 대한 사랑이 나를 시 쓰게 한다

그러므로 난, 나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호의보다는

날 전혀 읽어내지 못하는 냉랭한 매혹에게 운명을 걸었다

…(중략)…

 

 

이번에는 ‘명랑한 책읽기’가 아니라 ‘명랑한 시 읽기’다. 아니 그다지 ‘명랑’한 내용도 아니니 ‘우울한 시 읽기’가 되시겠다.

1년 가도 소설책 한 권 손에 들지 않는 어른들이 수두룩한 대한민국에서 시집이라니.

공부에 찌들대로 찌든 학생들에게나, 사회생활에 찌들대로 찌든 어른들에게나 시는 그야말로 먼 나라의 얘기가 아닐 수 없다.

나 역시 시를 읽을 기회가 많지는 않다. 서점에서도 선뜻 시집에 손이 가지도 않는다. 그래도 가끔이라도 시를 읽으려 애를 쓰고 있다.

산문에 없는 고유한 매력이 시에는 있다. 고도로 압축된 작가의 정신이 시어 곳곳에 담겨 있기 때문에 음식을 꼭꼭 씹어 먹듯이 시를 읽을 때는 천천히 음미하여야 한다.

 

영화감독으로 많이 알려진 유하가 이전에 시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는 많지 않다.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1993)로 영화계에 데뷔한 이래 <결혼은, 미친 짓이다>(2002), <비열한 거리>(2006), <쌍화점>(2008), 등을 연출하며 영화감독으로서는 어지간히 입지를 굳혀왔다. 2000년대 잘나가는 영화감독 유하는 90년대엔 주목받는 시인이었다.

1989년 시집 『무림일기』를 시작으로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세운상가 키드의 사랑』,『천일마화』등 다수의 시집을 세상에 내어놓았다.

그의 영화가 그러하듯이 그의 시에도 자본주의 사회의 욕망의 문제와 세상을 바라보는 삐딱한 시선이 담겨있다.

 

조금 길지만 시의 일부분을 옮겨보았다. 시인의 마음이 내 마음이고, 내 마음이 곧 시인의 마음이었다. 이 시를 읽고서 ‘그래 이거다’ 싶었다. 명절을 지독히도 싫어하는 인간이 ‘나 말고도 여기 또 하나 있구나’ 하는 절절한 동지의식!

명절을 대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같지는 않다.

여성들에게 명절은 그야말로 최악의 시즌이다. 하루 종일 이어지는 고된 노동과 시댁 식구와의 사이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리라(남성들은 이걸 모른다. 아니 알면서도 외면하고 있는 것일지도…). 취직 못하고 시집 장가가지 못한 청년들에게도 명절은 고난의 행군이다(연휴 내내 이어지는 친척들의 잔소리는 비행장 옆의 소음소리 만큼이나 고통스럽다).

명절날 신이 나는 이들은 초등학생 꼬맹이들과 남자 어른들 밖에 없다. 남성들은 유일하게 명절날 큰소리 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는다. 평소에 눈치 보느라 꼭꼭 숨겨온 남성성과 가부장성과 꼰대성이 이날만큼은 마구마구 분출된다(명절의 역사·문화적 특성상 어느 정도는 용인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대한민국 남성들은 1년에 두 번, 설과 추석날 남성으로서의 존재가치를 증명 받는다.

 

나 역시도 종갓집의 맏며느리만큼이나 명절을 싫어하는 1인 중의 하나이다.

‘명절증후군’을 앓을 만큼 혹독한 스트레스를 겪는 여성들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명절을 앞두고는 나도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지끈하다.

서른넷의 나이에 아직 장가도 못 간 나는, 명절만 되면 졸지에 심각한 결함을 가진 문제아가 된다.

‘더 늦기 전에 얼릉 장가가야지, 니는 뭐하고 있노?’

‘니가 나이가 몇 인데 아직까지 그카고 있노?’

‘작은 아제집의 호규는 한참 전에 장개 가가지고 아가 하매 두 살이라 카던데’

‘남자란 모름지기 장개를 가서 자슥을 낳아봐야 어른이 되는기라’

 

보는 친척들마다 한마디씩 거든다. 그래봤자 겨우 1년에 한두 번 밖에 못 보는 관계이다.

친하지도, 별로 친해지고 싶지도 않은 어르신들께서 남의 인생에 왜 그리 걱정이 많으신지.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져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릴 정도’의 내공이 쌓였지만, 가끔 눈치 없이 잔소리를 길게 늘어놓는 강적을 만날 때면 인내심의 바닥을 느끼고는 한다. 우리나라에서 ‘예의’란 단어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대할 때만 필요한 단어이지,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상대할 때에는 무의미한 단어이다. 우리 최소한의 예의는 좀 지키고 살자. 대한민국은 ‘동방예의지국’이 아니던가.

‘김씨 집안의 종손’인 유하가 명절날 순식간에 ‘폐인’이 되고, ‘비정상인’으로 전락하듯, 우리의 미혼 청춘남녀들은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명절 내내 고개를 숙이고 지낼 수밖에 없다. 친척 조카들을 향한 애끓는 마음은 우리도 잘 알고 있으니 걱정은 부디 마음속으로만 해 주시라. 생각 같아서는 나도 이번 추석에는 ‘일탈의 고독’을 택하고 싶다.

 

추석을 앞두고 신문이나 TV뉴스에서 볼 수 있는 ‘고향의 따뜻한 정’, ‘화목한 우리 집안’, ‘선물 가득 안고 고향집 방문’, ‘대청마루에서 송편을 빚는 우애 깊은 형제들’ 따위의 기사들은 어쩌면 그저 사람들의 기대나 바람일 수도 있다. 나는 그런 기사를 볼 때마다 불편함을 느낀다.

누구에게는 따뜻하고 행복한 명절이 누구에게는 하나도 안 즐겁고 외려 고통스러운 날들일 수도 있다. 나도 즐거운 명절을 좀 보내고 싶다. 아니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즐거운 명절을 보냈으면 좋겠다. 그러니 우리, 지킬 건 좀 지키고, 양보할 건 양보하고, 이해할 건 이해하면서 명절을 보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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